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마음

짐 진자

마음정원(寂光) 2011. 9. 22. 11:44

짐 진자

 

조직이나 회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직원이라 부릅니다. 다른 말로, 조직 또는 회사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직원이라 부릅니다. 미얀마 말로, ‘운-탄’이란 용어는 글자 그대로 짐을 지는 것 또는 짐을 나르는 사람입니다. 영어에서, 그것은 사람, 조직, 회사, 또는 정부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또한 그 말의 노골적인 의미로, 그러한 사람들을 ‘고용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대개, 정부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은 종종 ‘공무원’이라고 여전히 일컬어집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회사 직원, 병원 직원, 판매 직원, 교직원과 같은 서로 다른 범주의 조직체의 직원들을 봅니다. 회사 직원이 회사의 짐을 지고있는 반면, 병원 직원은 병원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판매 직원이 기업의 영업을 하는 짐을 지고 있는 반면, 교직원은 학교(연구소, 대학…….)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모든 직원들은 그들의 매일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시간을 보내야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의무라고 불리는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일과가 끝나면 그들은 그들의 짐을 지는 것으로부터 놓여납니다.;그들은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놓여남은 세상의 모든 직원들이 매일 얻는 일시적 놓여남입니다.우리는 그들이 일시적 자유를 얻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저 개발 국가에서는, 무거운 짐을 사람이 나르는 반면, 물질문명이 개발된 나라에서는 동력이 달린 수송 수단이나,기중기(크레인)가 나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운반인(짐꾼)들이 항구,공항이나 기차역에서 무거운 짐을 여기저기로 옮기는 것을 봅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면, 일꾼들은 뱃짐을 옮기는데 고용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생계를 꾸려가는 방식입니다.

힘센 사람은 짐을 나를 수 있고, 그것을 그의 어깨에서 잠시, 사실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버틸 수 있습니다. 짐이 무거우므로 그는 하루는 말할 것도 없고, 몇 시간도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힘든 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짐을 들어 올린 다음, 짐꾼들은 짐을 지정된 장소에 내려놓기 위해 서두릅니다.

짐을 내려놓음으로써, 그들은 짐을 내려놓는 것에서 오는 해방감을 즐깁니다. 그 의무가 아무리 어렵고 지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또는 아무리 무거운 짐을 날라야할 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가능합니다.

짐이라고 불리는 그 모든 책임을 지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조직의 짐을 지고 있는 모든 직원들은 일과 중 잠시 뿐만 아니라, 일과가 끝나면 짐들을 내려놓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짐으로부터 벗어나거나 어떻게 경감하는지 모른 채 윤회를 하면서, 끝없이 책임을 떠맡고 있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짐이며, 누가 그 짐을 지고 있는지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이 심오한 법문을 여러분에게 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모두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지고 있는(나르고 있는) 그 짐은 무엇인가,

-그러한 짐들을 어떻게 가볍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러한 짐의 일부를 자신에게서 제거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 짐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위해 어떻게 그것들을 내려놓을 것인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출처는 칸다왁가 상윳따입니다. 그 법문의 이름은 “짐”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짐, 짐을 지고 있는 자, 짐을 지는 것(짐을 떠맡는 것),그리고 짐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가르치리라. 그것에 대해 들어보도록 하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짐인가?”붓다께서 질문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집착의 지배를 받는(종속된) 다섯 무더기라고 말해져야한다.” “무엇이 그 다섯인가?” “물질의 무더기, 느낌의 무더기, 지각의 무더기, 의지적 형성의 무더기, 그리고 의식의 무더기이다. 이것이 짐이다.”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 모두는 진정한 짐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다섯 무더기가 ‘짐’이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그것들을 ‘짐’이라고 표를 붙이는 것이 적당할까요? 여러분은 짐을 다섯 무더기라고 부르는 것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다섯 무더기들이 윤회를 하는 동안 기능을 하고 끝없이 우리를 괴롭히는지 알게 될 때, 여러분은 부처님의 말씀과 집착에 종속된 다섯 무더기들을 상징하기위한 그 분의‘짐’이란 말의 사용에 대해서 분명히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p2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음식, 거주지, 의복, 약품이 필요하다.”우리가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것은 정말 우리의 요구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단지 다른 어떤 것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누구의 요구를 우리가 충족시키거나 만족시키고 있습니까?:우리의 요구 입니까?아니면 다른 어떤 것의 요구입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다른 측면에서 좀 더 단순히 물어 보겠습니다.누가 음식이 필요합니까? 누가 거주지가 필요합니까? 누가 의복이 필요합니까? 누가 약품이 필요합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이 모든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우리 일상의 삶의 핵심적인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남자, 여자, 천신, 브라마(범천), 동물, 아귀 그리고 지옥의 존재는 없습니다. 집착의 지배를 받는(집착에 종속된) 다섯 무더기만 있습니다. 이 다섯 무더기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다시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 하겠습니다. : “물질 무더기, 느낌 무더기, 지각 무더기, 의도적 형성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이것들이 짐이다.”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는 음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거주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의복이 필요하다. 우리는 약품이 필요하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우리가 충족시키고자 애쓰는 것이 정말 우리의 필요일까요? 또는 단지 어떤 다른 것의 필요(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들 대부분은 전 생애를 계속 바쁘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살아갑니까? 우리는 음식, 거주지, 의복, 약품을 구하고자, 늘 바쁘게 살아갑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얻기 위해 애쓰느라 바쁩니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다른 것의 요구를 만족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몇 가지하겠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대답을 듣기를 기대해 봅니다.만일 우리에게 몸이 없다면, 음식이 필요합니까? 몸이 없다면, 의복이 필요합니까? 몸이 없다면, 거주지가 필요합니까? 몸이 없다면, 약품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바로 이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들 중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몸이 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진정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이 몸을 가졌으므로, 우리는 그것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단지 노예, 몸의 노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몸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입니다.

간단히 말하면,우리는 지금 물질 무더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물질 무더기는 물질의 무리 또는 조합입니다.

이 물질 무더기가 매일 우리에게 무거운 요구를 합니다; 먹을 음식, 살 장소, 입을 옷 그리고 건강을 유지할 약을 요구하면서. 물질 무더기는 말합니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여다오. 나는 그것을 열망한다. 나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물질 무더기는 말합니다. “나에게 아름다운 옷을 다오. 나는 그것들을 입는 것을 좋아해. 내가 아름다운 외투를 입으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져 보일까” “나에게 대 저택을 지어주거나 사다오. 내가 거기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물질 무더기는 또한 말합니다. “나에게 좋은 약을 다오. 나는 건강하고 활동적이고 튼튼하길 원해. 나는 오래 살고 싶다. 내 피부에 품질 좋은 노화방지 크림을 발라다오. 나는 젊고 건강해 보이고 싶다.”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것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 이것들을 공급하기위해 애쓰며 바쁩니다.

사실은, 그것들은 오직 물질 무더기들의 필요(요구)입니다. “무지로 인해 세상은 눈 먼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좋은 눈을 가졌습니다. 하지만,그들의 육안(신체적인 눈)으로 그들은 인습적인 진리만 볼 뿐,궁극적 진리는 못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로 눈이 먼다 라고 말해질 수 있습니다:궁극적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먼 것입니다.

관습적으로는 남자, 여자, 천신, 브라마(범천)가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직 궁극적 정신과 물질만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오직 다섯 무더기만 있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온 세상은,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아주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있다.”

그것들은 매우 작은 아 원자 입자(소립자)입니다. 그것들은 항상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오직 집중된 마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붓다께서 “비구들이여 집중력을 계발하여라. 집중된 비구는 사물(진리, 법)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들이 집중력을 계발했을 때 무엇을 알고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은 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원인),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 즉, 사성제를 알고 볼 것입니다.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볼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눈 먼 사람입니다. 그것이 붓다께서 “무지로 인해 세상은 눈먼다.”라고 말씀 하신 이유입니다.

무지는 우리에게서 진리를 가립니다. 무지가 무엇입니까? 단지 이것저것을 모르는 것이 무지가 아닙니다. 무지는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릇된 것을 바른 것으로, 바른 것을 그릇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무지’입니다.

p3 다른 말로, 사성제-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를 모르는 것이 ‘무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말합니다. “나는 아주 행복해”,“나는 아주 슬프다.”또는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행복할 때, 우리의 느낌은 즐겁습니다. 우리가 슬플 때, 우리의 느낌은 불쾌합니다. 우리가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을 때, 우리의 느낌은 중립적입니다.

이 세 가지 종류의 느낌이 있습니다: 즐거운, 불쾌한, 중립적인 느낌. 그것들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느낌의 무더기(외다낙칸다)가 그것들을 느낍니다.

느낌의 무더기는 대상의 감정적인 특징(맛)을 경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느낌이 없는 순간은 없습니다. 즐거운 느낌 또는 불쾌한 느낌이 없다면, 중립적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항상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종종 우리 삶의 주된 목표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대상의 ‘맛’을 느끼는 것은 느낌의 무더기이지,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각의 무더기(산냑칸다)는 그 자신의 임무를 실행합니다: 그것은 대상을 다시 알아볼 수 있도록 대상을 ‘인식하거나’또는 ‘알아보고’ 그것을 ‘표시합니다.’ 지각은 검은, 흰, 나쁜, 아름다운, 추한, 바른 또는 그릇된 등등으로 경험한 사물을 표시합니다. 지각은 ‘기억하는 것’의 원인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을 연결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대상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기억합니다. : 포크, 칼, 숟가락으로 어떻게 먹는지, 수도꼭지를 어떻게 트는지, 어떻게 글씨를 쓰는지, 우리가 거리로 나갔을 때, 어떻게 우리의 길을 찾는지 기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지각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가집니다. 우리가 나쁜 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쾌한 느낌을 가집니다. 그것들은 두 무더기의 기능입니다 : 지각의 무더기 그리고 느낌의 무더기는 함께 작용합니다. 그것들 때문에 우리는 “그가 나에게 욕했다”, “그가 나를 학대했다” “그는 나보다 더 나은 것을 가졌다”, “그는 나의 소유물을 훔쳤다”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매우 슬프고, 화나고, 비참함을 느낍니다. 때때로 우리는 쓰라린 눈물을 흘립니다. 간혹 우리는 복수할 생각을 합니다.

지각이 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좋고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쁜 기억, 좋은 기억 중 어느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나쁜 지각이 우리 삶에서 확실히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고문합니다. 나쁜 기억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더 괴롭습니다.

