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스크랩] *수행과 깨달음

마음정원(寂光) 2012. 6. 19. 08:49

수행이란?
내가 있는 나(有我;我相)인 중생의 속성인, `번뇌, 망상(無明)'을 내가 없는 나(無我)인 부처의 속성인, `함께하지만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청정심(淸淨心)'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수행이라 합니다.

번뇌, 망상이란?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번뇌, 망상이 아니냐? 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살아 있는 이상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일어난 생각을 나와 관계가 있는 것만을 이익되게 하는 중생심(衆生心;이기심)으로 쓰느냐? 아니면 모두를 이익되게 하는 불심(佛心;이타심)으로 쓰느냐?를 배우는 것이 수행입니다.

따라서 일어난 마음에 나라는 생각(我相)이 들어 가면 번뇌, 망상이고, 我相이 들어 가지 않으면 번뇌, 망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번뇌와 깨달음은 본질(體)에서는 같고 쓰임새(用) 에서만 다를 뿐입니다.(煩惱卽菩提)

수행(參禪)을 함에 있어 가장 조심하여야 할 것은 취(取)하고, 버리는(捨) 것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선(善)을 취하고 악(惡)을 버리고, 중생에서 부처로 가려 하는 것은 모두가 목적의식에 떨어진 중생심 입니다.

道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목적을 세운 것이므로, 자기라는 자아의식의 주관적인 사고에서 생기기 때문에 자기와 목적(道를 얻으려는 생각)의 상대적인 관계가 성립되고, 성취 하고져하는 욕망이 생기므로 분쟁이 일어 나게 되어 영원히 道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선과 악, 중생과 부처와 같이 모든 말을 상대적으로 구별지어 놓았느냐 하면, 깨달음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서 어쩔수 없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방편이고 알음알이 일뿐 그 자체가 깨달음은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깨닫고나면 `모두 버리라'고 한 것이며, 비유적으로는 `강을 건느고 나면 타고온 배는 버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아야 버릴 수있고, 버려야 깨달을 수 있으므로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비우는 것(내생각 을 버리는 것;我相)이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울 대상을 찾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니며, 본래 비워져 있기 때문(空)에 비울 것이 없음을 보는 것(見性)이 깨달음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지 않음을 죽지 않음으로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 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공동체 임을 아는 것입니다(인드라망).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본래 비워져 아무 것도 없다고 하니 이해 하시기 힘들 것입니다.
이 말은 만물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므로(無常)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 입니다.  

이렇게 사라진 것들은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대(四大)로 흩어져 있으므로 우리 눈에 사라지기 전의 본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뿐 입니다.  
보인다고 하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상을 이해하시려면, 아무리 긴시간 이라 할지라도 무한대의 시간에 비교하면 찰나(순간)에 불과 하므로 시간의 개념을 바꾸어 보셔야 합니다.

따라서 공(空)은, 있는 것을 없애고 없음을 보는 것도 아니며, 없음에서 없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있음(有)에서 없음(無)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공(眞空)은 묘유(妙有) 입니다.
수행은 오직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 밖에 어떠한 것도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않됩니다.
마음 마저도 만들면 그 마음에 걸리게 되어 번뇌, 망상이 되고맙니다.

그래서 버려야 된다는 마음이나, 깨달아야 되겠다는 그 마음 마저도 일으키면 도(道)는 점점 멀어 집니다.
오직 본래 구족되어 있는 청정한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도 따로 어디에 있는 마음이 아니라 망념(妄念)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로 청정한 마음 입니다.

깨닫고 나서도 깨달았다는 그 마음 마저도 일으키면 않됩니다.
우리의 눈에 관찰되는 현상보다 관찰 되지않는 마이크로(미세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훨씬 더 많으나, 그냥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므로 지나쳐 버립니다.
다행이 과학의 발달로, 유형(有形)인 생물학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은 확대하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여 깨달음을 얻는 공부는 무형(無形)인 마음으로 체득하는 공부 이므로 어떠한 것으로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먼저 체득한 눈 밝은 선지식(善智識)만이 자기 경험의 느낌으로서 알아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 공부(수행)는 자기만이 느낌으로 밖에 알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자각(自覺)의 공부입니다.    

