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사적자료

忠景公_{誠 源}_事蹟

마음정원(寂光) 2011. 9. 17. 19:33

忠景公_{誠 源}_事蹟公諱誠源字太初號琅玕舍人士根子 世宗甲子進士文科丁卯重試選入集賢殿湖堂名重一世時宋史不到本國一日集賢殿諸員論宋朝人物曰作宋史則王安石當在何傳諸員曰合在奸臣傳公駁之曰安石作新法亂天下誠小人然文章節義大有可稱者原其本心未嘗不在於憂國念民而其誤天下只坐迃濶執拗引用小人不可齒於秦檜蔡京之儔也合在列傳未幾宋史來安石果在列傳故公喜曰昔朱子綱目之未到我國也益齋李先生讀資治通鑑武后紀嘆曰那將周餘分續我唐日月後得綱目果黜武而尊唐益齋頗自負某雖不敏竊比益老當受諸君降幡官至司藝司成知製 敎掌令承文院事受 命撰分門類聚高麗史又撰麗史節要列傳啓請召對前後數十次莫非經國濟民之大義 文宗在位二年昇遐 端宗幼冲誅金宗瑞百官請褒 世祖之功比於周公令集賢殿起草諸學士皆亡去獨公在爲迫脅製進歸家痛哭家人莫知其故及 端宗遜位丙子事覺公自成均館卽趣駕還家與其妻酌酒飮訣上祠堂久不下往視之則不脫冠帶而仰臥拔佩刀擬頸取木片築刀柄救之已無及矣不知所以然俄而吏來取屍去磔之子貴連松連幷死 世宗銳意文治歲庚子置集賢殿選文學之士以備顧問朴彭年河緯地成三問李塏及公皆一時顯隆南有大柳庚午年間有鵲來巢皆白癸酉歲柳盡枯或戱語公曰禍必自柳始後公果敗集賢殿尋罷弔曰厲風初霽衆窮爲塞霜雪皎皎松獨也碧有臣之首愛君而白有頭可截節不可屈他人之粟寜死不食孤竹淸風柴桑明月土中有鬼寃血一掬見南秋江六臣傳 英廟戊寅 贈吏曹判書諡忠景公露梁有六臣塚寜越 莊陵下有六臣祠



