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늦게까지 PD수첩-조계종...-을 보며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슬프고 답답하여 불을 끄고도 금방 잠이 들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 함께 먹물옷을 입고 있는 이로써 죄책감 같은 것도 느껴지고, 반면 이런 저런 생각할 것들을 많이 던져주는 내게는 화두와도 같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예불을 마치고 앉아 마음 속의 것들을 끄적여 봅니다.] 세상에 대해 드는 의문 한 가지! 왜 사람들은 소박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을 때는 그러지 않다가도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며, 많은 양의 재산이 주어지기만 하면 변하는 것일까. 가난하고 명성이 높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라. 그들의 마음은 투명하고 깨끗하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눈에는 사회의 부조리도 잘 보이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러다보니 수많은 나라들에서 민주화의 움직임이 일었던 것도 아래로부터였고, 가난한 이들, 명성과 지위와 부귀를 갖지 못한 자들로부터였다. 그들의 요구는 너무나도 당연하며 투명한 것들이고, 그것은 마치 진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내용이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 무언가 세상의 잘못된 것들을 깨고 변화시키려는 움직임, 그것은 언제나 아래로부터였지 소유와 명성과 온갖 기득권을 가진자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없다. 이 인류 역사의 영적인 성장은 언제나 ‘없는 자’, ‘낮은 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 볼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렇게 없는 자, 낮은 자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정의로움과 진리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모든 열망들은 과연 언제부터 깨어지기 시작하는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바람들이 성취되는 순간부터다. 없는 자가 있는 자로 바뀌고, 낮은 자가 높은 자로 바뀌고, 비 기득권 층들이 새로운 기득권 층으로 바뀔 때, 처음에는 다소 안정적이고 희망적이던 사회도 곧 그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암담함 속으로 치닫곤 한다.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기득권층, 소유와 명성을 가진 자들이 곧 그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피폐한 정신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이다. 소유와 명예와 권력과 부유함,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아닐까. 이러한 세상의 모습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된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기득권이든 소유가 많아진다는 것은 곧 정신의 쇄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결론은 아닐지라도 그야말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법한 그런 것이라는 것이 점점 더 세상을 알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내 스스로 몸담고 있는 요즈음의 불교계 현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불교계라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로 그것은 어떤 특정한 종교를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와 자비와 참됨과 정의로움과 맑고 청정한 우뚝 선 정신의 최고봉에 서고자 정진하는 이들이 몸담고 수행하며 정진하고 기도하는 그런 실체 없는 모임이 아닌가. 물론 많은 종교계가 그러하겠지만, 불교계와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바가 청빈과 가난, 비움과 나눔, 자족과 깨어있음 등의 그야말로 이 세상을 맑히고 밝히는, 그래서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그런 사명을 가진 청정을 꿈꾸는 이들이 아닌가. 최고의 정신적 스승, 그 어떤 외부의 티끌과 진흙 속에서도 연꽃처럼 물들지 않고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스승, 이 세상이 오염에 물들었을 때 그들을 지켜 줄 마지막 영적 보루, 그들이 스스로의 타락과 피폐함을 참회하며 그 큰 가슴에 와락 안길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은 자비의 스승, 그것이 바로 불교계의 또 종교계의 지도자들의 몫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종교계가 요즈음 세간의 지탄을 받고 있다. 이 정도면 지탄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거꾸로 종교계가 세간의 청정한 이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화를 되찾아야 할 정도로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이러한 상황들이 물론 대선용이니, 혹은 어떤 큰 치부를 무마시키고자 다른 쪽을 치면서 시선을 돌리고자 하는 언론플레이니, 혹은 어떤 큰 틀 속에서의 종교간 폭로전 같은 성격을 띄고 붉어져 나왔느니 하는 그런 문제들은 잠시 덮어 두자. 