좋은 기억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가능한 단순한 삶을 선택해야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빠빠사밈 라마띠 마노.”무슨 의미일까요?그 의미는

“선한 행위를 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마음은 늘 불건전한 생각 쪽으로 기운다.”라는 의미입니다.이것은 우리가 왜 많은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그리고 결과적으로,우리는 또한 우리 마음에 악한(유해한) 정신적 인상을 남깁니다.

저는 어떻게 지각이 작용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때 제가 파욱 숲속 수행 도량의 조용하고 외진 곳에서 점심 공양을 하고 있을 때, 한 재가 신자가 방문했습니다. 그날 저는 물을 마시기 위해 어떤 종류의 물 잔을 사용했습니다. 그 재가신자는 그 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그 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오직 그가 나에게 그것에 대해서 말했을 때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반떼(스님),그 잔을 보니, 과거에 제가 비슷한 종류의 잔을 사용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지각이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을 연결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전에 사용했던 비슷한 잔을 봤을 때, 그는 잔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억했습니다.그 재가자는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불선한 행위에 의해 다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것이 붓다께서 지각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지각은 ‘기억하는 것의 원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가 기억한다.”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각을 기억하는 것의 원인으로 이해하면서, 그 지각이나 기억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그 때 우리는 해방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제 방금 말씀 드렸다시피, 우리 모두는 좋고 나쁜 기억 모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는 밤에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인 복수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다투고,가끔 화내면서, 논쟁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뭔가를 잘못했던 사람을 반복해서 기억함으로써, 많은 소중한 우리의 시간과 힘을 낭비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책임조차도 실행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지각이 괴로움이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나쁜 지각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더 괴롭습니다. 이것이 짐입니다 : 진정한 짐입니다.

그것을 다른식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좋은 지각과 기억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삶의 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건강한 삶의 방식으로 살도록 선택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세상은 사실은 매우 복잡하고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삶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의 개선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고 유익한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나라가 발달하면 할수록, 그 나라의 삶은 더 중압적이고,복합적이고 복잡하게 됩니다. 발달한 나라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내포하고 있습니까? 왜 발달한 나라라고 여겨집니까? 다른 이유들 중에서, 한 나라는 다른 종류의 감각적 탐닉을, 풍부하게 쉽게 얻을 수 있을 때, 발달한 나라라고 여겨집니다.

발달한 나라에서는 붙잡고 집착할 아주 많은 감각적 탐닉이 있기 때문에 많은 복잡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우리들이 나쁜 기억들을 많이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더 단순한 장소에 살도록 선택해야합니다: 재가자는 시골 그리고 비구(스님)는 숲속. 비구(스님)에게 숲속은 복잡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산다면, 우리는 정말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들어, 이제 저는 많은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혼자 사는 것과 많은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것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혼자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그것을 이처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단지 하나의 팔찌만 찬다면, 소리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두 개의 또는 더 많은 팔찌를 찬다면, “췽 췽” 소리가 납니다. 그것은 소음입니다. 그것은 장애입니다. 우리가 홀로 사는 것을 좋아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이로움에 대한 진가를 안다면, 홀로 지내는 삶을 선택해야합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식과정을 통하여 궁극적 정신을 보는 사람은 각기 다른 심찰라에서 일어나는 지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각들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지각의 무더기들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것은 무상합니다. 우리가 각 심찰라에서 지각의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지각의 무더기에 의해 초래되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것입니다.

다음 우리는 의식 무더기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의식 무더기(윈냐냑칸다)는 대상을 인식합니다. 그것은 대상을 아는 선도자입니다.

의지적 무더기(상카락칸다)는 우리가 좋고 나쁜 행위를 실행하도록 하는 원인이 됩니다.

쩨따나는 대개 ‘의지 또는 의도’로 번역 됩니다.우리가 도덕적 또는 비도덕적 행위를 실행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쩨따나(의지, 의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 쩨따나는 굉장히 활기찹니다

. 우리는 우리가 선 또는 불선한 행위를 실행할 때, 그것은 사실 그 행위의 동기가 되는 선 또는 불선한 의지 또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그것의 적당한 결과를 생산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꾸살라 깜마(불 선업) 그리고 꾸살라 깜마(선업)는 사실 아꾸살라 쩨따나(불선한 의도, 의지) 그리고 꾸살라 쩨따나(선한 의도, 의지)입니다.

먹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적 감각적 대상을 만지는 것, 좋고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걷는 것, 달리기, 소리 지르는 것, 다투는 것, 죽이는 것, 훔치는 것, 잘못된 성행위를 저지르는 것, 거짓말 하는 것, 마약과 술 먹는 것, 고소하는 것, 불평하는 것, 손가락질하기, 험담하기, 비난하기, 돕기 등등. 은 선 또는 불선한 의지 또는 의도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의지적 무더기들의 행위들입니다. 어떻게 쩨따나(의도)가 행위를 결심하는지, 예로써,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행위를 보도록 합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필요나 또는 노력을 지원하려는 바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하지만 호의나 칭찬을 얻기 위한 바람을 가지고 역시 도움을 제공합니다. 둘 다 도움을 제공하는 행위이지만, 하나는 이타적인 의도에서 나온 반면, 다른 하나는 이기적인 의도에서 나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의지적 무더기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의도에 의지해서 한 사람이 제공한 도움이 선한 것인 반면, 또 다른 한 사람이 제공한 도움은 불선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것은 선하고 불선한 행위를 실행하는 의지적 무더기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그 무더기들이 그들의 개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지 압니다.

물질 무더기는 말합니다: “나를 잘 먹여다오. 내가 먹기 좋아하는 것을 다오; 그렇지 않으면,나는 허약해지거나 병이 날거야. 또는 나는 죽어 버릴 거야!” 그래서 우리는 그것의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물질 무더기를 소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뜨겁거나 차갑게 느낍니다. 그것이 더울 때, 우리는 그것을 시원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차가울 때, 우리는 그것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배가 고프면, 우리는 그것에 음식을 주어야합니다. 그것이 갈증이 날 때, 우리는 그것에 마실 것을 주어야합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나르고 있는) 물질 무더기에 대한 의무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우리가 그것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합니다 : “나는 병이 나거나 허약해질 거야. 또는 심지어 죽을 수도 있어.” 그것의 협박에 두려워,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기쁘게 하기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물질 무더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이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누가 그것을 느낍니까? 느낌이 그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느낌의 기능입니다. 그것은 그것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니는 삭까야 딧티(유신견 또는 자기 동일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릇되게 이해하고 말합니다. “‘내가’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유신견[자기 동일시(성)]로 인해, 물질 무더기와 ‘나’는 분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물질 무더기가 뭔가를 바랄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욕구로 받아들입니다.

똑 같은 일이 느낌의 무더기, 지각의 무더기, 등등에도 일어납니다. 그릇된 견해로 사물을 ‘나는’, ‘나에게’, ‘나의 것’,으로 보면서, 우리는 윤회를 하면서 다섯 무더기의 요구를 끝없이 만족시켰고, 만족시키고 있고, 만족시켜 나갈 것입니다.

다음 느낌 무더기가 말합니다. : “나에게 즐거운 감각을 다시 다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실망하고, 비참해지고, 서운해 할 거야. 또는 나는 죽게 할 수도 있어!”이렇게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느낌 무더기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즐거운 감각을 갈망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감각적 탐닉을 추구하느라 바쁩니다. 사람들의 목적은 대부분 같습니다―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 느낌 무더기의 요구에 복종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감 ,걱정 ,죄책감, 두려움, 자만, 질투, 인색을 느낄 때, 일어나는 느낌은 불쾌한 느낌입니다.

p5 우리는 그것들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평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달갑지 않은 불쾌한 느낌들이 차례로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만족의 가치를 모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뚜띠 빠라맘 다남.”무슨 의미일까요? 만족이 최상의 부 이다. 그것이 사실 입니까? 만족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더 많이 원하면 원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괴롭습니다. 우리가 적게 원하면 원할수록, 우리는 덜 괴롭습니다. 원하는 것이 없다면, 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이 사실의 가치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결과는 탐탁지 않은 느낌입니다.

사람은 항상 뭔가를 줄곧 원합니다. 사람들은 늘 외칩니다 : “나는 이것이 필요하다.” “나는 저것을 원한다.” “나는 그들의 결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온당하지 않다.” “왜 그들이 이것을 했나.” “그들은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 “여기 오지 마라, 나는 너를 보고 싶지 않다.”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형편없는가!” “우리는 낙태할 권리가 있어!” “우리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해” “교육정책이 얼마나 형편없는가!” “즉각적으로 바꿔라.” “우리는 더 많은 보수를 원한다.” “너희 모두는 너무 게으르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의 감정적인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의 무더기가 그것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느낌들을 우리 자신이 느끼고 있다고 잘못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은 느낌의 무더기가 느끼기를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것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준비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느낌 무더기의 지휘 하에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노예로 만듭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나르고 있는) 느낌의 무더기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우리가 그것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그것은 말합니다 : “나는 불행해지거나 우울해질 거야. 또는 나는 죽게 할 수도 있어.” 그것이 두려워서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다음 의식의 무더기(윈냐냑칸다)가 말합니다 : “나는 좋은 맛과 유쾌한 감각을 안다. 나에게 좀 더 다오. 나를 위해 그것들을 찾아다오 ;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거야. 결국 나를 죽게 만들어야!” 그릇된 견해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충족시킨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의 명령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지각의 무더기(산냑칸다) 또한 말합니다 : “나는 물질 무더기와 느낌의 무더기에 의해 경험되어진 그 맛과 즐거운 느낌을 기억한다. 그것들은 아주 좋았어. 나는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지각이 이미 경험한 맛과 느낌을 한층 더 경험하기위해 물질 무더기와 느낌 무더기를 몰아대는 방식입니다.

그들의 요구에 복종하면서, 우리는 반복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다섯 무더기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선하고 악한 것 모두, 많은 것들을 해왔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의지적 형성의 무더기들의 활동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우리는 말합니다 :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 사실은, 우리는 단지 다섯 무더기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단지 노예입니다; 다섯 무더기의 노예입니다.

우리가 이 심오한 진리를 아직 모른다면, 그들의 노예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섯 무더기들의 노예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느낄 것입니다.

