盤谷公 柳績(石盤洞)

반곡 공(盤谷公) 류적(柳績)의 일생

마음정원(寂光) 2011. 9. 15. 12:51

 

 

 

公은 경기도 양주에서 한성판윤 휘경생(京生)과 의정부 영의정 하연(河演)따님 하씨와의 사이에 5남 3녀중 3남으로

大丞公 16대손으로 태어나셨다. 公의 조부는 충경공 의정부 우의정 휘 량(亮)이시며 증조는 밀직사 영의정 문화군

휘 계조(繼祖)이며 고조는 밀직대언 휘 보발(甫發)이시다.

 

公의 백형은 송화현감 찬(纘)이시며 작은 형은 회양부사 혜(蕙)이며 동생은 사정 집(緝)과 사직 진(縝)이다.

公의 혁혁한 공향의 가문에서 태어나 충효가 근본이 되고 문학이 기상이 되어 일찍부터 명성을 떨치셨으며 자품이

온후하고 기우가 총명하여 당대 최고의 사대부인 외조부 의정부 영의정 하연(河演)의 댁에서 기초학문을 배운 후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하며 학문 높은 선비들과 교류하셨다.

公은 연산군초 1494년에 경기도 진위현령(현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으로 부임하여 정령(政令)을 엄정히 하고

명백히 행하여 선정을 베푸니 모든 관리들은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고 고을 백성들은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여

모두 어진 수령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때 동문수학한 종친(宗親) 대승공 17대손이며 형조참판 류순(柳洵)이

파직되고 많은 사대부와 선비들이 화를 당하거나 귀향가는 것을 보시고 장차 더 큰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시고

경상도 안음 석반동(현재 경남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석반부락)으로 낙향하셨다.

낙향 시 많은 진위고을 백성들이 친부모를 보내는 것과 같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公은 관지좌랑(官至佐郞) 재임 시 조선 300여 고을의 자연 인문지리를 담은 여지도서 발간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졌다. 전주대 변주승 교수 등 한국사 전공자 20여명의 연구팀이 여지도서에 대하여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2002년 5월부터 7년동안 작업 끝에 번역을 마쳤는데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 지역향토사 연구를

한단계 끌어 올리고 국문학 등 인접학문과 문화 관광사업 등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였다.

 

배위는 숙인 서원이씨(西原李氏)이며 목사 이길(李佶)의 따님이며 좌의정 이거이(李居易)의 손녀이시다.

슬하에 5형제를 두셨으니 公이 낙향 시 장남 사직 효손(孝孫)은 경남 합천으로, 차남인 사직 효남(孝男)은 전라도

함열로, 3남 효제(孝悌)는 무후하였으며, 4남 호군 순손(順孫)은 공과 함께 함양으로, 5남 정손(正孫)은 진사로서

감찰과 사직을 지냈는데 경남 거창으로 입향하여 후손들이 경남, 전북일대에 살고 있다.

公의 후손들이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려온 화수계로 매년 모임을 가져 친목을 다지고 있다.

 

公은 석반동에 4자(子) 順孫을 데리고 아늑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한 곳에 터를 잡아 살면서 집 좌측에

반송(盤松)을 심고 우측에 있는 높고 큰 바위에 앉아 반곡(盤谷)이라 자호하고 조용히 여생을 즐기며 학문에 열중

하셨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반복되는 사화를 보시고 후손들에게 높은 벼슬에 나가지 못하도록 유언을 하셨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그 후 의정부 영의정 류순(柳洵)이 公의 높은 학문과

능력을 인정하여 수차 높은 관직으로 불렀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영의정 柳洵을 위시한 반정공신들이 나라의 큰

인재를 잃었다고 아까워 하였으며, 맑고 높은 지조는 길이 길이 빛날 것이라고 하였다.

 

公이 석반동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심은 盤松은 公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 청룡과 황룡이 서로 감아있는 십자형상으로

동쪽 줄기는 장남 孝孫과 5남 正孫이 살고있는 경남 합천 거창쪽으로, 서쪽 줄기는 차남 孝男이 살고있는 전북 함열

쪽으로, 북쪽 줄기는 고향인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公이 심어놓은 盤松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최고의 명물이었는데

일제 때 일본인이 일본에서는 그런 반송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왕실의 정원수로 가지고 가려고 수차례 이식을 추진하다

실패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때 송진 체취를 너무 많이 하여 상처를 입고 수명이 다 되어 현재는 안타깝게도 동쪽

반송의 빈둥치만 덩거러이 500여년 세월을 지켜주고 있다.

