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의 향기

바람부는 산사 - 정목스님

마음정원(寂光) 2006. 7. 29. 01:16


 

바람부는 산사


                                                               정목스님 글


바람부는 산사


20대 초반, 방랑자가 되어 이산중 저산중 떠돌아다니던 시절, 도반의 소개로 찾아갔던, 원효대사가 머물며 수행하셨다는 절 심원사에서 스님과 저는 처음 만났지요.  스님은 그 때 이미 마흔 가까운 연세였는데도 혼자 산중토굴 생활을 하면서 정진하신 지 오래된 것 같았습니다.  인적도 없는 그 깊은 산중에 혼자 계셨지만 전혀 두려움을 모르는 분이셨지요.  체구는 작지만 당당했고,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행자로서의 위엄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비구니 스님이 첩첩산중에 혼자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스님은 전혀 신경쓰지 않으셨지요.

예고도 없이 찾아든 젊은 객승을 스님은 반갑게 맞아주셨고, 한동안 산을 내려가지 않으리라 작정한 저는 그날부터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심원사, 정말 호랑이라도 나올 듯한 첩첩산중의 누옥이었습니다.  세평 남짓한 산신각과 열댓 평이나 될까 싶은 당우가 전부였던 초라한 그 절집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사시는지…….

언제가 지방에 다녀오던 길에 심원사를 찾았는데, 20여 년 전 모습은 찾을 수 없고 큰길이 훤하게 뚫려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 있더군요.  행여 중창 불사로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절까지 들어가지 않고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납니다.

순수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처음 그 절을 찾아갔을 때가 눈앞에 생생히 떠오릅니다.  어디가 어딘지, 도반과 함께 바랑 하나 메고 무성한 숲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길이라고 여겼던 것마저 뚝 끊겨버리고 해마저 기울기 시작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 도반과 저는 이리저리 풀섶을 해치며 막막해했습니다.

무작정 느낌만으로 앞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계곡이 나타났고, 도반과 저는 계곡을 따라 자꾸자꾸 올랐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오리무중일 뿐이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오래 전에 찾아갔을 때 깊은 소(沼)를 뛰어넘은 기억이 난다는 도반스님의 말을 따라 다시 계곡을 따라가자 정말 소용돌이치는 소가 나타났는데, 길은 끊어지고 얼마나 깊은지 알 수도 없는 소마저 뛰어넘어가야 한다니 기가 막혔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바랑을 벗어 반대편 바위 위로 던져놓고, 입고 있던 두루마기도 벗어서 던지고, 양말과 신발도 벗어서 던져놓고 최대한 홀가분한 상태로 건너갈 준비를 했습니다.  계곡의 소는 깊이를 알 수 없이 캄캄하게 무서웠고, 물살 또한 급해서 우린 바짝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훌쩍 뛰어넘고, 이어서 도반스님도 펄쩍 뛰어넘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다시 바랑을 챙겨 걸머지고 발걸음을 재촉하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더군요.  다행히 어두워질 무렵 우린 암자에 도착했습니다.

불현듯 들이닥친 우리를 본 스님은 깜짝 놀라 양팔을 벌리고 반가워하며 우리를 맞아주셨지요.  그도 그럴 것이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기가 들어오는 곳도 아닌 그곳에 갑작스레 손님들이 찾아들었으니까요.

다음날 함께 왔던 도반스님은 하산하고, 그때부터 저는 스님과 함께 토굴 생활을 시작했지요.  먹을 것이라곤 맨밥에 반찬은 오직 한 가지, 스님이 텃밭에 씨뿌려 가꾼 열무김치로 담근 김치뿐이었죠.  소금과 고춧가루, 두 가지로 안을 맞춘 그 김치는 그러나 꿀맛이었습니다.  도시에도 냉장고가 흔하지 않을 때였지만, 우리에겐 기가 막힌 산중 냉장고가 있었는데, 계곡의 바위틈을 흐르는 물이 바로 그것이었죠.  서늘한 물 속에 담가둔 김치는 시원하고 개운하여 꿀맛이 따로 없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스님이 아랫마을로 내려간 사이 들이닥친 땅꾼들 생각이 나는 군요. 부뚜막에서 혼자 뭔가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 사람이 서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덜컥 겁이 나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모르는 척 뒤로 돌아서려 하는데, “물 좀 주세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남자 세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뱀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고 난 뒤 얼마나 무서웠던지 저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고리에 숟가락을 꽂아놓고선 혹시라도 밖으로 그림자가 비칠까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었지요.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그들은 사라진 지 오래인데 나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고 있구나.’