우리들 중 어떤 이는 이것을 앎으로써 심지어 충격을 받고, 당황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우리는 또한 우리가 정말 오래고 똑 같고 익숙한 방식으로 다섯 무더기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로써 늘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다섯 무더기가 우리 모두에게 작용을 하고 지휘를 하는지 봅니다. 그들은 함께 그들의 기능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늘 복종하고 있습니다.

유신견(자기 동일시)으로 인해, 다섯 무더기와 ‘나’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면서, 사실 우리는 다섯 무더기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다섯 무더기는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것들은 무거운 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더기들을 일순간도 아닌: 잠시도 아니고, 한 시간,하루, 일 년,일 생, 한 세상,또는 심지어 일 겁 이상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시작이 없고, 무한한 윤회의 시작이래로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왔습니다(날아왔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것을 하면서 우리의 삶을 보내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이 언제 끝날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다섯 무더기는 진실로 무거운 짐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우리가 그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가 지고(나르고)있고, 계속 지고(나르고) 가야할 무거운 짐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이 짐인지 아십니다.

다음 붓다께서 질문하십니다 : “누가 그 짐을 지고 있는(나르는)자 인가?” “그것은, 그 사람, 그러한 성씨와 이름의 존경하는 분, 이것이 짐을 지고 있는(나르는)자입니다. 라고 말해져야합니다.” 누가 그 짐을 지고 있는(나르는)자입니까?

p6 ‘우리’가 그 짐을 지고 있는(나르는)자입니다. ‘여러분’이 그 짐을 지고(나르고)있는 자입니다. 죤씨가 짐을 지고(나르고)있는 자입니다. 메리 양이 짐을 지고(나르고)있는 자입니다.

초기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도처에서 회사 직원, 판매 직원 그리고 병원 직원을 봅니다. 비록 그들이 그들의 조직을 위해 일하고 있는 동안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일과 중에 그들의 짐을 내려놓을 얼마간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들은 그들의 짐에서 놓여날 기회를 가집니다. 그들이 이행하고 있는 짐이 아무리 힘들고 지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무거운 짐을 그들이 지고(나르고) 있다 하더라도, 비록 오직 잠시일지라도, 그것들로부터 놓여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들은 짐이라 불리는 그들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약간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다섯 무더기라 불리는 ‘조직’의 필요한 것을 위해 일하며 봉사하는 직원은, 잠시라도 그 짐을 내려놓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것은 현재 생뿐만 아니라 윤회를 하는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삶을 통하여, 항상 그렇게 해 왔고, 항상 그렇게 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짐을 지게됩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목표에 달려있습니다. 삶의 목표로 인도하는 목표와 행로(길)가 있습니다. 누가 그 목표를 설정하고 그 길을 놓는지 조사해 봅시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섯 무더기들이 목표를 설정하고 그 길(행로)을 냅니다(만듭니다).어느 무더기가 목표를 설정하고 어느 무더기가 그 길을 냅니까(만듭니까)?

-물질 무더기가 말하면서 그것의 목표를 설정합니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 나는 멋지고 아름다운 옷이 필요하다. 좋은 숙박 시설에서 살게 해다오. 나를 돌봐 다오. 나는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원해.”

-느낌의 무더기 또한 말하면서 목표를 설정합니다. “나는 여섯 감각의 문을 통하여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싶다; 그것들을 나에게 충족시켜다오.”

-지각의 무더기 또한 말하면서 그것의 목표를 설정합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것을 다시 원한다. 나는 그 남자/그 여자가 아주 그립다. 그 남자/그 여자를 다시 보게 해 다오. 그들은 나를 모욕했다. 그들이 나에게 욕했다. 그들이 나를 학대했다. 그들이 나의 소유물을 훔쳤다.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용서할 수 없다. 어느 날 나는 복수를 할 것이다.”물질과 느낌의 무더기가 경험한 것을 기억함으로써 지각의 무더기가 그것의 목표를 설정합니다.

-의식의 무더기 또한 그러한 것들을 앎으로써 목표를 설정합니다. “나는 좋은 맛과 즐거운 감각을 안다. 나에게 더 다오. 나를 위해 그것들을 찾아다오; 그렇지 않으면,나는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거야. 결국 나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어!” 목표를 향한 길(행로)을 내는 것은 오직 의지적 무더기입니다.

탐욕/탐욕 없음, 성냄/성냄 없음, 무지/지혜, 자만/겸손, 질투/너그러움, 인색/아낌없이 줌, 또는 의심/확신과 함께 그 길은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다섯 무더기들이 말하는 것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우리는 순종적인 직원입니다. 우리는 결코, 감히 불복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삶에서 ‘목표와 길(행로)’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그것은 길(행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 길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목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른 길 또는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적고 대개 부주의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대해 압도당해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올 바른 목표에 도달하기위해 올 바른 길(행로)을 걸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아마 우리의 여생동안 죄의식과 후회로 가득한,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돈, 소유물 그리고 신체적 안락함을 정신적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수락(용인),칭찬, 명성, 부와 같은 세속적 이득을 위해 우리의 삶의 가치를 떨어뜨릴 것입니다.

우리는 유물론자가 됩니다. 명성과 부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목표에 이르게 하는 데 올 바른 길이 사용되어 지는지 또는 그릇된 길이 사용되어 지는지 관계없이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그것들(명성과 부)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화가 나서 뭔가를 한다면, 우리는 화를 목표로 이르게 하는 길로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 질투, 인색 또는 자만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번뇌를 우리의 목표로 인도하는 길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부적당한 길(행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로바(아낌없이 배품), 아도사(자애) 또는 아모하(지혜)와 함께 행동한다면, 우리는 올 바른 길, 적절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증 하기위해, 길(행로)이 아닌 그의 목표에 대해 마음을 많이 쓴 한 이기적인 사람을 보도록 합시다.

그는 라자가하시의 웰루와나 사원(죽림정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쭌다, 돼지를 길러서 고기를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돼지를 사육하고 죽여서,생계를 꾸렸습니다.그는 공정한 거래를 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주고 돼지 새끼를 사들였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몹시 궁핍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의 조건에 동의해야 할 때, 거래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마치 마을 사람들이 곤궁할 때 도우는 연민심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사의를 표하도록 기대되어 졌습니다.

p7 사람들은 아마 그를 영리한 상인으로 표현할지 몰라도, 사실 그는 교활하고 불공정했습니다. 그가 그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선택한 길은 부적당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더 나아가서,그는 새끼 돼지들을 그의 뒷마당에서 잘 먹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친절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보다 많은 이익을 위한 욕구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더 큰 돼지를 원했습니다. 돼지들이 완전히 자랐을 때, 그는 그 고기를 팔기위해 돼지들을 도살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의 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들어 갔습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여러분은 돼지에 대한 그의 잔인함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돼지들을 도살한 방식은 극단적으로 잔인했고, 전적으로 무자비했습니다! 돼지를 죽이기 위해, 그는 돼지를 단단한 기둥에 묶고 더 ,그 살을 부풀게 하기 위해서 사각 방망이로 전신을 두들겨 팼습니다. 더 포동포동하고 연해진 살을 보면서. 돼지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서 꿀꿀거리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쭌다는 정말로, 매우, 매우 잔인했습니다!

우리 삶에서 본질적인 부분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1)만족감(뭔가 잘 되어갈 때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

(2)위험(뭔가 잘못되어갈 때 일어나는 불쾌한 느낌)

(3)위험에서 벗어나기입니다.

또한 두 종류의 개인이 있습니다:

(1)자기 중심적인 사람(이기적인 관점을 가지면서),

(2)사심이 없는 사람(이타적인 관점을 가지면서).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주로 그들의 개인적 욕망이나 이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반면에, 이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본위적인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만족을 추구하기위해 나서고, 위험을 맞이하고 위험에서 벗어남을 찾는 방식은 이기적이지 않는 사람의 방식과 다릅니다.

삶의 문제를 극복하기위해 처리하는 방식 또한 서로 다릅니다.

저는 이제 이타적인 사람이 어떻게 만족을 추구하기위해 나서고, 위험을 맞이하고, 위험으로부터 탈출구를 찾는지, 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합니다.

한 때 오래전, 삡팔리 까싸빠라는 이름의 한 젊은 남자가 그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자 받다 까삘라니와 혼인을 했습니다. 그 젊고 부유한 부부는 여러 해 동안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삡팔리의 부모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그들은 가족의 재산을 돌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그들은 대 가족의 사유지와 농장의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어느 날, 삡팔리가 그의 농장중 하나를 점검하고 있을 때, 그는 마치 새로운 눈을 가진 사람처럼, 과거에 보아왔던 것을 보았습니다.

과거에, 관용구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가졌지만 볼 수 없었다.”그는 그의 일꾼들이 밭을 갈고 있을 때, 많은 새들이 밭고랑에서 열심히 벌레를 쪼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광경은 농부들에게 아주 흔한 일인데, 그를 정말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 광경은 그에게 부(재산),들에서 나오는 생산물들을 가져오는 것이, 많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괴로움 그리고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강력히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의 생계는 그 흙에 살고 있는 많은 벌레들과 작은 생명체들의 죽음을 담보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숙고하고, 그는 일꾼중 한명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그러한 행위에 뒤따르는 결과를 받아야하는가?”- “나으리 자신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업의 응당한 과보에 대한 통찰에 의해 고뇌에 빠진 그는 숙고했습니다. “만일 내가 그 모든 살생의 짐을 져야한다면, 그 모든 부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모든 것을 받다에게 넘겨주고 금욕 수행자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더 나으리라.”

그 사이,거의 같은 시간 집에서, 그의 아내도 유사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녀, 역시, 전에 아주 자주 보아왔던 것을 더 깊은 이해로 새로운 생각으로 다시 보았습니다.