공(公)의 휘(諱)는 성원(誠源)이요,자(字)는 태초(太初)며 호(號)는 낭간(琅玕)이니 사인(舍人) 사근(士根)의 자(子)라. 세종(世宗) 갑자(甲子)(일사사사(一四四四))에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文科)하고 정묘(丁卯)(일사사칠(一四四七)) 중시(重試)에 합격(合格)하여 집현전(集賢殿)과 호당(湖堂)에 선입(選入)하므로 명망(名望)이 일세(一世)에 떨치었다. 이 때에 송사(宋史)가 본국(本國)에 오지 않았는데 하루는 집현전(集賢殿) 제원(諸員)이 송조(宋朝)의 인물(人物)을 논(論)하여 말하되 「송사(宋史)를 지음에 왕안석(王安石)이 마땅이 어느 전(傳)에 있어야 될까」 하니 제원(諸員)이 말하되 「간신전(奸臣傳)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하거늘, 공(公)이 반박하여 말하되 「안석(安石)이 신법(新法)을 만들어 천하(天下)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진실로 소인(小人)이나 그러나 문장(文章)과 절의(節義)가 가히 크게 칭(稱)할 것이 있으니 그 본심(本心)을 살펴본다면 일찌기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생각하지 않음이 없는바, 그 천하(天下)를 그릇침은 다만 우활(迃濶)하고 집요(執拗)하여 소인(小人)을 끌었었으나 진(秦) 회(檜)와 채(蔡) 경(京)의 무리로는 비할 것이 아니고 열전(列傳)에 있음이 합당(合當)하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송사(宋史)가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안석(安石)이 과연 열전(列傳)에 있는지라, 공(公)이 기뻐하여 말하되 『예전에 주자강목(朱子綱目)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익재(益齋) 이선생(李先生)(이제현(李齊賢))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무후기(武后紀)를 읽었고 탄식하여 말하되 「어찌 주(周)나라 여분(餘分)을 잡아 당(唐)나라 일월(日月)을 이을까?」라고 하였다. 후에 강목(綱目)을 얻어보니 과연 무(武)를 내치고 당(唐)을 높이었거늘 익재(益齋)가 자못 자부(自負)하였다 했는데 성원(誠源)이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익로(益老)(익재선생(益齋先生))에게 비기니 「마땅히 그대들의 항복의 깃발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관직(官職)은 사예(司藝) 사성(司成) 지제교(知製敎) 장령(掌令) 승문원사(承文院事)를 역임(歷任)하였다. 일찍 국명(國命)을 받아 분문류취(分門類聚)_{삼백륙십오권(三百六十五卷)}_와 고려사(高麗史)를 찬집(撰輯)하고,또 명(命)을 받아 여사절요(麗史節要)와 열전(列傳)을 찬집(撰輯)하였다. 계청(啓請)하고 소대(召對)하기를 수십차(數十次)에 달했는데 경국(經國) 제민(濟民)의 대의(大義)가 아님이 없었다. 문종(文宗)이 재위(在位)한 지 이년(二年)만에 승하(昇遐)하시고 단종(端宗)이 유충(幼冲)하여 세조(世祖)가 계유(癸酉)에 김종서(金宗瑞)를 베이니 백관(百官)이 세조(世祖)의 공(功)을 포양하여 주공(周公)에 비(比)하고 집현전(集賢殿)에 영(令)하여 글을 짓게 할 때 모든 학사(學士)가 다 도망하고 공(公)이 홀로 남았다가 협박을 받아 글을 지어 바치고 집에 돌아와서 통곡(痛哭)을 하니 집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더라. 병자(丙子)에 일이 발각(發覺)되자 공(公)이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급히 집에 돌아와서 그 처(妻)로 더불어 술을 따라 마시고 작별한 후 사당(祠堂)에 나아가 오래도록 나오지 아니하거늘, 가인(家人)이 가서 보니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반듯이 누워 패도(佩刀)로 자결(自決)하였다. 급히 구하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고 까닭을 알지 못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포졸들이 들어와서 시체(屍體)를 취하여 떠난 후 육일(六日)만에 의금부(義禁府)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박팽년(朴彭年)과 같이 차렬(車裂)하여 효수전시(梟首傳屍)하였다. 아들 귀련(貴連)과 송련(松連)도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세종(世宗)이 문학(文學)으로 정치(政治)하는 것을 힘써서 경자년간(庚子年間)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設置)하고, 문학(文學)이 있는 선비를 선발(選抜)하여 고문(顧問)의 바탕을 만드니, 박팽년(朴彭年)과 하위지(河緯地)와 성삼문(成三問)과 이(李) 개(塏)와 공(公)이 모두 당시에 드러난 훌륭한 사람이었다. 뜰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경오년간(庚午年間)에 흰 까치가 와서 깃들더니 계유년(癸酉年)에 버드나무가 다 고사(枯死)하거늘, 어느 사람이 공(公)에게 희롱하여 말하되 「재앙이 반드시 류(柳)로부터 시작(始作)하리라」하더니 후에 공(公)이 과연 패(敗)하고 집현전(集賢殿)이 곧 파(罷)하다. 조사(弔辭)에 이르되 「모진 바람이 처음으로 개이니 여러 궁(窮)한 것이 막혔도다. 상설(霜雪)이 희고 흰대 소나무만 홀로 푸르도다. 신(臣)의 머리가 임금을 사랑하여 희었으니 목은 가히 끊을지언정 절개는 가히 굴하지 아니하리라. 다른 이 녹(祿)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먹지 못하겠도다. 고죽군(孤竹君)의 맑은 바람이요,시상(柴桑)에 밝은 달이로다. 땅속에 귀신이 있으니 원통한 붉은피 한 줌 뿐이로다. _{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 보인다.}_
영조(英祖) 무인(戊寅)(일칠오팔(一七五八))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하고 충경(忠景)이라고 사시(賜諡)하다. 노량(露梁)에 육신총(六臣塚)이 있고, 영월(寜越) 장릉(莊陵) 아래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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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Copyright: 문화류씨대종회, 2008.] (정리:류주환,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