그건 작은 깨달음 같은 것이었습니다.  두려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움이니 그리움이니 분노니 사랑이니 하는 모든 갈등이 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탁 트여왔습니다.  마음이 금세 가벼워져 이불을 팽개치고 법당으로 걸어 나오자 창호지 바른 문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지요.  바람을 맞아 일렁거리는 소나무 그림자가 한 폭의 그림처럼 문살 위로 춤추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 위에 산은 그려도

마음은 그릴 수 없어.

벽을 향하여 참선하는 님의 모습 그려도

바람은 그릴 수 없네.

해 저물고 달이 뜬 산사에 가냘픈 촛불이

바람에 거질 듯이 흔들리고

달빛이 창문에 비쳐오면 소나무 그림자

파도처럼 출렁이네.

솔바람이 우우우, 잠을 깨우는

산사엔 바람 소리가 들릴 뿐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어라.

내 영혼 깊은 곳을 적시는

산사의 바람 소리, 산사의 바람소리.


그땐 빈 종이에 써내려간 글입니다.  달님이 법당 안을 환하게 비추자 달빛이 주는 행복감과 평화로움이 어둠 때문에 일어난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주었지요.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 또한 내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란 사실을요.

스님이 돌아오신 건 한참 뒤였습니다.  “정목스님, 내 왔다. 오래 기다렸지?”하시며 무거운 짐을 부리셨지요.  마을에 내려갔다가 어느 댁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염불해주고 오시느라 늦었다고 말씀하신 스님은 쌀뿐만이 아니라 저를 주려고 과자, 사탕 등 이것저것을 챙겨오셨지요.  낮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깔깔 웃으시며 “밥은 못 먹었어도 겁은 먹었으니 됐다” 하며 놀리셨지요.

그날 이후 스님은 외출할 때마다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새벽에 산길을 갈 때는 지팡이를 하나 들고 꼭 제 앞에 서신 채, “내가 이슬을 치면서 가야 옷에 물이 묻지 않는다.” 하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혹시 만날지도 모르는 뱀을 쫓기 위해서였지요.  제가 미리 겁먹을까봐 스님은 이슬을 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한밤중에 댓돌로 내려서다 고무신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뱀을 밟아도 스님은 제가 미끄러질까 걱정하실 뿐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지금 뱀이나 짐승, 미물인 벌레 하나에도 친구 같은 다정함을 느끼게 된 것은 그 시절 스님께 받은 배움 덕분이지요.

정현스님, 스님도 이제 어언 환갑을 넘긴 연세가 되셨겠지요? 그 후 스님이 심원사를 떠나 삼악산 흥국사에 머물고 계실 때는 저는 스님과 함께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곳은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 살고 계셨고, 반찬도 두 가지나 더 있어 심원사보다 훨씬 풍족했지요.  전기가 없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가 필요한 물품을 지게로 날라주셨으니 호강스런 생활이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귀하고 소중하여 성냥 한 개비도 함부로 쓰지 않았지요.  근심을 풀어놓는 해우소(解優所, 화장실)의 휴지는 말할 것도 없고, 초 한자루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지면 책 읽을 때나 촛불을 켰습니다.  그때도 스님은 저를 배려해 정작 당신은 메주를 띄우던 큰방으로 건너가시고 스님 방을 제게 내주셨지요.  할아버지가 패주신 장작 덕에 스님이 내어주신 방은 새벽까지 방바닥이 따뜻했지만 윗공기가 너무 차가워 코끝이 시릴 정도였습니다.  눈 내린 새벽이면 온통 은빛으로 변하던 산중, 큰 짐승의 발자국이 눈 위에 뚜벅뚜벅 흔적을 남겨놓던 그 겨울의 산중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스님은 그때도 오고 감에 미련 없이 모든 걸 훌쩍 버리고 떠나셨지요.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시던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삶을 사시던 스님.  걸음 없이 사는 수행자의 모습을 저는 스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스님을 뵙지 못한 지 어언 20년.  바람처럼 구름처럼 한 곳에 매이지 않으시는 스님의 행방 알 길 없지만 스님은 언제나 그때의 그 성성하신 모습 그대로 제 마음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정목스님은 1976년 열여섯 살에 출가해서 동국대 선학과와 중앙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 오랫동안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화 상담기관인 ‘자비의전화’를 만들었습니다. MC로 방송에 나서면서 많은 활동을 하셨죠. 현재는 ‘마음고요선방’을 열어 종교를 초월해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일과 아픈 어린이를 돕는 ‘작은사랑’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