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佛子로서의 自覺

마음정원(寂光) 2006. 1. 3. 03:00


                        佛子로서의 自覺


                                                           계환 스님 (동국대 교수)



   이 세상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님들은

이미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룬 행복한 분들이지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인지 궁금하시죠?

   하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불법佛法을 만나는 일’입니다.


   현재 지구촌의 인구는 60억을 넘어서고, 종교 또한 1만2천여 개가 있다고 합

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있는

데, 인간의 몸 받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의아해하실 분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진리라고 하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따랐지만, 시대적 가

치관이 바뀐 오늘날은 무엇이든지 과학적인 증명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은 그 영역이 분명히 다릅니다.

   과학이 나 이외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삼는 연구분야라고 한다면, 불교는

바로 나 자신을 밝히고자 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설명

하기 위해 “맹구우목盲龜遇木과 침개상투針芥相投”라는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맹구우목’이란 뜻은 망망한 대해 속에 눈먼 거북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 번씩 바다위로 고개를 내밀고 세상구경을 하다 들어가지

요. 그런데 마침 구멍 뚫린 널빤지 하나가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

리 떠다니고 있었는데 눈먼 거북이가 물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 널빤지의

구멍에 딱 들어맞게 목을 내밀고 잠시 쉬었다가 들어갈 수 있는 확률, 그것을 가

리키는 말입니다.


   그 다음 ‘침투상개’란 뜻은 원래 수미산須彌山에 비유한 내용이지만, 실감이

가지 않으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63빌딩으로 하지요.

   그 63빌딩 옥상에서 겨자씨 한알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다시 바늘 하나를 아래

로 던져서 바로 그 바늘이  겨자씨에 꽂히게 하는 확률을 말합니다. 그 어느 쪽

도 확률로 말하자면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의학계에서는 평균 1억 분의 1의 확률로 정자와 난자가 결합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거쳐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참으로 희유

稀有한 일입니다. 게다가 수십 억이 되는 사람들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

날 수 있는 인연 또한 희유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서나마

부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지중한 인연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인연을 소중히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인간 이외의 가령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말에 거

부감을 느끼시는 불자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경험적 동물입니다. 경험한 세계의 실재는 인정하지만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는 새

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갖가지 동물

적인 요소도 사실은 경험적 축적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수한 세월동안 여러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

기 때문에 인신난득人身難得이라고 하고, 수많은 종교 가운데 부처님의 법을 만

났기 때문에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어려운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

니다. 그것은 중생이 윤회하는 육도六道 가운데서 오직 인간 세계에서만이 수행

이 가능하고 또한 성불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인간 세

상에 오셔서 깨달으신 분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희유한 만남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불교 공

부를 해야 할까요? 그러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에 대해서

좀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부해야 하며, 불

교인으로서의 생활방식을 어떻게 실천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방향이 잡

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한마디로 설명하고자 할 때는 불교사상이나 교리문제까지 언

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설명이 장황해지기 마련이니까요. 따라

서 무엇보다 간단한 방법으로는 불교라고 할 때의 ‘불교’라는 용어부터 설명하는

게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첫째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

달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석존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는

데, 즉 삼보三寶 가운데 불보佛寶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부처님()이 생전에 설법하신 가르침()을  불교라 합니다. 이는 부

처님이 45년간 설법하신 진리의 가르침으로, 법보法寶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

니다. 아무리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으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중생에게 설명하

지 않으셨다면 지금 불교는 존재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부처()가 되기 위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즉 성불成佛의 종교로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의미하지요.

   이는 삼보 가운데 승보僧寶에 해당하지만 출가수행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전 불교교단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교를 진정 불교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세 번째 “부처

가 되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불교가 살아있는 종교로써 정체

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세 번째 의미에서 비롯됩

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의미는 타종교에서도 갖추고 있는 것이지

만,  세 번째의 의미만은 오직 불교에서만 주장하고 또한  실천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바로 여기에 불교의 보편성과 평등성이 함께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신을 믿고 있는 종교는 오직 “믿음”을 중시하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입장인 반면에,  불교는 그와는 달리 “깨달음”을 찾고 “자각”을 추

구하는 종교라는 차원에서 그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제쳐두

고 단순히 지말적인 면만을 비교해서는 참다운 이해는 얻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불교란 바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불성

에 눈뜨게 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들은 인간의 몸을 받았다고 하는 자부심보다

도, 불자로써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더욱 절실

하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