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문화류씨는 류차달을 시조로 하고 류용량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이다. 문화류씨는 류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하여 10세손~12세손에서 14파로 나누어진다. 연안차씨와는 동계 혈족이다.(차씨와의 관계에 대해 문화류씨는 공식으로 부정함) 류차달의 본래 이름은 류해로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수레 1천대와 군량을 보급해 줌으로써 익찬벽상공신에 오르게 되었다.
태조로부터 수레로써 공(公)에 이르렀다는 뜻의 ‘차달’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류용량(柳用良)이 현 충주시 노은면으로 이주하면서 세거하게 되었으나, 입향 경위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없다. 승정원승지를 지낸 류용량의 아들 류몽정(柳夢鼎)이 임진왜란 당시 활동하던 인물임을 감안할 때 1580년대 충주로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2000년을 기준으로 충주시 전역에 거주하는 문화유씨는 568가구, 1,774명으로 조사되었다. 2008년 현재 세거지에서 살고 있는 문화유씨는 노은면 안락1리에 10가구, 안락2리에 15가구, 대덕리에 20가구이다.
<유적> 류용량 묘와 류몽정 묘, 류충건·류시량·류송제 삼대 효자문이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에 있다.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에 있는 조선 전기 사헌부감찰을 지낸 류용량과 부인 안동권씨 합장묘 비석> 류용량은 문화류씨 하정공파로, 자는 순부(純夫), 호는 백곡(栢谷) 이다. 조부는 고양군수 증이조참판(高揚郡守贈吏曹參判) 유순행이며, 부친은 부제학 공조참판을 역임한 류희저(柳希渚), 모친은 정부인 죽산안씨이다. 류용량은 1495년(연산 1) 9월 23일에 출생하여 창녕현감,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
막내아들인 류몽정(柳夢鼎)이 좌승지가 됨에 따라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자녀로는 3남 1녀가 있는데 장남 류몽설(柳夢說)은 주부(注簿)였고, 차남 류몽선(柳夢宣)은 일찍 죽었다. 2005년에 건립한 신 묘갈에 이전하였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의 위치인 듯하다. 묘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고 묘와 함께 호석, 묘갈, 상석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구 상석은 묘 아래쪽에 두었다.
화강암 호석을 두른 원형분으로 신·구 묘갈이 있고 상석과 망주석, 문인상 1조가 있는 형태이다. 묘 둘레 14.5m, 지름 약 5m, 높이 약 2m로 아랫부분에는 55×71㎝의 크기 화강암 판석을 둘렀다. 구 상석은 142.5×83×17㎝로 묘 밑쪽에 옮겨져 있고 신 상석은 136.5×90×37㎝의 크기이다. 혼유석은 27.5×22×25㎝이며, 망주석의 높이는 142㎝이다. 문인석은 145㎝로 1쌍이 서 있다.
구 묘갈은 비좌 원수 형태로, 비신 52×20×130㎝, 대석 83×53×30㎝의 크기이며, 대석에는 연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비제는 7×7㎝ 크기의 해서체로 ‘증병조참판 행사헌부감찰 유공용량지묘 증정부인 안동권씨부좌(贈兵曹參判行司憲府監察柳公用良之墓贈貞夫人安東權氏祔左)’라 음각되었고, 뒷면은 6대손 통훈대부 행한성부참군 류장린(柳長麟)이 지(識)하고, 통덕랑 류장귀(柳長龜)가 썼다.
신 묘갈의 앞면 비제는 역시 ‘증병조참판 행사헌부감찰 유공휘용량지묘 증정부인 안동권씨부좌(贈兵曹參判行司憲府監察柳公諱用良之墓贈貞夫人安東權氏祔左)’이며, 뒷면에는 류용량의 가계(家系)와 관적(官積) 등을 음기하였으며, 2005년 5월 8일 16대손 류태현(柳台鉉)과 종회에서 세웠다. 신 묘갈의 크기는 지붕돌 91×58×55㎝, 비신 54.5×24×143㎝, 대석 91×61×27㎝이다. 류용량 묘 약 30m 아래에는 류몽정의 묘가 있는데 역시 문인석과 망주석만 갖춘 간소한 모습이다. 그 아래 부분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인 팔작지붕의 삼대 효자문이 있다. <3대효자문>-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문> 1716년(숙종 42)에 명정(命旌)된 문화인 류충건(柳忠健)과 아들 류시량(柳時亮), 손자 류송제(柳松齊)의 3대에 걸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이다. 류충건은 류몽정(柳夢鼎)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광해군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36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죽을 먹으며 시묘(侍墓)하다 묘소 아래에서 죽어 현종 때 호조정랑에 증직되었고, 1716년(숙종 42) 정려를 명받았다.
류시량은 인조 때 사어(司禦) 벼슬을 지낸 인물로, 10세 때 부친상을 당해 애통해 하면서도 시존(侍尊)하는 절차가 어른과 같았으며, 장성해서도 지성을 다해 효도하고, 모친이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자 대소변을 맛보며 단지(斷指)를 하여 6년이나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이에 현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증직되었고, 정려를 명받았다. 류송제는 효종 때 장령(掌令)을 지낸 인물로, 부친이 충치가 심해 음식을 못 먹자 손수 음식을 입으로 씹어 입 속에 넣어주는 등의 효성을 보였으며, 아우 류계제(柳桂齊), 류회제(柳檜齊)와도 우애가 돈독하여 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현종 때 승지(承旨)를 증직하였고, 숙종 때 정려를 명받았다. 3대에 걸친 효자문으로, 중수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류시량과 류송제는 현종 때 정려가 명해졌고, 숙종 때 류충건에 대한 정려가 명해진 것으로 보아, 1716년에 3대에 걸친 효자문이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주를 세워 공포(栱包)를 생략한 굴도리집으로 결구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대량 상부에 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3량집이다.
세 개의 편액에는 각기 ‘효자증통훈대부호조정량행통훈대부종부시주부유충건지문(孝子贈通訓大夫戶曹正郞行通訓大夫宗簿寺主簿柳忠健之門)’, ‘숙종병신명정동상갑신오월입효자증통훈대부경흥창사행어모장군세자익위사사어유시량지문(肅宗丙申命旌同上甲申五月立孝子贈通訓大夫慶興倉寺行禦侮將軍世子翊衛司司禦柳時亮之門)’, ‘통훈대부승정원도승지제교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행통훈대부사헌부장령겸춘추관편수관유송제지문(通訓大夫承政院都承旨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官直提學尙瑞院正行通訓大夫司憲府掌令兼春秋館編修官柳松齊之門)’이 각자되어 있다. 문화류씨 남성들의 3대에 걸친 효성으로 인해 세워진 효자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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