그들은 밭에서 거둬들인 참깨 씨들을 햇볕에 말리기 위해 야외에 널어놓았습니다. 까마귀와 다른 새들이 그 참깨 씨에 매료된 벌레들을 먹고 있었습니다. 받다가 그녀의 하인에게, 누가 그렇게 많은 생명체들의 난폭한 죽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하는지 물었을 때, 그 업의 책임은 그녀의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내가 그러한 죽음을 일으키는 짐을 져야한다면, 나는 천 생의 삶에서 조차 윤회의 바다위로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하리라. 삡팔 리가 돌아오는 대로, 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넘겨주고 금욕 수행자의 삶을 살기위해 떠나리라.”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하자, 자신들의 마음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연노랑 옷과 시장 상점에서 구입한 흙 발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음 그들은 서로 삭발을 해 주었고,방랑하는 금욕 수행자가 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선언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라한인 분께, 우리의 출가를 바칩니다.”

p8 그들의 발우를 어깨에 걸머지고,그들의 집안 하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들은 그 대저택을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유지에 속하는 마을에 도달 했을 때, 일꾼들과 가족들이 그들을 보았습니다. 부부의 출가를 듣자마자, 그들은 두 수행자의 발아래 엎드려서,한탄하고,울부짖고,외쳤습니다. “오, 소중하고, 성스러운 분이시여! 왜 당신은 우리를 의지할 때 없는 고아로 만들려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욕계(깜마로까,욕계천상,인간계,축생,아수라,아귀계,지옥),색계(루빠로까, 눈, 귀의 기능만 있는 천상계),무색계(아루빠로까, 물질은 없고 정신만 있는 존재)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집 없는 삶으로 출가를 하는 것이다.”농노(노예)였던 사람들에게, 삡팔리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와 받다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는 마을 사람들을 남겨놓고 그들의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기적이지 않은 두 사람이 만족을 추구하고, 위험에 직면하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을 구하는 현명하고 이타적인 방식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이기적인 사람, 쭌다가 어떻게 만족을 추구하고, 위험에 직면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을 구했는지에 대해 숙고하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돌아가 봅시다. 쭌다는 매우 비열하고, 욕심 많고 그리고 이기적인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자신과 그의 욕망과 이득에만 마음을 썼습니다. 그가 직면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기위해 시도한 그의 방식은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돼지의 크고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기에, 그는 강제로 돼지의 턱을 벌리고 나무 막대기를 입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다음 그는 끓는 물을 돼지 목으로 부었습니다. 뜨거운 물은 변을 통하게 하면서, 동물의 내장을 통하여 흘려 내렸습니다. 그 뜨거운 변은 그 잔인한 과정 내내 죽어가는 돼지에게 몹시 괴로운 고통을 일으키면서, 결국 항문을 통해 나왔습니다. 돼지의 배 안에 소량의 변이라도 남아 있는 한, 더럽고 탁한 물이 나왔습니다. 돼지의 배가 깨끗해지자마자, 깨끗한 물이 나왔습니다. 쭌다는 이렇게 깨끗한 물이 나올 때 까지 뜨거운 물 붓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또한 돼지 피부를 벗겨내기 위해 돼지의 등에다가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길고 날카로운 칼로 돼지의 목을 자르고, 그의 소비로 뿐만 아니라 내다 팔기위해 그 짐승의 시체를 잘랐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오십오 년간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는 단 하나의 공덕행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붓다께서 근처 승원에 거주하고 계셨지만, 쭌다는 그 분께 한 송이 꽃이나, 한 술의 밥이라도 공양하는 것으로써, 경의를 결코 표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쭌다가 다섯 무더기에 의해 정해진,

생존을 위한 일반적인 부(재산)를 목표로 그 길을 어떻게, 정말 어리석게 선택했는지 압니다.

여러분은 그가 돼지 사육사와 판매상으로서, 전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정함으로, 어떻게 만족을 구했는지 들었습니다. 오직 최대 이익의 관점에서 그는 마을 사람들을 속였고, 돼지들을 잔인하게 도살했습니다. 뒤이어 일어나는 위험과 죽어가는 돼지가 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과, 꿀꿀거림으로부터 느낀 고뇌에 대항하기위해, 그는 그 자신만의 탈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돼지에게 재갈을 물렸습니다. 그는 오직 그 자신만을 돌봤지 돼지의 괴로움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쭌다에게 병이 엄습했고, 아직 살아있는데도, 잔인한 쭌다앞에 대 지옥의 불길이 솟아올랐습니다. 엄청난 고통으로, 그는 돼지 같이 꿀꿀거리고 비명지르기 시작했고, 손과 무릎으로 집 앞에서 시작해서 집 뒤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집안사람들이 제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렸습니다. 사람의 과거 행위가 결과를 맺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므로, 그는 칠일동안 내내, 계속적으로 앞뒤로 기어 다녔습니다. 그는 그가 돼지를 도살했던 식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죽기 전에조차도, 그는 마치 그가 지옥에 있는 것처럼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칠 일째 되던날, 돼지고기 판매상 쭌다는 죽어서 대 지옥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행로)은 올 바르지 않았고 사악한 것이었으며, 그를 곧장 대 지옥으로 몰고 갔습니다. 목표로 향한 길이 그릇되면, 그 목표에 올 바르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쭌다의 목표는 부와 돼지고기를 포함한 호화스러운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매일 돼지를 죽임으로써, 그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선택한 그의 길은 그에게 모든 것을 잃게 했습니다. 그의 의지적 무더기에 의해 선택된 그의 길은 탐욕에 의해 지배되었고, 성냄에 의해 연료가 채워졌으며, 그를 곧장 대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다섯 무더기의 짐을 진자, 쭌다는 그의 짐을 더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삡팔리 까쌉빠,받다 까삐라니 그리고 쭌다 이야기에서, 저는 이기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만족을 구하기 위해 나서고, 위험에 직면하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을 구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분명하게 예증했다고 여깁니다.

삶에서 문제를 극복하기위해 노력한 방식 또한 다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오직 그들 자신에게 마음을 쓴 반면,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필요한 것과 바람 또한 충분히 고려합니다.

p9 부를 목표로 정하고 자선, 아낌없이 베품, 자애를 실행하고, 오계를 잘 준수하면서, 이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바람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올 바른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 걸어가기에 좋은 길입니다.

그것은 행복하게 목표로 데려다 줍니다. 그렇지만, 부 또는단지 살아남기 위한 목표를 선택하고 나서, 그기에 도달하기위해 가장 부적당한 길을 선택한다면, 쭌다처럼 마침내 엄청나게 괴로운 곳에서 끝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짐을 진자(나르는 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자 합니다.

한 때,라자가하 시 외곽의 한 외호(해자, 도시 성곽주위의 연못) 근처에서 귀신 넷이 큰 소리로,괴롭게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통곡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 정당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양쪽으로 돈을 벌었다.

우리가 축적한 모든 부는 지금 다른 사람에 의해 쓰이고 있다. 우리는 지금 부당한 생계를 영위했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왜 그들이 아귀계에 다시 태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시에서 네 명의 여인이 쌀, 기름, 버터, 꿀, 기타 식료품 장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무게 단위와 계량법을 이용해서 불공정한 방법을 썼습니다. 그들이 죽자, 그들은 라자가하시 외곽의 한 외호(해자, 성곽주위의 연못) 근처에서 아귀로 재생했습니다.

다섯 무더기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자, 그들은 그릇된 길을 선택했고, 그것은 그들을 아귀계로 몰아넣었습니다. 다섯 무더기들의 지시에 복종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어 고통당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다섯 무더기들의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의 남편들은 새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 여기 청중 중에서 누군가 앞으로 유사한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가능성이 있고 대단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전 남편들은 그들의 전 아내들이 벌고 저축해놓은 것을 행복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그 넷은 그들의 과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깊은 후회를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현재 운명에 대해 슬픔에 잠겨 큰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있었을 때, 그들은 엄청난 부와 물질적 풍요를 아주 많이 즐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성취 하기위해서 그릇되게 계속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무게 단위와 계량법을 이용해서 장사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섯 무더기의 요구 하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길(행로)을 선택하고 나서, 그 네 여자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많이 축적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무거운 아귀의 다섯 무더기들의 짐들을 져야(날라야) 했습니다. 우리는 동물로, 지옥의 존재로, 아귀로 다시 태어아길 원치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런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섯 무더기들에 대한 노예적 행위에 뒤 따라오는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걷기로 결정한 그 길에 따라오는 결과에 대해서 완전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우리에 대한 다섯 무더기의 영향과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이 다섯 무더기들은 진실로 짐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노예입니다.

유신견(자기 동일시,{물질, 정신등을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견해})으로 인해, 우리는 늘 그것들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우리는 윤회를 해오면서 지금까지 이 유신견에 끊임없이 현혹 되어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착각(망상)의 거물에 말려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이 유신견을 제거하지 않는 한 이 다섯 무더기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성인(아리야)이 되기 전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점차로 제거할 수 있는 바른 앎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바른 앎에서 바른 생각이 나옵니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행위가 나옵니다. 우리가 바른 앎을 수행하고 얻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배를 잘 저어서, 즐거운 항구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차례로 다가오는 삶에서 높은 도덕적 표준(계를 잘 준수하는)의 사람이 될 것이며, 어느 날 우리는 저편 기슭, 닙바나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짐을 지고 있는 방식에 유의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극단적으로 우리의 짐을 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가망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능숙한 방식으로 짐을 지는지 알 때, 더 나은 현재와 미래의 삶의 방식을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짐이긴 하지만 더 가벼운 짐을 들어 올려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능숙한 방식으로 어떻게 우리의 짐을 지는지 모른다면, 우리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더 나은 삶의 방식을 형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층 더 나쁘게, 우리는 새롭고 더 무거운 짐을 집어 올리게 될 것입니다.

다음 저는 까싸빠 부처님 시절, 세속적인 명성, 이득, 성공의 목표를 어리석게 선택한 비구, 사미, 사미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한 때,마하 목갈라나 존자께서 락카나 존자와 함께 독수리 봉(깃자꾸따 언덕)에서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그 분께서 어느 장소에 도착하자 미소를 지었습니다. 락카나 존자께서 여쭈었습니다. “존자시여, 왜 미소를 지으시는지요?”마하 목갈라나 존자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질문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 면전에 있을 때 그 질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p10 그 분들이 제따와나 사원(기원정사)으로 돌아갔을 때, 락카나 존자는 부처님 면전에서 똑 같은 질문을 그 분께 했습니다. 마하 목갈라나 존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독수리 봉에서 내려오고 있을 때, 나는 비구, 사미, 사미니들이 공중을 통과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가사는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우도 불타고 있었고 그들의 허리띠 역시 화염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동안 내내 그들은 고통스러워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미소 지었습니다.”

