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는 류차달을 시조로 하고, 류헌민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이다.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 류차달(柳車達)은 유주(儒州) 지방의 부호로,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사재를 털어 수레 1,000량을 제작하여 군량을 보급한 공으로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으로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大丞)에 올랐다. 태조 왕건은 류차달의 선대가 차씨(車氏)로 번성한 것을 알고, 류차달의 첫째 아들 효전(孝全)으로 하여금 차씨를 계승하게 하고 둘째 아들 효금(孝金)으로 하여금 류씨를 승계하도록 하였다.
<편집자 주-그러나 문화류씨에서는 류차달의 아들이 효금 뿐이라며 연안차씨와의 동족관계를 공식으로 부정함> 본관은 유주가 문화현(文化縣)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문화로 하였다. 문화류씨는 고려조의 명족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 초기부터 정계 중추에 자리를 굳혀 상신 13명, 문형 2명, 호당 10명, 청백리 12명, 공신 23명, 장신(將臣) 4명, 문과 급제자 425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청백리 12명은 이씨 52명, 김씨 2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입향경위> 진천 지방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호조참판에 추증된 류헌민(柳獻民)이 임진왜란 때 부친 류종수(柳宗壽)와 함께 경기도 양주에서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로 피난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400여 년 간 세거(世居)하였다.
<현황> 1846년(헌종 12) 류희원(柳希源), 류진풍(柳鎭豊), 류인영(柳寅暎)이 효자로 이름나 정려가 내려졌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문화류씨는 221가구 699명으로 나타났다. 현재는 문백면 옥성리 바사리마을에서 1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월면 내촌리 내촌마을에 30여 가구, 광혜원면 회죽리 회안마을에 50여 가구 중 문화류씨와 해주오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 문화류씨 집성촌 조선 말기 진천군 행정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내동·하내동·중리·상리·하리·취적리·괴형리·장관리 일부, 북변면 사랑리 일부를 병합하여 행정리라 하고 군중면에 편입하였다. 1917년 군중면을 진천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진천면이 진천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진천읍 행정리가 되었다.
진천읍 행정리 살구우물마을,마을 입구에 있었던 살구나무와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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