큰스님 법문

한국불교의 미래를 듣는다 - 안국선원장 수불스님

마음정원(寂光) 2005. 5. 27. 13:00
죽을 만큼 답답해야 제대로 된 의심

대선지식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떠야

깨달음의 방법 너무 신비화해선 안돼

다른 사람도 견성할 수 있게 공개해야

사진설명: 안국선원장 수불스님이 지난 20일 조계사에서 ‘불교의 깨달음’을 주제로 법문하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눈으로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바로 알고 믿을 수 있는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위한 믿음 즉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교를 위한 종교생활을 하면 어리석어집니다. 광신자.맹신자 되기 쉽습니다. 본질을 자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가 이야기하려는 근본 핵심에 도달하려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믿고, 종교가 추구하는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밝음도 어둠도 비출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둠과 밝음을 함께 비추는 빛이야 말로 모든 바다를 다 비출 수 있고, 그런 지혜를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그런 지혜를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인연에 머물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지부터 고민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해 새벽 별을 보고 깨닫고, 용수.달마스님 등이 깨달음을 이어왔습니다. 달마스님은 〈능가경〉을 중시했는데, 그것이 승찬스님 때까지 내려오다 〈금강경〉으로 바뀌었습니다. 〈금강경〉으로 바뀐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정서가 〈금강경〉에 가장 잘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역대 조사들은 〈금강경〉을 통해 선(禪)적인 사유를 했습니다. 육조스님 이후 남종선.북조선으로 갈라졌고, 송나라 때 종고스님이 간화선을 체계화했습니다. 남종선이 중국 선을 대표하면서 조사선이 활짝 열립니다.

조사선적 가르침은 선지식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조사선적 가르침은 직접 부딪쳐야 합니다. 조사선의 가르침은 공안을 들고 공부하는 간화선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의심을 하게하고 문턱이 닳도록 조실스님 방문을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조실을 만나 바로 선으로 들어가게 하고, 믿음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하게 했습니다. 인연 따라 깨달음을 얻는 그런 공부법을 채택한 것이 조사선입니다. 많은 조사들이 나왔지만, 숫자가 한정됐습니다. 사원 중심으로 조사선이 진행됐기에 재가자들 가운데 깨닫는 이가 드물었습니다. 간화선 시대가 열리면서 승속을 막론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됐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두공안을 제시합니다. 공안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면, 조사선 시대의 공안제시 방법과 간화선 시대의 공안제시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묵조선은 조용한 환경에서 가능합니다. 다변화되는 현실 속에서는 묵조선 수행은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일과 수행을 함께 할 수 있는 수행법이 필요합니다. 의심을 하되 의심을 한번에 잡을 수 있는 그런 의심을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 인고’하는 것은 선지식이 묻는 질문입니다. 눈 밝은 선지식이 이미 답을 안 연후에, 답을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네 본래면목을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줬을 때, 언하변오(言下變悟)하든지, 의심이 되든지, 또 다른 선지식에게 묻는다는 등 이런 저런 일련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 인고’하고 물었을 적에, 문제를 외면서 답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됩니다. 문제를 한번 보고 듣고 익히면 됩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한 마디 던진 물음에 제자는 답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한 올바른 답했을 때 인가해주는 것입니다. 답을 얻지 못했을 때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의심하도록 해야 합니다. 의심을 안 할 것 같으면 그만둬야 합니다.

의심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제대로 의심을 하면 목이 꽉 조여 옵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쪼여 옵니다. 나가고는 싶은데 길은 안 보이고, 앉지도 서지도,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화두는 온 몸으로 갑갑한 마음 상태,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들려야 합니다. 직접 주인공을 불러야 합니다. 온 몸으로 의심이 될 때, 의심을 들어야 합니다. 공부는 빨리 하면 할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그럼 무슨 공부로, 온 몸으로 바르게 체득할 수 있을 것인가. 출.재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공부해야 합니다.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공부라고 부처님은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뒤 근기와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했습니다. 육조스님도 〈육조단경〉에서 법문을 듣기위해 온 모든 사람이 선지식이라 했습니다. 대선지식을 못 만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선지식을 만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견성법.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법은 견성하고 난 뒤 다른 사람을 견성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을 말합니다. 혼자만 깨달았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하겠다는 법이 마하반야바라밀법입니다. 입만 갖고 마하반야바라밀해서는 안됩니다. 온 몸으로 체득되는 그런 깨달음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이런 깨달음의 방법은 모든 중생에게 공개돼야 합니다. 여기서는 비밀이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공개 안 한 것이 없는데,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법으로 맞든 몽둥이로 맞든 열어 보여야 합니다.

‘화두를 푼다’는 말은 없지만, 한국선의 앞날을 위해 화두를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두 내용을 말하면 일반적으로 ‘화두를 풀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화두를 풀면 잘못했다고 두들겨 맞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내려왔는데 멋대로 화두를 풀면 어떻게 하느냐고 비판 받습니다. 화두를 풀든 말든, 하나를 풀면 다 풀린다고 했는데 말 못할 무엇이 있다고 그런 것을 비밀로 해야 합니까. 화두는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합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화두는 ‘활구’(活句)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죽은 말을 들고 하면 안 됩니다. 활구는 의심하지 않으며, 의심되어지는 화두입니다. 의심이 끝날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말입니다. 사구(死句)는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어리석어집니다. 조사어록 가운데 간화선 수행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선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에 들어가 날짜를 기약해 성공하고자 한다면 마치 천 길의 우물 바닥에 떨어졌을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오직 우물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마음처럼 의심해야 한다.” 이 말은 깊은 우물에 떨어진 사람이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따로 없다, 빠진 그 길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심(信心)으로 꽉 찼을 때 끝까지 온 몸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신심은 자기에게 주어진 활구화두를 믿어야 형성됩니다. 화두를 들었을 때는 누구의 말도 믿지도 듣지도 말고, 화두 하나만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대(大)신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근원적인 믿음입니다. 눈 앞에 당면한 그 문제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어서 공부하게 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으로 의심한 것이 아니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않고, 참 의심이 일어나면 ‘이뭣고’ 하는 순간에 화두가 꽉 잡힙니다. 다시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려든 것처럼 말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됩니다. 그 때 눈 밝은 선지식이 채찍들고 질타하게 됩니다. ‘이 놈 참 공부할 놈이구나’ 또는 ‘공부할 인연에 걸려 들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화두 의심은 한 번 듣고, 의심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화두 의심에 전력해야, 외통수에 걸려들어야 제대로 수행한 것이 됩니다.

“천마의 허망한 모습에 속아도 속는 줄 모르고 얼마나 오랫동안 끄달려 왔던가. 목마가 불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목에 걸린 가시를 뽑았도다. 천지가 본래부터 자리하지 않았거늘 그림자가 어느 결에 생겨 나리요. 어느 날 갑자기 머리 셋 달린 신장을 밀쳐 버리니 황금빛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치는구나. 억!”

정리=조병활 기자

%불교신문사(사장 향적스님)와 조계사(주지 원담스님)가 공동주최한 ‘한국불교의 미래를 듣는다’ 주제의  기획법회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