 

 

 

다행히 盤松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盤松의 씨가 公이 앉아 여생을 보낸 서쪽 큰 바위 정상 좁은 틈사이로 날아

들어가 제2의 盤松이 현재 푸르럼을 더하며 웅장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데 公이 심었던 어미 반송과 똑 같이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로 지정받아 보호해야 된다고 하고 있으며 후손들의 번창을 뜻하는 길송(吉松)이라고도

하고있다.

公께서 석반동 입향시 반송 밑에 판 샘물은 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깨끗한 약수로서 그 수량이 장마 때나

가뭄 때나 변함이 없어 지금도 제사를 모실 때 사용하고 있으며 이 샘물을 떠 놓고 반송 앞에서 기도하면 과거에

급제한다고 하여 서부 경남 일대 선비들이 많이 찾았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公의 사당 반계사/동양재(盤溪祠/東陽齋) 앞에는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시 公의 5대손 류강(柳橿)

황석산성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와 부친(父親) 세홍(世泓)을 지킨 효행비가 있다.

 

 

 

公의 묘소는 석반동 公의 사당 반계사 뒤쪽 선산에 계룡 간좌로 부군과 함께 합부로 모셔있다.

公을 기리는 향사는 매년 음력 3월 14일에 반계사에서 지역 유림과 公의 후손들이 함께 받들고 있으며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이다.

公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하늘이 점지한 자연스럽고 조화를 갖춘 심산유곡 석반동에 터를 잡아 맑은

德과 굳센 지조를 세워놓은 公의 덕업을 우리 후손들이 잘 이어받아 자자손손 길이 빛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2010. 7

작성 : 문화류씨대종회 서울권 부회장 判尹公 會長 柳 瑢 鎭

(수정보완 : 문화류씨 충경공파 33세손 柳 在 昌 / 풍장백세 까페지기)

--------------------------------------------------------------------------------------------------------

 

 

< 참고자료 >

 

1.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김일손·권오복·이목 등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개요

사초(史草)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배경

태종에서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조선 봉건국가 체제는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의 반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의 실시 등 법제가 완성되고, 유학이 일어나면서 유교문화가 융성했다.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세조 이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했는데, 이로부터 정치·경제·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 훈구파사림파 간의 갈등이 깊어갔다. 훈구세력은 예종대와 성종 초년에 걸친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수렴청정기간 동안 남이(南怡), 구성군 준(龜城君浚)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척과 정실 등이 벌족을 이루면서 부패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세종대 이후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던 경제적 상황과 훈구파의 권력장악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한편 길재(吉再)로부터 학문적 연원을 갖는 사림파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점에서 토지겸병 확대현상을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이의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찾고 있었다.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 보급운동과 유향소(留鄕所) 재건운동을 통해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편성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같은 사림세력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꾀하게 되었다. 1498년의 무오사화가 그 시작이었다.

전개과정

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유자광·이극돈·윤필상 등 집권세력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대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편 이극돈의 비행을 문제삼았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하고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등과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목·허반 등을 보름간 스스로 신문하여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하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나무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며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서들이 불살라졌으며,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고 처형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맹·강혼 등은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논죄되었으며, 어세겸·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영향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중앙정계에서 일단 후퇴하게 되었다. 사화로 많은 수의 사림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전횡과 훈구파의 득세로 분위기도 크게 경색되었다.

한편 이 옥사의 주모자 가운데 유자광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서 위세를 떨쳤으며, 이극돈은 잠시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곧 광원군(廣原君)으로 봉해지는 등 훈구파들은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그뒤에도 연산군과 중종의 재위 동안 사림파는 잇단 사화를 겪으면서 훈구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사림은 재지(在地)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조선 성리학의 중심을 이루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도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 조선후기 지리서『여지도서』 완역


巨帙의 『輿地圖書』가 고전국역 전문 국학기관이 아닌 지방의 한 대학 전주대에서 완역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복합요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2002년도부터 시작된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의 기초학문 지원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변주승 전주대 교수팀의 끈기 있는 열의다.