수행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움도, 조용함도 모두 초월하여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말은 예컨데 도회지에 오래 살던 사람들은 조용한 곳을 좋아하며, 조용한 곳에 오래 살던 사람들은 도회지에 살아 봤으면 합니다.
막상 그렇게 해보면 또 다시 옛 것이 그리워 집니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여기는 이래서 좋고, 저기는 저래서 좋고로 바뀌어서 어디에 있든 만족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은 대상(객관;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주관)에 있는 것입니다.(一切有心)

중생의 속성을 부처의 속성으로 바꾼다는 것은, 마치 내 입에 길들여진 음식을 길들여 지지않은 음식으로 완전하게 바꾸는 것과 같아서 쉬운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발심하여 노력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수행과 깨달음의 관계를 나무에 비유 한다면, 본질(體)에서는 나무의 뿌리와 잎과 가지와 꽃과 열매가 하나 이듯이 같습니다.  
그러나 뿌리없이 가지가 있을 수 없으며, 가지 없이 잎과 꽃과 열매가 있을 수 없고, 꽃없이 열매가 있을 수 없듯이, 수행 없는 깨달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수행은 뿌리와 가지와 잎과 꽃이며, 깨달음은 그 열매 입니다.
튼튼한 수행을 하여야 큰 깨침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 이라는 열매는, 처음부터 먹기 좋게 잘 익어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얻었다(見性)고 해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 열매는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더욱 분발하여 보다 더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어 모든 것들에게 베풀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자비와 보시)
수행은 철저하게 자업자득 이므로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또한 누구도 깨닫게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자신이 닦아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전생(前生;과거)의 수행은 금생(今生;현재)으로 이어지며, 금생의 수행은 내생(來生;미래)으로 이어 지는데,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하면 금생에 수행의 힘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며, 이것을 `수행의 근기(根氣)가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근기는 모두 다릅니다.  

깨달음(眞理;眞如;法;道)은 수행을 통해서 느낌으로 체득(體得)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언어, 문자로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不立文字;言語道斷;開口卽錯)
이것을 자전거 타는 방법을 배우는 것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떠한 언어 문자로써 설명하여도 그 사람이 금방 자전거를 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넘어지고, 다치고, 여러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탈 수 있을 것이며, 일단 타는 방법을 한번만 익혀 놓으면 평생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만약에 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깨닫게 하는 가르침의 방편)이 탈 줄 아는 것(깨달음)과 똑 같다면, 익히는 과정 없이 즉시 탈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수행의 시작은 `지금'이고, 장소는 `여기'이며, 수행의 대상은 `나의 모든 일'로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道(수행)란? 佛心으로 작용 하는 반야(般若)의 지혜로서 살아가는 삶이 道인 것이지, 道라는 것이 따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심(無心)이 道요, 평상심(平常心)이 道입니다.  
이말은 무심과 평상심(원력)으로 실천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 입니다.  

깨달음이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이 말을 정확하게 설명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방편으로 말씀 드린다면, "있는 그대로"란 우주 법계(法界)에 가득한 모든 것(삼라만상; 대상; 경계; 객관)을 이르는 말이며, 이것을 "보는 것"은 보는 주체(主體;주관)가 있게 됩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은 보는 주체가 있으나 깨달은 사람은 보는 주체가 없이 봅니다.

6근(六根; 眼,눈; 耳,귀; 鼻,코; 舌,혀; 身,몸; 意,뜻), 6식(六識; 色,보고; 聲,듣고; 香,냄새맡고; 味,맛보고; 觸,감각; 法,생각)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모두가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방편 으로서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我相)이 모든 것을 허상(번뇌,망상)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므로 내 생각을 버리는 것(無我; 無住; 無念)이 깨달음 이며, 이것은 모두가 하나 됨이며, 모두가 나 이기 때문에 모든 분별심, 차별심이 다 끊어짐이며, 그렇게도 찾아 다니던 나의 참 모습인 참나(眞我)가 사라져 버립니다.

현실적으로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내가 있음(有我)에서 모두가 하나되어, 내가 없음(無我)을 보게되면, 내가 없기 때문에 본래 생사(生死;生滅)가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不生不滅).

결국 생과 사도 우리의 생각(아상)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 하며, 내가 없으므로 얻을 것도 없으며, 잃을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모두가 나를 이익 되게 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치를 진리(眞理)라 하며, 이것을 모르면 무명(無明;망념;중생)이라 하고, 알면 깨달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중생심인 내 생각이 모든 고통의 원인 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차피 내가 없는데 열심히 일해서 무엇 하느냐?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업자득'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우주만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모두 속에 하나로서의 맡은 바 역활을 최대한 발휘 하여야 다른 모든것들에 해를 끼치지 않게되어 모두가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각자가 나 하나 쯤이야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결국에는 모두가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오히려 창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선(善)이나 악(惡), 둘중에 어느 하나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면, 중생심을 불심으로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불성의 씨앗(如來藏)은 수행을 통하여, 중생을 부처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질때의 그 기쁨을 맛보는 것을 깨달음을 체득 했다고 하며, 이것을 참성품(본래 갖추어 진 성품)을 보았다고 하여, 견성(見性) 이라고도 합니다.
견성은 깨달음의 끝이 아닙니다.
다만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출처 :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글쓴이 : 희작(喜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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