그 때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나 역시 바로 그 귀신들을 보았느니라. 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것에 대해 말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랫동안 그들에게 손실을 가져오고, 괴로움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의 제자들과 재가 신도들에 대한 연민심으로, 붓다께서는 그 광경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 모두, 여러분이 실제로 알고 어떤 것이 사실인 것을 보았을 때,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해야할 때, 말하지 말아야할 때, 말할 장소, 말하지 않아야 할 장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설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올 바른 때나 장소가 아니라면, 우리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다음 붓다께서는 계속하십니다. “이제 나는 목격자 목가라나 존자가 있으니, 그 귀신들에 대해 이야기 하리라.그 비구, 사미, 사미니들은 까싸빠 부처님 재세시 사악한 존재였느니라. 그들은 까싸빠 부처님 시절 덕 있는(계를 잘 준수하는) 삶을 살지 않은,비구, 사미, 사미니였다. 그들은 다섯 무더기들의 요구에 복종하면서, 이득, 명예, 명성을 추구하려고 나섰다. 그들은 다섯 무더기들의 노예였다. 그들은 삶에서 세속적인 성공을 그들의 목표로 정했다. 그들은 세속적인 이득을 위해서 그들의 성스러운 삶을 상실했다. 부도덕한 행위와 형편없는 행동으로, 그들은 신심 있는 재가 신도들이 보시한 선물들을 즐겼고 덕이 있는(계행이 높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신심 있는 재가 신도들이 보시한 탁발 공양, 음식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었고 덕이 있는(계행이 높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그릇된 행위로 인해, 그들은 몸이 부서지고 죽은 후 아귀계에 다시 태어났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재가자들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성공 또는 해탈입니까? 분명히 그것은 성공이지 해탈은 아니겠지요. 그러면, 비구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합니까? 그것은 해탈이 되어야합니다. 성공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비구가 이득, 명예, 명성으로, 그릇된 목적으로 인도하는 목표를 선택하고 출가를 했다면, 그들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노정(길) 또한 잘못되어갑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이득, 명예, 명성은 두려운 것이다. 소똥을 먹는 곤충, 쇠똥구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쇠똥으로 속이 채워져있고, 쇠똥으로 가득하고 그것의 앞에는, 또 커다란 똥 무더기가 있다. 이 쇠똥구리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그 쇠똥구리는 아마 다른 쇠똥구리들을 멸시할 것이다: “나는 소똥을 먹는 자다. 소똥으로 가득 채워져있고, 소똥으로 가득하고, 내 앞에는 큰 소똥 무더기가 있다.”

그래서, 역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이득, 명예, 명성에 압도당하고 사로잡혀서,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탁발하기위해 마을이나 도시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원하는 만큼 먹는다. 그는 또한 다음날 공양청을 받았다. 그의 탁발 음식은 풍부하다. 그가 승원으로 돌아가서는 무리들 앞에서 자랑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먹었다. 나는 또 내일 공양청을 받았다. 나의 탁발 음식은 풍부하다. 나는 가사, 탁발 음식, 숙소 그리고 의약품을 받은 사람이다. 다른 비구들은 공덕과 영향이 거의 없다. 그들은 내가 얻은 만큼 가사, 탁발 음식, 숙소 그리고 의약품을 얻지 못한다.”

이렇게 그의 마음이 이득, 명예, 명성에 압도당하고 사로 잡혔기 때문에, 그는 행동이 바르고 점잖은 다른 비구들을 멸시한다. 그것은 이 지각없는 사람을 오랫동안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끌 것이다.

그래서 이득, 명예, 명성은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그대는 자신을 훈련시켜야한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말씀을 하십니다.“한 비구가 있다. 나는 나 자신의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안다. 이 존자는 은가루로 가득 채워진 금 발우를 위해서조차도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얼마후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면서, 그의 마음이 이득, 명예, 명성에 압도당하고 사로잡힌 그를 나는 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이득, 명예, 명성은 두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는 그대 자신을 연마해야 한다.” 요즈음, 많은 불교국가에서, 많은 비구들이 성공을 의미하는 이득, 명예, 명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위해 나섭니다.

그래서 비구로써 그들은 그릇된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올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길, 역시, 잘못되어 갑니다. 그것은 이 지각없는 비구를 오래, 오랫동안 심한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선택한다면, 다가오는 부처님 재세시에 그것은 마하 목갈라나 존자께서 독수리 봉에서 내려올 때 보았던, 고통 받는 존재들과 정확히 똑 같은 목적지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p11 여러분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화염에 휩싸인 가사를 입고, 불타고 있는 발우를 잡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소리지르며, 공중을 날아가고 있는 비구, 사미, 사미니의 귀신을 본다.”

그릇된 목표를 선택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랍니다. 그것은 분명히 오랜 기간 심한 해로움과 괴로움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다섯 무더기들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지 않도록 주의 깊으시길 바랍니다.

다섯 무더기들의 요구에 복종하면서 이득, 명예, 명성을 추구하기위해 나선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합니다. 이 이야기는 부처님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불교도들에게 그의 악평으로 잘 알려진 비구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데와닷따 존자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한 것이나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본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습니다. 그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의 에고(자아)로 인해 아주 강했습니다.

이득, 명예, 명성을 얻는 것은 그의 에고(자아)에 힘을 실어 주었고 그를 대 지옥에서 심한 괴로움과 손상(해)을 입도록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거기서 엄청나게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목적지에서 고통받아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어느 길을 따르고 있는지 진실로 주의 깊게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길을 갈 것입니까? 쭌다가 선택한 길? 또는 라자가하 시에서 부정한 무게단위와 계량법으로 쌀, 기름, 버터, 꿀 등을 거래한 네 여자가 선택한 길입니까? 또는 까싸빠 부처님 재세시 사악한 존재였던, 비구, 사미, 사미니들이 선택한 길입니까? 또는 데와닷따의 자기본위적인 성향의 길입니까? 아주 주의 깊게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붓다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짐이 무엇인지,짐을 지는 자가 누구인지 선언하고 나서, 나는 무엇이 짐을 떠맡는 것인지 가르치리라.” “존재를 다시 생기도록 이끄는 것은 이 갈애이다. 또는 여기저기서 기쁨을 추구하면서, 기쁨과 강한 욕망을 수반하는 그 짐을 떠맡는 것은 이 갈애이다.”붓다께서 말씀하신 이 갈애는 무엇입니까? 갈애가 어떻게 존재를 다시 생기도록 하는지 조사하기 전에, 비록 우리가 바른 길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올 바르게 나서야 하는지 아주 간략히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연기 수행(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 원인[과거, 현재]와 결과[현재, 미래]를 식별하는 것)의 목적은 업의 법칙,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 없다면, 우리는 필수적인 항해술의 도움 없이 삶의 배를 저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키(배 뒷부분에 있는 방향조절 장치) 없는 배와 같습니다. 올 바른 방향으로 젓고 조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배에 키를 부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키는 업의 법칙에 대한 앎입니다.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윤회하는 도중 심한 고생 없이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이 삶의 항해술의 도움, 이업의 법칙에 대해서 앎으로써, 우리는 저 기슭, 가장 즐거운 항구, 닙바나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지로 인해 세상은 눈먼다: 진리를 모르므로, 사람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그것은 마치 밤에 깜깜한 숲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가시를 밟지 않기 위해서, 바위와 그루터기에 발을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필요합니다.

어두운 여정에서 우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안내하는 불이 밝혀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과거 존재를 식별하는 것을 통하여 업의 법칙을 깨닫는 것은 어두운 세상에 타오르는 횃불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우리의 삶의 배를 안전한 곳으로 항해 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지금쯤 여러분은 짐과 짐을 진자(나르는 자) 모두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짐을 떠맡는 갈애가, 새로운 존재로 이르게 하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알아봅시다. 그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저는 미얀마 파욱 수행 도량에서 빠띳짜사무빠다, 연기수행(과거식별 수행)을 한, 한 수행자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 수행자가 그의 과거 생을 식별하는 과정에 있었을 때, 그의 과거생 중의 한 삶에서 그는 아주 가난에 시달리는 한 마을의 소녀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 날 그녀는 파고다(탑)에 마실 물과 야생화를 공양했습니다. 그 때 그녀는 “이 공양으로 내가 부자인 남자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원을 세웠습니다.

p12 부처님에 따르면, 죽음 근접 순간(임종직전)에 나타나는 마지막 대상은 다음 새로운 존재의 원인이 됩니다. 그 대상이 선한 것이면 그것은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대상이 불선한 것이면, 그것은 나쁜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운 좋게도 그녀에게는 죽음 근처(임종 직전)에 다시 나타난 선업의 대상은 파고다(탑)에 보시를 하고 소원을 비는 광경이었습니다.

그 결과로써 그녀는 아주 부자가 된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부자 남자로서의 삶을 갈망했기에 그녀는 새 짐을 떠맡았습니다 : 인간으로서의 짐, 부자인 남자로서의 짐이었습니다.

그것이 붓다께서, “짐, 새로운 다섯 조(세트)의 무더기들을 떠맡는 원인을 일으키는 것은 이 갈애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는 자주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면서 부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삶을 편안하게 아주 만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그는 영원히 살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때, 그는 그의 자녀들이 유산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매우 속이 상했고 화(도사)난 채 죽었습니다. 저는 여기 청중 중에서 유사한 ‘운명’으로 괴로워할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도 별로 틀리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부모님은 그들의 아들딸을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보물로 여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불확실합니다. 자녀들 역시 사람이고 사람은 무지와 갈애로 인해 어리석게 행동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유한 남자의 자녀에게서 봅니다. 그, 그들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려고 할 때, 유산 문제로 그의 자녀들이 다투고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아주 속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의 사려 깊지 못한 잘못된 행위는 그에게 큰 충격 이었고 실망 이었습니다. 그는 화난 채 죽었습니다. 그 뒤 따르는 결과로 그는 더 무거운 동물의 다섯 가지 무더기의 짐을 져야 했습니다.

그는 뱀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뱀의 짐을 지게 된 가장 가까운 원인은 그의 자녀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음 근접 순간(임종직전)에 자녀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죽는다면, 우리 또한 4 악도(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중에서 하나에 떨어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죽습니다 : 어떤 사람은 어려서, 어떤 이는 나이 들어서, 어떤 사람은 암으로, 어떤 사람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그리고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죽습니다.

