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부처님을 만나는 인연

마음정원(寂光) 2012. 12. 30. 14:01

 

 

부처님을 만나는 인연

 

 

내 마음의 경구

부처님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널리 중생의 앞마다 나투시네.

인연 따라 두루 감응하지 않음이 없으시니

항상 이곳이 깨달음의 자리일세.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화엄경』여래현상품에 있는 게송으로

대부분의《대웅전》네 기둥에 걸려있는 경구이다.

 

아마 이 글귀가 부처님과 중생의 벽을 허무는 가장 핵심이기에

예부터 스님들이 대웅전에 참배할 때마다 눈길이 마주치며

부처님과 함께하는 인연을 수행해 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으신 것은 연기법이다.

즉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생명이든 독자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라 한다.

 

이 우주 법계에 부처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니

어떤 생명이 어느 곳에 있더라도 부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중생이 그것을 알지 못함은

어리석어서 부처님의 인연을 따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연을 따라 두루 감응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중생이 발원을 하고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정진할 때

부처님의 감응은 자성의 깨달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므로

어느 곳에서나 열심히 정진하면 반드시 있는 그 자리가

깨달음을 이루는 곳이 된다는 의미다.

 

임제의현(臨濟義玄)선사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즉 ‘곳에 따라 주인이 되면 있는 그 자리가 참된 곳이다’라고 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거나

자신이 할 일을 능력에 따라 충분히 수행하면

수행하는 그 인연이 참된 길로 향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에 염불, 간경, 참선, 주력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수행에는 일정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현재 일하고 있는 그 곳과 일 자체가

수행의 장소이고 수행의 대상이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이거나 밝은 마음, 깨어있는 정신으로

그 일의 상황을 마음으로 확연히 알아차리고

일을 처리하거나 참구해 정진하면 반드시 인연이 성숙되면서

목적하는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인연을 따른다는 수연(隨緣)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어떤 마음과 행위로 미래를 열어 가느냐?

함에 따라 바로 그 곳에서 성공의 기쁨을 누릴 수도 있고,

또는 실패의 고통을 만날 수 있다.

 

명예와 소임이 문제가 아니라 맡은 바 소임의 자리에서

얼마만큼 성실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임을 수행하되 목적에 너무 치우쳐 집작하면

과도한 탐욕이 되어 오히려 일이 잘 못 진행될 수 있다.

다만 지금 수행하고 있는 이방법이 얼마만큼 타당한가를

자주 돌아보는 참회의 정진이 지속된다면

소기의 목적은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오게 되어있다.

 

반야심경에서의 ‘무소득(無所得)’과

금강경의 ‘무아법(無我法)’이라는 의미도〈나〉라는 아상과

〈내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경책이다.

 

아상과 집착을 버리면 버려지는 것만큼

마음은 지혜롭고 대상에 자유로울 수 있다.

출가·재가의 모든 수행자들이 말하기는 쉬우나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자기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해결하기 어려운

집착의 장벽인데 수없이 많은 생명과 더불어 사는

사회여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