사실 그런 것들은 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아무리 그러한 의도성 짙은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종교계가 스스로 청정하고 순수함과 진리성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일들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언제 타오를지 모를 잠재된 불씨였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건 너무나 아주 너무나도 궁금한 것이 아닌가. 궁금하다기 보다 너무나도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희망의 불씨를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최악의 현실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맑고 청정해야 할 곳, 세상 사람들이 의지해야 할 마지막 영적 보루 같은 곳에서 세상 사람들을 실망 아니 절망시키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대상이 더 이상 없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는 절망 끝의 절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돌아가 기댈 고향이 있고, 어머니의 품 같은 것이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희망을 품어 볼 수 있고, 최후에 내가 가서 안위와 평안을 의지할 그런 종교적인 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삶의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최후의 영적 고향이 뿌리 뽑히는 그런 절망감, 그런 절망감이 요즘 종교계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손을 써 보아야 할까. 과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물론 아직 절망하거나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이런 현실은 종교계, 혹은 불교계 전체의 문제인 것은 분명 아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명예와 부귀와 지위와 기득권을 ‘가진 자’들 몇몇이 만들어내는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꿈꾸는 참되고, 정의롭고, 순수하고, 청정하며 가난과 청빈, 나눔과 비움, 깨어있음의 정신을 올곧게 온전히 유지하고 계시는 수많은 향기나는 수행자가 이 땅 위에 숨 쉬고 있다. 그 숨소리는 여전히 이 적막강산에 따스한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그렇기에 몇몇 종교인들의 추악한 행태를 종교계, 불교계 전체의 것인 양 확대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추악한 종교인 몇몇의 행태가 아니다. 그들을 보며 세상 말세라고 욕하며 하기 좋은 말로 모여 안주삼아 얘기하고 마는 그런 시답잖은 안주꺼리로 끝내서는 안 된다. 본질이 무엇인지,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고 내 안에 그런 문제들은 없었는지, 내 안에 그런 추악한 성품들은 없었는지를 냉정하게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법계에서는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고, 가르쳐 주기 위해 이런 일들을 벌인 것은 아닐까. 그저 안주꺼리삼아 종교인들 욕이나 하라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근본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것이 아닐까.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소박하고 가난하며 소유한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저절로 정신적인 충만감이나 영적인 기쁨들이 함께 한다. 처음 출가할 때의 그 본분으로 돌아가 보라. 출가의 정신이란 바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드높은 비움과 청빈과 나눔과 깨어남의 정신이 꼿꼿하고 꼬장꼬장하게 우리 안에 중심으로 서 있는 때다. 출가 정신의 중심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무소유의 정신이 있다. 모든 소유와 기득권과 그동안 삶에서 끌어 모았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정신의 깨어남을 위해, 영적인 성숙을 위해 내 모든 존재를 완전히 부처님께 내바친 것이다. 그러나 점차 소유가 늘어나고, 명예가 높아지며, 기득권을 가지게 되면서, 또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일들을 추진해 나가면서 정신적인 기틀은 조금씩 땅에 떨어지게 되고, 주춤주춤 거리며 본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출가정신을 점점 더 망각해 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출가정신을 망각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소유’에 있다. 불교의 근본 정신은 비움과 나눔에 있다. 비움이란 무소유, 무집착, 무소득, 무분별, 무념, 무상 등에서 보듯이 정혜의 실천, 지관의 실천으로 놓아버림이며, 고요함(定)이고, 깨어있음(慧)에 있다. 비움의 실천을 위해 수행과 정진을 실천하는 것이다. 나눔이란 무주상보시, 자비 등의 가르침으로 소유를 나누고, 진리를 나누며, 본래 내 것이 없었음을 깨닫는데 있다. 나눔의 실천이 바로 보시이며 자비인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근본을 잃어버리면서부터 출가정신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두 가지 근본 정신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무소유’이며, ‘가난과 청빈’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소유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몸과 마음은 편해지고 몸과 마음이 편해질수록 정신은 그 총기(聰氣)를 잃고 만다. 