어떤 식으로 우리가 죽든, 우리의 죽음 근접 순간(임종직전)의 대상이 우리의 다음 새 존재를 결정합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대부분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질투 그리고 인색의 ‘집’에서 삽니다. 이것들은 정말 우리에게 나쁜 ‘집’입니다. 우리가 가정이라 부르는 물리적인 집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이 사는 진정한 집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질투 그리고 인색의 ‘거주지’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번뇌는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것들은 일생을 통하여 우리를 괴롭힙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있습니다. 그것들은 정말 우리들의 진정한 집이 됩니다. 법구경 주석서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 주의 깊지 않은 자들에게는, 사악도가 그들의 영원한 집과 같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단지 손님으로 있는 장소에서는 대개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같은 식으로, 인간과 천상의 세계는 오직, 일시적으로만 방문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선업이 무르익을 때에만 그기에 머뭅니다. 조만간, 우리의 번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집인 4 악도 중의 어딘가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부유한 사람이 그의 진정한 집, 동물계(축생계)로 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금방 들었습니다! 그리고 뱀으로써 그녀는 숲에서 살았습니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먹잇감은 토끼였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대부분의 삶을 먹이를 구하기 위해 토끼 사냥을 했습니다. 토끼 고기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해서, 그것은 뱀으로서 그녀가 죽으려 고할 때, 그녀의 마음에 토끼 영상이 떠오르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뒤 따르는 결과로서, 그녀는 다음 생에 토끼로 태어났습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튀긴 닭 좋아하십니까? 닭 수프 좋아하십니까? 그리고 닭 허벅지 좋아하십니까? 저는 여러분 대부분 좋아한다고 여겨집니다. 단순히 닭고기를 애착하는 것만으로 닭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할 까요? 예,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쇠고기를 좋아한다면, 여러분은 소로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야채에 대한 애착과 고기에 대한 애착 중 어느 쪽이 대개 더 강합니까? 고기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지로 인해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존재 자체를 위해 존재를 갈망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이 브라마 계(범천)든, 천상이든, 인간계든, 심지어 4 악도이든 상관 하지 않습니다. 존재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아주 강해서 비참한 세상 중 하나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깁니다.

p13 그 수행자의 과거 삶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합시다. 이제 토끼로 다시 태어나서, 그녀 또한 숲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사냥꾼에게 잡혔고 사냥꾼은 토끼를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그는 토끼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토끼를 집에 가두고 잘 먹였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대단히 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냥꾼의 딸이 매일 집에서 낭송하는 헌신적인 독경 소리를 들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토끼는 집에 사는 것이 전반적으로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독경 소리 듣는 것에 기쁨을 느꼈습니다.

숲속에 사는 동물이 숲속에 사는 것을 동경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의에 빠지고 우울해진 토끼는 병이 들어 매우 야위어갔습니다. 결국 그녀는 죽었습니다. 마침 그녀가 죽으려 고할 때,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인도인 용모를 한 남자가 그 집을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지로 인해 그녀는 즉시 그 사람에게 애착하게 되었습니다. 운 좋게도, 죽음 근접(임종직전) 순간에 나타난 대상은 그녀가 독경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일어났던 즐거운 느낌이었습니다. 죽음 근접순간에, 우리가 애착의 대상인 우리의 아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천상계 또는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음 근접 순간의 대상이 반드시 선한 대상이어야 합니다. 비록 그녀가 인도인 용모의 그 남자에게 애착을 가졌지만, 죽음 근접 순간의 대상은 그녀가 독경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일어났던 즐거운 느낌이었습니다. 그 선한 느낌이 그녀를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인도인 용모와 안색을 한 남자로. 주석서에 따르면, 범부(성인의 흐름에 이르지 못한 자)가 죽어가는 것은 익사하는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할 때, 그는 그를 구해 줄 어떤 사람 또는 뭔가를 희망합니다. 그 때 그는 옆에 떠다니는 어떤 것이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칠 것입니다. 그는 그것이 시체라 할지라도 태연자약함 또는 거절할 만한 힘이 없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는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소중한 삶을 위해서 끈덕지게 매달릴 것입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그의 삶을 구하는 것입니다.

같은 식으로, 죽어가는 범부가 죽음 근접 순간에 불선한 대상이나 선한 대상 둘 중 하나를 본다면, 그는 그것을 단단히 거머쥘 것입니다. 그는 그것이 불선한 대상일지라도 태연자약함과 거절할 힘이 없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것을 확고히 거머쥘 것입니다. 그의 목표는 존재를 향한 갈망으로 인해 낡은 것을 남겨두고 떠나 새 삶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이 갈애가 다시 새로워진 존재에 연료를 공급하는지 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갈애의 노예가 됩니다.

붓다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이 갈애는 여기저기서 기쁨을 추구한다.”어떻게 이 갈애가 여기저기서 기쁨을 추구하는가? 질문 몇 가지 더 하겠습니다.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는 자신의 삶을 즐깁니까, 즐기지 않습니까? 분명히 즐기지요. 원숭이는 어떻습니까? 확실히, 그들도 역시, 즐기지요. 누구도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삶을 즐기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해를 더 돕기 위해, 저는 어떻게 이 갈애가 이곳저곳의 삶에서 기쁨을 얻는지 설명 하고자 합니다.

오래, 오래전, 아싸까왕은 까시국 빠따리뿟따의 통치자였습니다. 그의 왕비 우빠리는 그에게 아주 소중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매력적이고, 우아하고,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그녀를 엄청나게 좋아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왕비는 아직 어린데 죽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으로 왕은 비탄에 잠겼고 우울해졌습니다. 왕이나 왕비의 서거는 미얀마 말로 그 또는 그녀가 “천상으로 가신다.”라고 전통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고인이 된 우빠리는 천상에 가는데 실패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괴로움은 더 할 것입니다. 그러니 왕비의 죽음은 왕에게 매우 슬픈 사건이였습니다.

왕의 감정은 아주 강력해서, 그는 왕비의 시체를 방부처리하게 한 다음, 유리관에 넣어 그의 침대 밑에 두었습니다. 그는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계속 울고 통곡했습니다. 그는 왕의 의무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법칙과 무상함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부모님과 신하들이 위로 했지만,그는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 애통해했고 고인이된 사랑했던 왕비의 방부 처리된 시체를 계속해서 빤히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때,우리의 보디삿따께서는 신통력을 갖춘 은둔 수행자였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기슭 근처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법을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의 비참함으로부터 그가 해방시켜줄 사람을 찾기 위해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습니다. 천안(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그는 왕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봤습니다. 세상에서 은둔자인 그를 제외한 누구도, 왕을 그의 비애(우울함)로부터 끌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왕을 방문했습니다.

왕실 정원에서 그는 한 브라민 수행원을 만났습니다. 그는 브라민 수행원에게 왕의 상태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왕이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고 듣자, 왕이 그에게로 오면, 그가 왕에게 고인인 된, 왕비가 있는 장소를 보여주겠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 브라민은 서둘러 궁궐로 가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폐하, 왕실 정원에 신통을 갖춘 한 강력한 은둔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고인이 된 왕비의 현 존재를 알려줄 수 있고,왕비가 어디 있는지 보여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p14 왕은 우빠리를 본다는 생각에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는 즉시 마차로 왕실 정원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도착한 대로 그는 은둔자에게 합당한 예를 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물었습니다. “당신께서 고인이 된 저의 왕비가 어디 있는지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예”, 은둔자, 보디삿따는 말했습니다. “이 인간 세상에 있을 때, 그대의 왕비는 그녀의 삶을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하며 보내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에 굉장히 자만 했었습니다. 그녀는 자선행위와 계를 준수하는 공덕 행을 실천하는 것을 도외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죽자 그녀는 이 정원의 하찮은 쇠똥구리로 태어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자만하고 인사를 해야 할 분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일어나야할 분에게 일어나지 않고; 자리를 내어드려야할 분에게 자리를 내어주지않고; 길을 비켜드려야할 분에게 길을 비켜드리지않고; 영광을 베풀어야할 분에게 영광을 베풀지않고; 존경해야할 분을 존경하지않고; 숭배해야할 분을 숭배하지않고; 경의를 표해야할 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몸이 부서지고 죽고나면, 나쁜 목적지, 지옥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몸이 부서지고 죽은 후, 나쁜 목적지, 지옥에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마, 인간으로 다시 올 것이다.

그 사람이 어디에 태어나든지 그 사람은 천하게 태어날 것이다. 이것이 ,천한 태생으로 이르게 하는 길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완고하고 거만한 태도로 살아갈 때, 그것이 천한 태생으로 이끌 것입니다. 누구에게 영광을 베풀어야하고,존경해야하고,숭배해야하고 그리고 경의를 표해야 합니까? 그 분들은 연장자와 선배들 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으신 부처님, 빳쩨까 부처님(벽지불) 그리고 성스러운 제자분들입니다.

재가자들에게는 아버지, 어머니, 금욕 수행자, 브라민 그리고 문중 어른을 포함한 연장자와 선배들 입니다. 왕이 고인이된 우빠리 왕비가 쇠똥구리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소이다!”저는 이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좋은 목적지에 태어났다는 것을 듣기를 원하지 나쁜 목적지에 태어났다는 것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디삿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그녀를 보여주고 말하도록 시키겠소.” “그녀가 말하도록 해 주십시오.”왕이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보디삿따께서 명령했습니다. “바쁘게 쇠똥을 굴리고 있는 둘은 왕 앞으로 나오도록 하라!” 그들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보디삿따는 왕에게 가리켰습니다.“오, 왕이시여, 이 쇠똥구리가 고인이된 그대의 왕비 우빠리입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 쇠똥구리를 따라 방금 쇠똥 덩어리에서 나왔습니다.한번 보시오.” “무어라고요! 나의 왕비 우빠리가 쇠똥구리라고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왕은 울부짖었습니다. 왕은 아직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업과 업의 결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태생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그녀의 다음 존재에서 쇠똥구리가 될 만큼 낮은 곳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상당히 널리 퍼진 요즘에도, 한번 인간이면, 인간계 보다 더 열등한 존재계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교법 밖에서는, 오늘날 그러한 유사한 견해를 지니고 있는, 그러한 반대자들이 더욱 더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입류자(소따빠나,성인의 흐름에 든 분,)의 경지를 증득하지 않은 한, 수승한 존재계에서 4 악도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존재가 신들의 왕이든 아니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 후 재생의 상태는 그 존재가 죽음의 문에 어떻게 알아차림을 하는가, 또는 죽음 근접 순간에 나타난 마지막 대상이 무엇인가에 달렸습니다.

