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용서하십시요, 행복해집니다 - 법정스님

마음정원(寂光) 2005. 9. 19. 13:50

 

                   용서하십시오. 행복해집니다.

 

                              길상사 법정 스님 가을법문 지상중계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종교지도자로 선정된 법정 스님이 지난해 10월 17일 길상사에서 펼친 가을 법문 내용을 지상중계한다. 법정 스님은 이날 길상사 마당에 모인 1000여 대중들에게 올 가을 숙제로 달라이라마의 『용서』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용서가 바로 수행임을 알아차릴 것을 당부했다. (법보신문 편집자)


<사진설명>가장 신뢰받는 종교지도자로 선정된 법정스님은 “용서와 서원이 함께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수행자의 삶”이라고 강조한다.

"그대가 시인이라면 종이 안에 떠다니는 구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이 없으면 비도 없을 것이며, 비가 없으면 나무들은 자라지 못한다. 나무가 없으면 종이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은 틱낫한 스님이 자신의 책에서 종이에 관해 설명한 구절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 글을 통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종이 한 장을 통해 떠다니는 구름을 보게 되듯이 세상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온 생명을 바쳐 각자의 몫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있을 자리에 있으며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함이 생명 파괴

그러나 서양사람은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오만함으로 지구를 황폐화시켜 세상을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종속된 것이라는 발상, 그 생각으로 인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개발논리 아래에서 새와 짐승, 물고기 할 것 없이 많은 생명들이 하루에도 수백종씩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사람들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들은 보다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수렁에 빠뜨린 것은 보다 많은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서였고,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려는 그 전쟁에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독립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로가 주고받으면서 그물처럼 연결돼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실상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절에 다니는지, 교회에 다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종교적인 삶을 찾아서 왔다만 과연 어떤 것이 과연 종교적인 삶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달마 스님은 밖으로 모든 얽힘에서 벗어나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절벽 같아야 비로소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바깥에서 보고 듣는 것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늘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왜 종교적인 삶을 원하나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부터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이 성도하기 전까지를 무불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 중생들을 부탁받은 보살이 지장보살입니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다 덜어주고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보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보살이 되고 나서 원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원의 힘으로 부처와 보살이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서원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고3 아들 대학 붙게 해 주십시오’라든가 ‘ 빚 떼먹은 사람 찾게 해주십시오’ 같은 것말고 더 본질적인 큰 서원을 세우십시오. 청정하고 광대한 본질적인 원을 지니십시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원의 삶의 지표입니다. 원이 있는 사람은 그 원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과 나를 따로 분리시키지 마십시오. 이것은 서양의 이분법적인 사고입니다. 부처와 나를 둘로 나누지 마십시오. 중생은 몸을 받을 때 업의 힘(業力)으로 몸을 받고 보살은 원의 힘(願力)으로 몸을 받습니다. 청정하고 광대한 원을 지니고 살아야합니다. 원만 가지고 살아서는 안되며 순간순간 행동도 일치해야 합니다.


지난 4월 법회때 바로 이 자리에서 제가 ‘용서’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용서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저는 최근 출간된 달라이라마의 『용서』라는 대담집을 읽어보았습니다. 달라이라마의 책 중에서도 가장 달라이라마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달라이라마가 18년동안 중국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스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20년만에 달라이라마를 만난 이 스님의 모습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물었습니다. “그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두려운 적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그 스님은 “나 자신이 중국인을 미워하게 될까봐 중국인에 대한 자비심을 잃을까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참 부끄러웠습니까. 만일 내가 이 처지였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를 통해 내가 용서받고 용서를 통해 내가 그만큼 성숙합니다. 마음에 박힌 독을 용서를 통해서 풀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어떤 원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서원과 행동 일치해야

때가 되면 누구나 자신의 일몰 앞에 서게 됩니다. 그전에 맺힌 것을 풀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 짐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말고, 맺힌 것이 있으면 모두 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묵은 수렁에 갇혀서 새로운 날을 등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활짝 열리면 막혔던 세상의 눈도 덩달아 활짝 열리기 마련입니다.

 

[법보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