수행자의 본분사는 끊임없이 출가정신을 내 안에 깃들게 하며, 끊임없이 가난과 청빈의 일상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쉽지 않을지라도 그래서 때때로 마음 가운데 욕심과 집착이 생겨날지라도 끊임없이 지켜보고, 끊임없이 다독이며, 주춤주춤 거릴지라도 끝끝내 세속적인 욕망과 집착을 붙잡지 않고 본연의 출가정신에 뿌리를 내리려 애쓰는 그 모습이야말로 눈물겨운 출가자의 모습이 아닐까. 완전히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는 누구나 욕망과 집착의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우리 마음 속에 그런 티끌이 올라오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출가정신이란 그것 자체를 가지고 내 마음이 출가를 잃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켜보기를 게을리하며, 끊임없이 매일매일 출가하려는 그 마음 자세를 잃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다시 한번, 아주 단순한 현실에 대한 관찰 하나. 결론 하나. 부자면 부자일수록,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 나는 안 그래야 겠다 싶겠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이 소유의 실체인 듯 여겨진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온 것이 아닌가. 될 수 있다면 가난과 청빈과 자족의 정신을 위해 애쓸 일이다. 삶을 살면서 될 수 있으면 많이 벌고자,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보다 이름을 드날리고, 소유를 늘리고자 애써왔던 모든 노력들을 거두고 거꾸로 가는 길을 택할 일이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정신이며 출가정신이고, 나아가 모든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길동무다. 가난과 청빈은 둘도 없는 소중한 도반의 그것과도 같다. 청빈의 삶은 저절로 우리의 정신에 맑은 영혼을 불어 넣어준다. 여기까지는 이제 일반적인 결론이 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빈을 실천하는 일이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청빈을 실천하기 어려울까. 가난한 것, 무소유 한 것은 안정감이 없기 때문이다. 소유한 것이 없으면 이제부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근심 걱정이 시작된다. 든든하게 모아 놓은 재산이나 땅이나 아파트라도 있어야 노후 걱정도 없고, 무언가 기댈 곳이 있어 편안한데, 모아 놓은 것이 없으면 삶은 늘 불안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무언가를 찾는다. 안정적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어떤 것, 내 미래에 든든하게 기댈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는다. 그 답이 바로 ‘소유’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나를 가장 안정적으로 만들어주고,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며, 내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소유’요, ‘돈’이다. 명예나 권력에 대한 열망도 있겠지만 요즘 시대 같아서는 그것들 또한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열쇠인 듯 싶다. 소유와 돈, 욕심과 집착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면, 소유와 욕심을 줄이면 되는데, 그렇게 하려니 삶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고백하건데, 필자는 지금 이 글에서 어쩌면 나 자신에게 충고를 하고 있으며, 나 자신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죽비를 내려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유와 돈이란 놈은 신출귀몰한 녀석들이라 언제 어디에서 갑자기 출몰하여 우리 정신을 완전히 앗아갈 지 모르는 것들이니... 무엇이 더 무서운가. 돈과 소유가 더 무서운가, 아니면 삶의 불안정이 더 무서운가. 돈과 소유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들이다. 일반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모든 것을 뿌리치고 출가를 단행한 출가자조차, 한 때 수행으로 정신적인 행복과 축복을 누리며 소요했을 스님들조차 돈과 소유물이라는 것이 내 존재 안으로 들어닥치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리고 휩쓸리는 이 시대의 생생한 증거들을 보라.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들이란 말인가. 이렇게 보았을 때, 가난하게 산다는 것, 자족하며 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이며, 평화와 고요의 출발점인가. 그래서 모든 수행자, 모든 성인은 늘 가난과 벗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좀 더 분명해졌다. 우리 삶의 방향은 적은 소유에 만족하며 청빈과 가난을 삶의 원칙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려워 하지 말라. 돈과 소유에 노예가 되어 아무리 많은 소유물을 가졌더라도 정신이 퇴락한 존재가 가야할 곳은 지옥 뿐이 아니겠는가. 돈과 소유물이 넘쳐나는 삶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삶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런 삶은 너무나도 불안정하다. 