죽어갈 때, 마음이 선함으로 향하면, 인간이나 천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죽어갈 때 마음이 불선함으로 기울면, 또는 죽음 근접 순간에 나타난 대상이 불선하면, 4 악도 중에 하나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죽어갈 때, 자신의 마음을 선함으로 기울이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죽어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의 수행에서 들숨 날숨이라는 유익한 행위에 자신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쉽습니까? 지금 우리가 건강하고, 튼튼하고 알아차림이 있음에도, 우리들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수행대상에 기울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어갈 때, 우리는 힘이없고, 우리는 심각하게 아프고 알아차림도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선함으로 기울이겠습니까? 이것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손톱에 소량의 흙을 올려놓으시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의 손톱에 올려놓은 흙과 대지의 흙 중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비구들이 대답을 했습니다. “부처님, 세존께서 손톱에 올려놓으신 소량의 흙은 대단히 적은 양입니다. 대지의 흙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붓다께서는 계속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같은 식으로, 인간이 죽으면, 인간이나, 천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는 극소수이다. 많은 사람들이 몸이 부서지고 죽은 후 4 악도로 떨어질 것이다”인간은 감각적 즐거움을 즐깁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감각을 탐닉하는 것에 행복이 있다. 거기에 행복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감각을 탐닉하는 것에 행복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각적 탐닉을 즐깁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감각적 쾌락을 즐기더라도, 아무리 오래 그것을 즐기더라도; 그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면, 우리는 부주의해 집니다. 감각적 탐닉에는 본래부터 타고난 잘못과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 근접 순간 역시 즐길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죽음 근접 순간을 즐길 수 있을까요? 준비 없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훈련하도록 일정을 잡고 유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선한 대상에 기울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도 매일 세수하고 이빨 닦는 것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습관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하루에 한번 명상 수행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계속적인 마음의 훈련과 이 습관의 확립을 통하여, 우리가 죽어갈 때, 우리는 마음을 선함으로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인간이나 또는 천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갈 때 우리의 마음이 불선함으로 기울게 되면, 우리는 4 악도중의 한 곳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왕은 이 법에 대해서 결코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 은둔자가 그에게 말한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보디삿따는 암 쇠똥구리가 그녀 자신에 대해서 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신통을 행사해야 했습니다. 다음 대화가 벌어져서 왕과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듣고 이해했습니다:

“오 왕이여, 그녀에게 말을 시켜보도록 하겠소!” 보디삿따께서 말했습니다.“그렇게 해주십시오!” 왕이 간절히 응답했습니다. 보디삿따께서는 그녀에게 말하는 능력을 주었습니다.“우빠리!”그가 불렀습니다.“무슨 일입니까,성스러운 분이시여?” 그녀는 인간의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전생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보디삿따께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우빠리, 아싸까왕의 첫 째 왕비였습니다.”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누구를 사랑하는가 :아싸까 왕인가 아니면 그대의 현 남편 쇠똥구리인가?” “저의 전생에서 인간으로써 저는 전 남편인 왕과 함께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면서 바로 이 정원에서 살았습니다. 다시 태어남으로 인해 나의 기억은 손상을 입었고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이제 쇠똥구리의 세계에서 새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싸까왕과는 지금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그녀는 덧 붙여서 말했습니다. “가능하다면, 나는 지금 당장 아싸까 왕을 죽여서 그의 목에서 나오는 피를 나의 남편, 쇠똥구리의 발에 발라주고 싶습니다!”그녀는 이것을 왕의 수행원들 가운데서 말했습니다. 다음 그녀는 이 싯구를 인간의 목소리로 읊었습니다:

“한 때 사랑하고 사랑받던, 나의 소중한 남편, 아싸까 대왕과 함께 여기 이 정원을 걸어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슬픔과 기쁨이 옛것을 달아나게 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쇠똥구리가 아싸까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아싸까왕이 이것을 듣자, 그는 즉시 강한 수치심, 죄책감, 회의를 느꼈습니다. 당장, 그는 왕비의 시체를 그의 침대 아래에서 치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 뒤, 왕은 보디삿따께 예를 표하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곧 그는 다른 왕비를 맞이했고 그 나라를 충실하게 행복하게 통치를 했습니다. 왕은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우리 모두,역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망하는 이 목 마름에 스스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갈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왕은 우빠리 왕비의 기억에 매달렸습니다. 그녀가 사망하여, 그의 통제에서 빠져나가자, 침착성을 잃고 당황했습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애착 또는 갈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조금이라도 어떤 희망이 있을 때, 사람들은 애착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함께 오래 살려고 희망했던 꿈이 죽음이나 다른 형태의 이별로 인해 사라지면, 사람들은 조만간 혼자 살면서, 또는 어떤 다른 사람과 같이 살면서 스스로를 맟춰나갑니다.

이제 우리는 왕이 완전히 그를 저버린 고인이 된 그의 왕비에 대해, 보디삿따께서 뜻밖의 사실을 밝히자 어떻게 그의 삶을 조절했는지 봅니다. 왕은 그녀 대신 새 왕비를 맞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역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진정한 사랑은 없고, 오직 자신의 애착만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제가 방금, “왕은 스스로를 속였다. 우리 모두 역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 우리는 갈망하는 이 목마름에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죽음의 마음 후 어떠한 간격(틈)도 없이 즉시 임신이 됩니다. 브라마 계, 천상계, 인간계 또는 4 악도중 한 곳 어딘가에서 무슨 존재로든지 즉시 임신이 됩니다.

천신은 인간과 달리, 어머니 자궁 안에서 아홉 달 또는 열 달 동안 임신 기간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천상에 나타나는 순간, 그들은 성인의 몸을 완전히 갖춰서 태어납니다. 죽음의 마음 후 이미, 어딘가에서 재생이 즉시 일어나는 순간,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한탄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합니다. 이것을 잘 알아차리십시오! 돌아가신 분은 우리를 잊어버렸고, 어딘가에서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면서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바로 지금 보았습니다. 우빠리가 왕비였을 때, 그녀는 왕비의 삶을 즐겼습니다. 그녀가 암 쇠똥구리로 태어났을 때, 그녀는 그 삶 역시 즐겼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돼지, 개, 소, 쇠똥구리, 원숭이, 물고기 또는 어떤 것으로든 태어난다면, 그는 그 특정한 삶 역시 즐길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십니까? 그러므로 이미 죽어서 다른 어떤 장소에 즉시 다시 태어난 사람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한탄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새로운 삶에서 행복해 합니다.

그것이 붓다께서, “이 갈애가 여기저기서 기쁨을 구한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것은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이 갈애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거주지, 그리고 새로운 동반자에게 즉시 그 자신을 맞춥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제 이 갈애가 어떻게 여기저기서 기쁨을 추구하는지 봅니다.

이제 이 법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짐, 짐진 자(나르는 자),짐을 지는 것(짐을 싣는 것, 올리는 것) 그리고 짐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가르치리라. 그것을 들어보도록 하라…….”

저는 짐, 짐을 나르는 자(짐진 자) 그리고 짐을 지는 것(싣는 것)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이제 저는 ‘짐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내려놓는지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똑 같은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 갈애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 그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 부른다.”

우리가 어떻게 갈애를 소멸 시킬 수 있을까요? 갈애를 소멸 시키는 것은 괴로움을 종식 시키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우리가 어떻게 괴로움을 끝낼 수 있을까요?

붓다께서 통찰하신 법은 굉장히 심오합니다. 이 심오한 법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체계적, 단계적 수행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법을 통찰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체계적인 접근이 깨달음으로 가는 확실한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붓다께서 모든 것을 당신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분 역시 체계적으로 단계별로 수행을 하셔야 했습니다. 깨달음 이후 그리고 45년 동안,그분께서는 광범위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다른 장소에서 정규적으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분의 법문 중에서 “뾰쪽한 집”이라는 제목의 경전을 인용하겠습니다.

“한 때,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누군가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길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나는 괴로움을 완전히 끝내리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나서,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나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나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길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나면, ‘나는 괴로움을 완전히 끝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비구들이여, 마치, 누군가가, 뾰쪽한 집의 아래층을 짓고-나는 뾰쪽한 집의 위층을 지으리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같은 식으로, 누군가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 나는 괴로움을 완전히 끝낼 수 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붓다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한다.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한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한다.”

우리 모두는 사성제를 반드시 통찰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진리. 사성제를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을 완전히 끝낸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괴로움을 끝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사성제를 반드시 알고 보아야합니다. 사성제를 알고 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자격을 갖춘 스승의 지도 아래 수행을 체계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성제를 통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지 모릅니다. “누가 자격을 갖춘 스승입니까?” 붓다께서 자격을 갖춘 스승입니다. 우리는 단지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을 지도합니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집착의 다섯 무더기 또는 다섯 집착하는 무더기입니다. 다른 말로, 궁극적 정신과 물질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짐”과 “뾰쪽한 집”이 두 법문을 결부시키면 용법의 차이를 볼 수 있지만,의미는 같습니다. 법문 “짐”에서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짐인가?” 그것은 “다섯 집착의 무더기”라고 말해져야합니다.

법문 “뾰쪽한 집”에서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집착의 다섯 무더기 또는 다섯 집착하는 무더기이다.” 다른 말로, 궁극적 정신과 물질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이렇게 짐을 알고 보기위해, 다섯 집착의 무덕 또는 궁극적 정신과 물질, 첫 번째 사성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보아야만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남자, 여자, 천신, 브라마(범천)는 없습니다. 궁극적 정신과 물질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나는 남자. 나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남자 그리고 여자가 없습니까? 인습적인 의미에서는 물론, 남자, 여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통찰 해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다섯 집착의 무더기를 알고 보아야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 정신과 물질을 반드시 통찰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 어떻게 우리가 궁극적 정신과 물질을 알고 볼 수 있을까요? 붓다께서는 수행자들에게 집중력을 계발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마하왁가 상윳따 니까야에서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집중력을 계발하여라. 집중력을 갖춘 비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그가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알고 봅니까? 그는 있는 그것을 그대로 알고 본다: ‘이것이 괴로움이다.’그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이다.’그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그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다.’첫 번째, 두 번째,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보기위해서 우리는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를 양성하고 수행해야만 합니다. 팔정도는 세 가지 훈련(연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계를 준수하는 훈련(실라),집중력 연마(사마디),통찰의 연마(지혜)

계(실라):바른 말,바른 행위, 바른 생계.

선정(사마디):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

지혜(빤야):바른 견해, 바른 사유.

우리는 신체적 언어적 행위의 청정을 양성하고자 계를 준수하는 훈련을 합니다. 집중력(사마디)의 연마를 통하여 우리는 마음의 청정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통찰지(빤야) 연마에 착수 합니다.