2002년 5월에 학진에서 공모한 ‘기초학문육성 인문사회분야’의 ‘국학고전’부문에 변 교수팀은 ‘여지도서 번역 및 색인’ 과제(연구책임자: 변주승 전주대 언어문화학부 역사문화콘텐츠전공 교수)로 응모해, 다단계 심사를 거쳐 지원 과제로 최종 선정됐다. 연구 기간은 2002년 8월 1일부터 2004년 7월 31일까지 2년이며, 총 연구비는 약 4억 4천만 원이었다. 번역 연구팀은 2003년 9월 1차년도 연구 성과를 심사한 학진으로부터 최우수연구과제로 선정돼, 인센티브를 지원받기도 했다.

2004년 7월에 사업 기간이 종료된 뒤, 연구팀은 결과보고서를 제출해 출판 적격 판정을 받았고, 이후 연구팀은 번역 원고의 교정·교열 작업을 계속해 왔다. 2007년 12월에 학진에서 『여지도서』 출판비용으로 3억 3천만원을 보조해 출판 통로를 열 수 있었다. 이어 2008년 6월 전주대는 공개 입찰을 통해 전주에 있는 디자인흐름 출판사(사장 한명수)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물론 디자인흐름 출판사에서 3억여 원을 대응 투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50권 1000세트, 5만권이라는 물량이 세상의 빛을 쬘 수 있었다.

『여지도서』 번역 연구팀에는 연구책임자 변주승 교수를 중심으로 김우철(한중대), 이철성(건양대), 서종태(전남대), 문용식(순천향대) 등 4명의 공동연구원과, 김진소(천주교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상식(한국고전문화연구원) 등 전임연구원 2명,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 학과와 대학원의 연구보조원 그리고 자문위원 및 평가위원 등 약 20명의 인원이 참여했다.

漢學 전공자가 아닌 까닭에 이들 번역 연구팀은 개별 번역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번역 수준의 질적 제고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매달 어김없이 3박 4일씩 번역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야말로 마라톤에 비견되는 여정이었다. 장소는 전북 완주의 깊은 산 속에 위치한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이었다.

사계의 권위자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호남의 대표적인 한학자인 故 汕巖 변시연 선생과 대전의 아당 이성우 선생, 이향배 충남대 교수(한문학)등으로부터 한시와 기문, 상량문 등 어려운 한문을 자문 받았다. 또한 평생을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헌신했던 호남천주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진소 신부는 이들 연구팀에게 10년 세월 동안 전북 완주군 비월면 천호동에 공간을 마련해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연구팀의 번역 작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번역 본문만 200자 원고지 6만 매에 달하고, 책자로 50권에 이르는 국역 『여지도서』, 과연 완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연구책임을 맡은 변주승 교수의 기대는 남다르다. 그는 “조선시대 연구자나 향토사 연구자들이 지리지로 참조하는 사료는 『新增東國輿地勝覽』(1968, 민추 번역본)인데, 이는 조선 전기 중종 때 편찬됐다. 반면 『여지도서』는 조선후기에 편찬돼 200년 전의 近世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사료”라고 지적하면서 “완역본 출간은 조선후기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지역사·향토사 연구 기반을 한 단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매겼다. 그는 또 “각종 記文과 漢詩의 번역은 국문학 연구에, 특산물·진상품 등의 목록 정리는 관련 지역 특산물의 개발에, 충신·효자·열녀에 관한 번역은 청소년의 교육에 이바지할 것이다. 역사학은 물론이고 국문학 등 인접 학문, 향토사 연구와 문화 관광사업, 청소년 교육 등에 미칠 효과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여지도서』 번역의 주요 성과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고지도의 채색 가공 작업과 지명의 한글 번역이다. 흑백으로 된 여지도서 영인본의 지도 353개를 컬러로 채색하고, 지도에 실린 한자를 한글로 옮겨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변 교수는 “번역 작업에 참여한 공동 연구자들이 모두 한글세대다. 한글세대의 특징을 살려 가능한 한 쉽게 풀어썼다”고 설명한다.