언제 내 삶에 위기가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생이 되었든, 아니면 죽고 난 다음 생이 되었든 위기와 쇠락과 고통의 때는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돈과 소유가 없는 불안정한 삶, 사실은 그러한 삶이야말로 가장 안정적인 삶이다. 이 세상의 본질은 불안정에 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안정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이 세상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정해 져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세상에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 세상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나도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그것이 이 세상 본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살아볼 만한 곳이다. 모든 것이 정해 져 있고, 모든 것이 확실하다면 삶을 살아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삶은 무의미하고, 둔감하며, 아무런 할 일이 없다. 돈과 소유물이 충분히 넘쳐 나고, 내 삶의 미래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면, 그런 삶을 사는 이는 총기를 잃고 만다. 그런 이에게 총명함이나 삶을 대하는 불꽃같은 에너지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쓸모없는 자로, 할일 없는 자로 전락하고 만다. 더 이상 무슨 할 것이 있겠는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고, 안정되어 있으며, 확실한 소유와 미래가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이제 여기에서 끝이 나는 것이다. 물고기를 운반할 때도 충분히 먹을 것을 주고, 안정적인 좋은 조건 속에서 두었을 때 죽어가는 반면에, 먹을 것도 충분치 않고, 나를 잡아먹는 다른 물고기와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더 에너지를 뿜어내며 삶의 의욕을 불태운다고 하지 않는가. 삶이 정해 져 있지 않고, 불안정하다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다. 그리고 그 축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욕심과 욕망으로 돈과 소유를 늘리면 좀 더 안정적이고, 확실해 질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일 뿐이다. 소유가 늘어나고, 재산이 많아지면 더욱 안정적이고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한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들 또한 소유와 돈을 위한 질주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이란 본래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는 바로 그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우리는 돈과 소유를 통해 안정을 찾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을 계속해 갈 것이다. 아, 내 삶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일의 일을 알 수 없고, 미래의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박진감 넘치며, 활기찬 소식인가. 다 정해져있고, 확실하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내가 순간 순간 현실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찰나의 현실이 찰나로 변하며 이어지는 이 우주적인 축복을 받으며 사는 우리야말로 살아있는 생생한 붓다요, 깨어있는 신 그 자체다. 불안정이야말로 최고의 안정이며, 불확실이야말로 우리에게 활기찬 삶을 살도록 해 주는 최적의 요소다. 불안정과 불확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가난과 청빈에서 오는 불안정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무엇을 해 먹고 살까, 노후에는 어떻게 살까, 밥은 먹고 살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 말라. 다만 지금 이 순간 어떤 삶을 살아나갈 것인지를 궁구하라.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바로 내일의 나를 먹여 살릴 것이다. 돈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과 내 삶의 행위가 나를 먹여 살린다. 소유가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청빈의 정신이 나를 먹여 살린다. 청빈은 절대 우리를 굶기지 않는다. 가난의 정신은 우리가 먹고 사는 모든 문제를 거두어들인다. 이 우주적인 진리의 영혼은 가난과 청빈의 정신으로 사는 구도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의 붓다, 우리의 신은 가난과 청빈에서 오는 불안정과 불확실 속에 진리를 숨겨두고 있다. 나는 오늘도 내 스스로에게 경책을 내린다. 가난과 청빈의 삶에 대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욕구를 놓아버림에 대한, 끊임없이 올라오더라도 끊임없이 경책의 죽비를 스스로에게 내려칠 예정이다. 욱 하고 올라오면 퍽 하고 내려 칠 작정이다. 머리 깎고 승복 입은 것이 출가가 아니라 출가정신이 매일 매순간 존재 위를 스치우는 것이 출가다. 출가 정신이 내 존재의 하늘 위에 풍성하게 꽃피어나도록 스스로에게 경책의 물과 거름을 뿌려주자. [사진 : 법주사] |
출처 : 목탁소리(www.moktaksori.org)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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