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까르마(Karma) - 업

마음정원(寂光) 2011. 8. 17. 11:03

업이란 말은 산스끄리뜨어 까르마(Karma, 빨리어:Kamma)의 번역어로서 동사 어근은 K..r 로서 to do를 뜻합니다. 영어에서 do 동사의 의미가 아주 광범위게 행위 일반을 나타내듯이 산스끄리뜨등 인도어 일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르마는 이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행위를 나타내고 그 중에서도 불교에서는 의도적인 행위 (Cetasika) 를 뜻합니다. 그리고 의도에 의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행위하는 그 모두를 업의 영역에 포함됩니다.

의도적인 행위라고 표현하는 의도란 말에는 수없이 많은 깊거나 얕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조대하거나 미세한 우리의 모든 심적인 성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나는 몸과 말과 뜻의 모든 행위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업 즉 의도적 행위의 특징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업은 강한 힘을 가집니다. 그래서 업력(kamma-vega)란 표현이 널리 쓰이지요. 이 업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간단히 나의 존재나 삶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나 삶 혹은 생명은 바와(bhava,有, becoming)인데 연기법에서 보면 애(愛), 취(取), 즉 갈애와 취착의 소산이지요. (연기의 앞의 과정은 생략합니다.) 이 애와 취, 즉 갈애와 취착이야 말로 우리가 순간순간 짖고 있는 의도적 행위 즉, 업의 가장 강력한 모습이지요.

그리고 영어에서 becoming 이라고 옮기고 있듯이 바와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끊임없이 갈애와 취착을 통해서 되어가는 과정이고 이것이 우리 존재의 참 모습이지요. 금생의 나의 모습만 봐도 40여년 살아온 나의 모습은 매 찰라 찰라 좋으면 갈구하여 취하고 싫으면, 혐오하여 물리치는 그런 성향을 무한히 되풀이한 결과입니다.

탐욕 욕심 욕망 갈구 관능 애욕 성욕 식욕 물욕 명예욕 성취욕 등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그 엄청난 갈애의 에너지, 그리고 이런 것을 조장하는 사업 그리고 이와 맞물려 소위말하는 부가가치등을 창출하려고 온갖 부추김의 수단을 다 발휘하는 현대 매스미디어등등을 통한 엄청난 자극의 에너지, 분노 증오 격분 저주 파괴 질투 시샘 폭력 전쟁 등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혐오의 에너지 - 이런 것이 바로 업이라는 말속에 들어있는 엄청난 힘입니다. 물론 관용 자비 평화 평온 고요 침착등의 성향도 있습니다. 이러함을 통해서 나라는 존재는 소위 말하는 나만의 개성, 인격, 습관, 성향을 쌓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업은 엄청난 되어감의 가속도를 가진 그런 존재입니다.. 사실 업력(kamma-vega)이라할 때 그 힘을 뜻하는 vega는 속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힘은 엄청난 가속력을 가진 것이니까요. 그래서 업이란 좀처럼 방향을 바꿀 수가 없는 그런 성향과 가속도를 가져 탁류처럼 찰나찰나에 용틀임치며 흘러가는 그런 것입니다.

둘째, 이런 강력한 힘과 가속력을 가진 업은 당연히 그 결과를 수반합니다. 이 결과가 소위말하는 업보(kamma-vipaaka)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 순간 순간에 짓는 엄청난 에너지 덩어리인 의도적 행위인 업은 당연히 그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 업보가 다시 의도적 행위가 되면 그 것은 또다시 업이 되고 업력이되어서 다른 업보를 일으키게 됩니다.

셋째, 금생에만 봐도 매 순간순간에 행하는 의도적인 행위가 숫자로서 헤아릴 수 없이 몇 천만억가지나 되고 그래서 그 결과, 과보도 역시 몇 천억만가지로 얽혀서 나타나고 그 결과는 역시 다시 하나의 인이 되어서 업력으로 작용하고 … 이렇게 앞뒤 서로서로 역동적으로 얽혀있고 이 얽힘은 또 나 혼자만이 아니고 내 가족 친구 사회 국가 지구 우주 등등으로 얽히고 내 가족 친구 등등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서로 얽혀드니 실로 이 우주가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업은 불가설불가설전이요 우리의 헤아림으로서는 도저히 다 측량할 수가 없지요. 그냥 그래서 경에 업력난사의라고 거듭 표현하고 있나봅니다.

셋째, 우리의 이런 의도는 그러니 좋은 의도와 나쁜 의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는 선업(kusala-kamma)과 불선업(akusala-kamma)으로 말합니다. 초기경 곳곳에 세존은 10선업을 권장하시고 10불선업을 금할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꾸살라)과 불선(아꾸살라)의 근본의미를 어원에 입각해서 좀 음미해본다면 많은 도움이되리라 생각됩니다. 선(kusala)이란 단어는 인도의 전통에서는 kusa+la로 분석하고 있는데 여기서 꾸사는 꾸사라는 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la 는 동사의 어근으로서 '자르다, 베다(to cut)'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꾸살라라는 의미는 꾸사풀을 꺾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왜 선이 이 의미와 연결되어 있나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좀더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꾸사풀은 우리나라의 억쇄풀과 비슷하다할 수 있는데 인도의 전통적 제사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풀입니다. 그런데 이 풀이 아주 아주 억세고 날카로와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잘못 꺾게되면 손이 베이게 되지요. 우리 어릴때도 억쇄풀 꺾다가 손이 베인 그런 경험이 있지요. 그래서 이 중요한 풀을 베려면 아주 마음을 기울여서 조심해서 꺾어야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선이기 위해서는 지혜로은 주의(yoniso manasikaara)를 기울임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업과 불선업을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칼을 들어서 사람몸에 상처를 주는 행위 그자체는 그냥하나의 행위지만 여기에 작용하는 의도에따라서 선 불선으로 나누어진다고 봐야지요. 의사가 칼을 들고 환자의 배를 째는 (너무 과격한 표현?) 것은 살리기위한 의도이니 선업이 될 것이고 강도가 금품 탈취를 위해서 행인의 배를 그리하는 것은 불선업이 되겠지요.

저 유명한 깔라라경에 의해서 말한다면 탐진치가 증장하는 것은 불선이고 반대로 탐진치가 줄어들고 소멸되는 것은 선이라고 봐야지요. 우리 범부는 매순간 어떤식으로던 의도를 하지 않고서 살수는 없으니 항상 그 의도가 선이 되도록 노력해야겠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향상하도록 해야겠지요. 아뭇던 선 불선을 판단하려면 그만큼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햐 한다고 봅니다.

넷째,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사건을 두고 단세포적으로 그냥 과거의 업이라고만 치부하는 것은 지혜로운 주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정말 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챙겨서 참 지혜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치 않으면 업사상이 후대에서 일종의 운명론으로 오해되어서 자포자기와 자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지요. 실제로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소지가 아주 많습니다.

다섯째, 업에서 헤어나고 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정견을 확립하는게 선결조건이고 이 정견을 바탕으로한 팔정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견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4성제를 근본으로 하는 연기법을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항상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 나가는 것이 (악)업에서 헤어나고 마침내는 저 육조단경에서 말씀하시듯 선악을 도막사량하는 경지, 선까지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 각묵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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