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한 생각 한 생각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

마음정원(寂光) 2006. 5. 29. 14:56

한 생각 한 생각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

         
부처님 마음은 얼마나 맑고 고요한 것일까.

우리도 마음이란 게 있지만 깨달으신 분의
때 묻지 않은 마음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지 않으십니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귑니다. 망울 튼 버들가지는
싱그럽고 시냇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갑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아낙네들은 봄나물을
뜯고 있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런
광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이 있으면 물을 보고 꽃이 있으면 꽃을
본다는 것. 이게 바로 공적영지(空寂靈知)입니다.
이 자리가 본심(本心)의 자리인 참 마음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산에 올라가서
연 초록색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듣고,

흘러가는 물을 보고,
티 없는 파란 하늘을 보면 마음 편하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 일 않고 빈둥대는 남편
바라보면 마음이 확 상하면서 화가 나지요?

왜 그럴까요?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한데 연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쁜 것,
바로 분별때문입니다.
여여하게 본 것이 아닙니다.

성철 큰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화두 아닌 화두를 세상에 던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까?

삼천배를 성공한 몇몇
언론인들이 큰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성철 큰 스님이 답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아, 산이니까 산이라 하고
물이니까 물이라고 하지. 그럼
당신들은 산을 뭐라고 부르는고?

물을 뭐라고 부르는고?”
이미 큰 스님은 분별과 시비심을
넘어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기신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차별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여여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것 하나만 되어도 보통 사람하고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여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선의 기본이라 하지만

이것을 학문으로만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가는 바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산에서 시냇물 흐르는 좋은 소리를 듣고
집에 오자마자 남편 본 순간 화가 난다면
아직 갈 길이 한참 먼 분이십니다.

여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화가 났다거나 짜증 날 때 상대방 허물을
보기전에 내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 발이라도 부처님
마음에 다가간 것입니다. 본심(本心)은
공적(空寂)하며 일체 상이 끊어지고
영영(靈靈)해서 혼매(昏昧)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심은 모든 생각의 근원입니다.
일체 선악의 만법(萬法)을 갖추고 있고
생과 사의 시발점입니다. 한 마음에서 모든
생각이 일어나고 산하대지 일월성신이 생겨납니다.

한 마음에서 일어난 선악을 관찰해 보면
전부 자신의 마음 가운데 일어난 생각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즉, ‘생각’이라는 것은
맑고 깨끗한 마음 바탕에서 일어난 그림자입니다.

공적영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행방법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두에 제가 한 말,
여여한 마음을 가지라는 한 마디에
정말 여여한 마음을 갖고 행동으로 실천
할 수 있다면 수행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근기가 아주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산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한 즉시
그 마음이 변하니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착각에 빠지지 말라"


국가별로 그 수행법이
다르지만 선의 궁극목적은 적정열반입니다.
적정열반은 곧 부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시비와 분별을 초월한 맑고 묘한
붓다의 세계를 말합니다. 오늘도
수좌스님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좌선에 듭니다.

일반인이 보기에 아무것도 안 하고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게 무슨 공부냐고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들뜨면 한 두 시간도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안정돼 있지 않으면 동분서주합니다.

선가에서 도피안,
열반묘심에 접근하기 위해
수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산중에 어떤 청신녀가
살고 있었는데 근거리에
한 스님이 공부하러 들어왔습니다.

청신녀와 어머니는 그 스님이 수행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매일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 올린 진 10년이 흐르자
청신녀 어머님이 딸에게 스님공부가
얼마나 됐는지 시험해 보라 일렀습니다.

딸은 스님 무릎에 앉으며
"기분이 어떠하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찬 바위덩어리가 얹어진 기분”이라 말했습니다.

청신녀는 스님을 끌어안으며
“기분이 어떠하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스님은 “썩은 고주박이 얹어진 기분”
이라 말했습니다. 청신녀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달려와 이같은 사실을 고하며
“공부가 아주 많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어머니는
갑자기 스님이 머무는 토굴로 올라가
스님을 내쫓고 토굴을 불태워버렸습니다.

왜 노파는 스님을 내쫓고 토굴을
불살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의심입니다. 우리 간화선에서는
이 의심을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밖에 못 깨닫습니다.

육신이 거짓 나라면, 참 나는 누구인가?
분명히 말하고 듣고, 슬프고 괴로운 줄
아는 이것은 거짓 나인가 참 나인가.

육신의 송장을 끌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나는 무엇인가. 이런
의심이 들어야 화두가 들립니다.

"한 마음이 천지 움직여"


의심이 든다고 해서 알음알이로
풀려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선어록 좀 보았다 해서 아는체
하면 큰일 납니다. 화두 깨치기는커녕
자신의 마음자락 한 조각도 잡을 수 없습니다.

알음알이 잣대를 화두에 대는 순간,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착각에 빠진
도인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참선 중에는 앉아 있음도 잊어야 합니다.
언제 깨달을까 하는 조급한 마음도
수행인에게는 큰 걸림돌입니다.

무엇보다 여러 공안에 천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이 뭐꼬,
내일은 판치생모, 모레는
무(無)자 화두 들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하나의 화두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화두를 들어 보십시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법향을 맡으실 것입니다.

그 법향은 교리를 통해
느껴본 것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선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수행하듯 정진해
보시면 부처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자라면
자비를 항상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용해시킬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비심은 깊어집니다.
한 사람의 그러한 마음이 천지를 움직일 것입니다.


 법보신문 / 여여선원장 정 여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