『여지도서』의 모든 항목들은 문화콘텐츠로서 정보화가 가능하다. 국역을 통해서 구축 가능한 정보콘텐츠는 인명정보, 지명정보, 특산물정보, 지리정보, 조선시대 공공기관DB, 조선시대 지방 성씨DB, 조선시대 성(城)DB, 누정정보, 한시DB 등 가히 종합정보시스템의 구축이 가능하다. 특히 북한 지역에 대한 조선시대 종합 지리지 정보는 향후 통일을 대비한 정보망 구축에도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완역 작업을 선두에서 이끈 변 교수는 고전 번역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그만큼 끈기를 가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번 성과가 8년만의 결실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학진 과제는 대개 단기 과제다. 박사급 연구자들이 관여하지만, 3년 지원 기간이 종료되면 뿔뿔이 사라진다. 연구는 지속성이 관건인데, 동력이 중단되는 셈이다. 인력도 함께 증발되고 만다”면서 안타까워한다. 변 교수는 “단기적 실용성도 좋지만, 고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방대 인력의 수월성은 ‘끈기’에 있다. 긴 안목의 지원이 있다면, 지방에서도 풍부한 연구진이 연구다운 연구를 축적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완역본 출간은 이것을 의미한다”고 여운을 남겼다.

변 교수는 2004년 학진 지원으로 조선시대 審問 기록인 ‘『推案及鞫案』 번역 및 역주 과제’(2004-2007 연구과제)를 진행, 2011년 ‘전주대 고전국역총서2(전100권)’로 출간할 예정이다.

 

 

3. 중종반정 [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등이 조선왕조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 때는 그동안의 농업진흥책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15세기 말엽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향시(鄕市), 즉 지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되어 마침내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건설되었다. 또한 그동안 소규모적·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무역(公貿易) 중심의 대외무역이 점차 국내 수요의 증가와 해외시장의 확대로 인해 활발해지면서 사무역(私貿易)이 크게 늘어났고, 드디어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국내의 전국적인 유통망 건설과 중국과의 사무역 증가는 국내 은광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중국과의 무역 결제수단은 금·은·철 등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은은 당시 중국에서 지정은제(地丁銀制)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사상(私商)들에 의해 은광 개발이 서둘러졌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농민층이 해체되어 일부는 소상인으로 전환하여 농촌을 떠났고, 많은 수가 농토를 상실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적란(賊亂)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층의 관료로서 특권적 성향이 강한 훈신·척신계(勳臣戚臣系)와 신진의 관료군인 사림계(士林系)로 나뉘어 대립했다. 양자 중 훈신·척신계는 왕권 또는 왕실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하여 지위를 보장받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자신과 연관된 부류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공납의 방납권(防納權)을 보장해주면서 일정한 대가를 관례적으로 상납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남 연해지역에서 지방관에게 사주해서 다수의 지방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간석지를 개발해 얻은 수익을 가지고 무역이나 은광 개발에 투자했다. 이들은 곧 새로운 경제변화 속에서 관권을 매개로 부상(富商)들과 결탁해 부를 늘려갔다. 이에 대해 지방의 재지지주(在地地主) 출신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계에 구현하고자 노력했던 신진관료집단인 사림파들의 공격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들은 훈신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비호하는 국왕과 그의 측근인 궁금(宮禁) 세력들에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국왕인 연산군은 훈신·척신계와 궁금 세력의 강력한 후원 아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들을 제거했다. 그후 연산군의 비호를 받은 궁금 세력들은 훈신·척신계와 대결하여 정치 및 경제계에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기도했다. 그결과 연산군과 궁금 세력은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를 일으켜 훈신계열을 철저하게 숙청하고 잔존의 사림파마저 제거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궁금 세력의 지나친 독주는 지배층 내부의 불만을 야기시켰고, 특히 연산군 자신은 방종한 생활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훈신계열인 박원종·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모의해 1506년 9월에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무사들을 모아 궁금 세력의 대표자인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을 제거한 다음 궁중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등극시켰다.

 

 

4.정유재란 [丁酉再亂]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

수항루

수항루

 

 

일본은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했다.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성윤문(成允文)·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한편 그해 1월 일본군측의 거짓 정보와 서인 일부의 모함에 의해 정부의 출동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파직당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4월 조선수군은 조선 연해로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중도에서 공격하려다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수군의 부산상륙을 허용했다. 이어 일본군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자,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와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했다. 8월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은 9월 16일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일본전선을 명량(鳴梁)에서 대파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그해 12월과 다음해 1월에 걸쳐 울산 도산성에서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이순신 지휘하의 수군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일본 수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1598년 8월 마침내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조선군은 마귀·유정(劉綎)·동일원(董一元) 등이 지휘하는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명군의 유정이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陳璘)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露梁)에서 일본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결과 조선과 명이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