盤谷公 柳績(石盤洞)

孝子忠義衛柳橿之閭

마음정원(寂光) 2011. 9. 15. 12:44

孝子忠義衛柳橿之閭


효자충의위류강지려 효자인 충의위 류강의 정려


公字壽甫貫文化右議政忠景公亮七大孫 공자수보관문화우의정충경공량칠대손

공의자는 수보요 본관은 문화이며 우의정 충경공 량의 7대손이다.


考諱世泓號金川享鶴林祀 고희세홍호금천향학림사

아버지는 세홍이며 호는 금천이며 학림서원(위천면)에 봉향되었다.


公至孝出天自幼鄕隣感歎文貫六體 공지효출천자유향린감탄문관육체

공의 지극한 효성은 천성에 타고났으며 어려서부터 향리와 이웃에서 감탄하였다. 문장은 육체를 관통하였다.


造詣漸高聲至譪罻丁酉倭亂金 조예점고성지애위정유왜란금

조예(학문이 경지에 오름)가 점차 높으며 명성이 무성하고 울창함에 이러렀다. 정유왜란(1597:선조30년)때

川與郭存齋跤趙大笑軒宗道入黃石山 천여곽존재교조대소헌종도입황석산

금천공(류세홍)이 안음현감 존재 곽준과 함양군수 대소헌 조종도와 같이 황석산성에 들어와

誓死守城公隨之八月十八日 서사수성공수지팔월십팔일

죽음을 명세하고 성을지켰다.공(류강)도 부친과 같이 왔다. 8월18일


夜白士林受賂納賊凶록莫 야백사림수뇌납적흉록막갈

밤에 김해부사 백사림(황석산 성주)이 뇌물을 받고 적을 들여보내니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지 못했다.


公負母氏携弟榎出城復入泣請先公偕 공부모씨휴제가출성복입읍청선공해

공(강)이 모친(진주유씨)업고 동생(가)을 이끌고 성을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울면서 선공(부 세홍)에가 같이 가자고 청하였으나

行先公堅坐不許曰吾已誓死 행선공견좌불허왈오이서사

선공께서는 굳게 앉아 허락을 안하면서 말씀하셨다.“나는 이미 죽기를 맹세하었다”.고 하시기에

公曰父旣如此子不獨死於父子賊刃之 공왈부기여차자불독사어부자적인지

공(강)이 말씀하셨다. “아버지 마음이 이와 같으니 아들만 홀로 살수가 없다”고 했다. 부자(세홍, 강)에게 같이 적의 칼날이 오기에

公翼蔽父父子同死時二十九也 공익폐부부자동사시이십구야

공(강)이 날개처럼 펼쳐 아버지(세홍)가렸으나 부자가 동시에 죽었다. 이때 공(강)의 나이 29세이다.


一家雙節與郭趙並而鄭桐溪呈文 일가쌍절여곽조병이정동계정문

한집안에서 쌍으로 절의로움은(부 세홍 충절 자 강 효절) 곽준(안의현감) 조종도(함양군수)와 더불어 같다고 정동계(휘온)의 정문(글을 지어줌)과

及朴參判記貫詳矣宣廟庚子旌閭當宇 급박참판기관상의선묘경자정려당우

박참판의 기록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선조 임금때 경자년(1600년 선조 33년)에 정려가 내려와 마땅히 사당을 지었다.


丙寅火翌年夏傾五代孫 병인화익년하경오대손

병인년(1806:순조6년)사당에 불이났다. 익년1807:정묘순조7년)여름에 사당이 넘어지자 오대손

挺和諆於諸宗其主事者汸與誠也 정화기어제종기주사자방여성야

정화가 여러종친들과 도모하여 일을 정성껏 주관한 사람은 방여이다.

註) 정화자 碩之 종열의 7대조

己未(1739년 영조 15년) 10월 15일생

工於書法筆蹟妙神(공어서법필적묘신)

공사하는 이론에 밝고 쌓는 재주가 신의 경지에 이러렀다.

乙亥(1815년 순조 20년)8월 1일 졸


鳩財招工石其室而碣其板慮後灾 구재초공석기실이갈기판려후재

재물을 모으고 석공을 초청하여 그 돌로 집을짓고 그 판도 비석으로 하였음은 후일 화재를 염려해서이다.

也銘曰黃石不拔金川不渴 야명왈황석불발금천불갈

비석을 세우고 말하노라 “황석산성이 뽑이지 않으면 금천수(금천공 세홍을 뜻함)도 마르지 않을 것이요.

公名烈烈水不能囓火不能藝過者式而咺 공명열렬수불능설화불능예과자식이훤

공(강)의 이름이 열렬하여 물도 능히 삼키지 못할 것이요. 불도 능히 사르지 못할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를 갖추고 공경하며 슬프게 울어야 한다.

崇禎紀元後三丁卯五月日 重建 숭정기원후삼정묘오월일 중건

숭정기원(1627년 인조5년)후 정묘(1807년 순조 7년)5월 일 중건함.



乙丑年 菊節에 안의 도열형님과 재성이 힘을 모아 번역 하였습니다.

이 자료 역시 안의 학렬 형님이 저에게 준 내용을 다시 옮겨 적다보니 원문과 해석이 잘못 될 수도 있겠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발견 즉시 수정 보완하겠습니다.

2011.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