집중력을 계발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사마타 명상 수행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붓다께서 가르치신 사마타 수행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지 아십니까? 40 가지입니다.40 가지 중 30 가지는 본 삼매에 이를 수 있는 반면, 나머지 10 가지는 근접 삼매에만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삼매의 종류와 관련하여 두 개의 다른, 본 삼매와 근접 삼매를 양성하기위하여,40 가지의 서로 다른 사마타 수행 주제를 가르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바른 삼매는 부처님의 팔정도에 나타나는 길 중의 하나입니다. ‘바른 삼매’가 무엇입니까? 위숫디막가, “청정도론”에서 ‘바른 삼매’는 근접 삼매와 8 가지 증득(자나, 즉, 본 삼매)입니다.

바른 삼매는 아주 중요합니다. 바른 삼매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집중 훈련에 착수할 때, 우리는 근접 삼매나 본 삼매를 증득할 수 있는 40 가지 수행 대상중 하나를 가지고 수행해야만 합니다. 파욱 숲속 수행도량에서, 우리는 초심자들에게 대개 ‘들숨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아나빠나사띠) 수행을 지도합니다.

그들의 집중력이 계발되면, 그들은 아주 심오하고 강력한 본 삼매를 증득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새로운 수행자들은 들숨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서 집중력을 계발할 수 없습니다. 대안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사대요소 수행을 가르칩니다. 사대요소 수행으로 ,수행자들은 근접삼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 실체를 꿰뚫기 위해 근접 삼매나 본 삼매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근접 삼매나 본 삼매 없이 우리는 궁극적 정신과 물질을 볼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우리가 첫 번째 사성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통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통찰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파욱 수행 도량에는 궁극적 물질과 정신을 이미 꿰뚫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궁극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기위해 집중력 계발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합니다. 이 수행자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파욱 수행 도량에는 또한 아직까지 궁극적 정신과 물질을 통찰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표로 향하여 성실히 수행을 계속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이 온 세상은 아주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들에게 이 입자들을 직접적으로 알고 보게 하기 위해서, 붓다께서는 ‘4대 요소’ 명상을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이 사대요소 입니까? 그것들은 땅, 물, 불, 바람, 입니다. 모든 생명체 그리고 무생명체의 현상은 이 사대요소로 되어있습니다.

수행자들이 그들의 몸을 머리부터 발 까지 반복해서 이 사대요소를 분명히 실별할 수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몸을 사대요소의 덩어리로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자아’에 대한 지각이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그들의 집중력이 향상됨에 따라, 몸은 점점, 회색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더욱 더 밝아집니다. 다음 몸은 빛 덩어리로 변합니다.

수행자가 빛 덩어리를 사대요소로 식별하는 것을 계속하면, 그것은 마침내 매우 작은 입자로 부서집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입자들을 보는 것은 아주 심오한 경험입니다. 하지만 그 수행자는 여전히 인습적인 물질의 가장 미세한 개념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 궁극적 물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입자에는 최소한 여덟 물질의 양상이 있습니다. 이 여덟 양상들은 근본 물질인 땅, 물, 불, 바람뿐만 아니라 근본 물질에서 파생된 색깔, 냄새, 맛, 영양소들입니다p19 수행자가 오직 각 입자 안에서 물질의 여덟 가지 서로 다른 양상을 하나씩 식별할 수 있을 때, 그들은 진실로 궁극적 물질을 알고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안으로 ,그들 자신의 몸에서 궁극적 실체를 직접적으로 알고 볼 수 있을 때까지 사대요소를 식별하고 나서 ,그들은 밖으로(외부 존재, 사물) 사대요소 식별하는 것으로 계속 나아갑니다. 건물 같은 무정물에 사대요소를 식별할 수 있는 순간, 그들은 단지 작은 입자만 봅니다. 그들이 나무 또는 공간에 사대요소를 식별했을 때, 그들은 마찬가지로 작은 입자만 봅니다. 모든 것이 같아집니다.

이 시점에서, 남자, 여자, 나무 그리고 모든 다른 인습적인 형상들은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작은 입자들의 무리로 되고, 보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앎의 달성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남자나 여자가 없다는 것을 아는 앎입니다. 단지 궁극적 물질만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그들의 눈을 다시 뜨면, 그들이 무엇을 봅니까? 그들은 다시 한 번 남자 여자를 보고, 그들을 봄으로써 괴로워합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괴로워할까요? 그것은 그들의 번뇌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남자 그리고 여자를 보고 싶지 않다면, 눈을 다시 뜨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눈을 늘 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애착, 갈애, 집착이 일어나고 여러분은 새로운 업을 지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부터 앞으로 늘 눈을 감고 있을 것입니까?(웃음).

그 수행자의 다음 단계는 정신의 서로 다른 양상을 궁극적 정신의 수준 까지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수행에 성공적일 때, 그들은 각 심찰라에 현존하는 의식 그리고 모든 마음 부수들과 함께 심찰 라의 연속으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직접적으로 알고 봅니다.

그 때 수행자들은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묘사했던 것과 똑 같은 식으로 사물을 봅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는 진실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궁극적 정신과 물질만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첫 번째 사성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또는 “짐”을 통찰합니다. 일단 수행자들이 궁극적 정신과 물질을 알고 보면, 그들은 원인과 결과를 직접적으로 알기위해 “연기(빠띳짜사무빠다,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 수행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전생에 무엇이었는지 아는 것에 호기심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리고 어디로 갈 것입니까?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또한 여러분이 어디로 가려하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는 선업으로 인해서 지금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최소한 이것은 알아야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원인 없이는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현재 생에서, 우리 모두는 선하고 악한 많은 행위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미래에 그것들의 결과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업에 따라서 우리의 여행을 계속합니다.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업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이 법칙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교신자라고 부릅니다. 누가 불교신자 입니까? 불교신자는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범부는 이것에 대해 약간의 또는 다른 의심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이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행자들 모두는 그들의 과거 존재를 식별함으로써 업과 그것의 결과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게 되면, 그들은 두 번째 사성제, 괴로움의 일어남(원인)의 성스러운 진리를 통찰합니다. “짐”의 법문에 따르면,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 또는 원인과 결과를 알고 보는 것은 짐을 지는(떠맡는) 갈애를 알고 보는 것입니다. 연기 수행을 했고 원인과 결과를 직접적으로 식별한 수행자는 통찰 수행(위빠사나)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그들은 궁극적 정신과 물질을 그것들의 원인과 결과와 함께 무상, 괴로움, 무아의 세 가지 특성으로 식별하고 조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통찰지가 성숙되면, 도 지혜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닙바나를 봅니다! 그 때,정신과 물질은 소멸하고 그들은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통찰합니다. 도의 지혜가 일어남으로, 그들의 번뇌는 단계별로 뿌리 뽑힙니다.첫 번째 도의 성취로, 그들은 첫 번째 깨달음의 과를 달성하고 입류자(소따빠나,수다원)가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자마자, 유신견, 의심 그리고 종교적 의식 그리고 의례에 대한 애착의 번뇌가 영원히 뿌리 뽑힙니다. 그렇지만, 다섯 무더기의 조(세트, 무리)는 짐으로 남습니다. 입류자(수다원)들은 여전히 다섯 무더기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짐을 지고(나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유신견, 의심, 종교적 의식, 의례에 대한 애착의 세 번뇌를 근절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4 악도중 어디에도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동물, 아귀, 지옥 존재들로서의 새로운 존재의 짐을 지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인간과 동물의 짐을 비교 할 때, 우리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대개, 인간이 동물보다 더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행위를 어떻게 하는지, 불선한 행위를 어떻게 피하는지, 올 바른 행위를 어떻게 하는지 압니다. 동물들은 그러한 선한 행위를 어떻게 하는지 모릅니다. 향상을 위한 인간의 희망은 실현될 수 있지만,향상을 위한 동물의 희망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그들 자신을 위한 더 밝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계를 준수하는 훈련, 집중력을 연마하는 것, 통찰을 연마하는 그러한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방식을 관리 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동물은 오직 세 가지 것들만 압니다 : 짝짓기, 잠자기 그리고 먹기. 세상에 역시 이 세 가지만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이 세 가지만 안다면, 그들이 동물과 많이 다릅니까? 그들은 사실, 동물 같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더 무거운 새 짐을 져야(날라야)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짐을 내려놓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입류과(수다원 과)를 증득하고, 수행자는 궁극적 정신과 물질의 본성인 무상, 고, 무아의 세 특성을 그것들의 원인과 결과와 함께 관찰함으로써 통찰 명상 수행하는 것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의 통찰지가 성숙되면, 그들은 사까다가미(사다함, 한번만 더 태어나는 이) 도 지혜에 의해 닙바나를 실현합니다.

이 도의 지혜는 강한 욕망, 성냄, 무지의 강도를 약화 시킵니다.계속되는 깊은 관찰과 통찰지의 성숙으로 그들은 다시 아나가미(아나함, 돌아오지 않는 이) 도의 지혜에 의해 닙바나를 실현합니다. 이 지혜는 성냄과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다음, 그들은 아라한의 도 지혜에 의해 닙바나를 실현합니다. 아라한의 도 지혜는 자만, 무지, 들뜸, 해태 그리고 혼침과 같은 남아있는 번뇌들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이와 같이 아라한은 번뇌를 남김없이 모두 제거합니다. 그들은 갈애로부터 완전히 해방됩니다. 해방과 함께 심오한 만족이 옵니다. 해방은 갈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해’그리고 ‘저것을 원해’라고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해야 할 일을 끝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내려 놓아야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그는 어떤 새로운 짐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짐을 내려놓는 것을 성공적으로 이행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해방의 필요조건인 실라(계),사마디(집중, 선정),빤야(지혜)를 수행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그들의 짐들을 내려놓는 것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닙바나(열반)의 저 기슭에 도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바라밀의 달성을 누리고 “내려 놓아야할 것을 내려놓았다.”라고 선언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붓다께서 “짐”의 법문 끝에 읊으신 게송을 낭송하면서, 여기서 마치도록 합시다.

바라 하외 빤짝칸다,바라하로 짜 뿍가로;

바라다나 두카 로까,바라닉케빠나 수카.

다섯 무더기는 진실로 짐이다.

그리고 짐을 지는 자(나르는 자)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짐을 지는 것은 스트레스(긴장,압박)이다.

짐을 던져 버리는 것이 축복이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