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테라와다(상좌부) 불교

마음정원(寂光) 2011. 7. 21. 13:15

테라와다(상좌부) 불교

현재 불교는 크게 북방불교와 남방불교, 혹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라는 식으로 나뉘어 지고 있으나 부처님 시대에는 이런 나뉨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 후 100년이 지나고 나서 불교에는 부파불교 시대가 열리었는데 그때 상좌부 불교와 대중부 불교(나중에 대승불교가 됨)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것은 부처님의 법을 따르고 의지하는 데에는 별 의미가 없는 나뉨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인도, 티벳, 중국, 일본 등으로 전파되어온 대승불교권에 속하게 되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로 전파된 남방불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테라와다(Teravada)라는 말은 "장로(長老)들의 길"이란 뜻으로 상좌부(上座部)라고 합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사용하셨던 팔리어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여,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대승 경전과 대비됩니다. 이 팔리어 경전(아함경)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쓰여진 것으로 기독교 시대가 열린 이후에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대승권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나 다른 어떤 경전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추종자들은 팔리어 경전을 경전의 일부로 보아 완전한 경전이 아니라 기초적인 지혜로 폄하하여 `소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흔히 소승불교와 동일하게 취급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소승은 부파불교 시대에 18개나 되는 많은 학파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상좌부 불교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전승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상좌부 불교에 거의 접근해 보지 못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도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일 뿐이어서 상좌부야말로 살아있는 불교의 전통이라는 사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불자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선(禪), 티벳의 밀교에 관심이 많아 단순하고 역설적인 선의 직관적 방식이나 미묘한 교리상의 특징, 부처나 보살들이 펼치는 기적이나 환시(幻視)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 특히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는 수십만이 넘는 스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실행하는 상좌부 불교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승려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촌락의 일상적인 삶에 참여하고 있으며 많은 스님들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에서부터 마약중독자들을 회복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적 봉사활동을 수행하며,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스님 외에는 팔리어와 경전의 연구에 열중하고, 일부 스님들은 선(善)을 쌓고 청정한 도덕적 삶을 영위하며 불자들을 위해 많은 설법을 합니다.

수백만의 불자들은 스님들을 예경하는 것이 자신들의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 승려들은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좌부 불교국가들에서는 수행의 스승들은 가장 숭앙 받는 집단에 속하여 있습니다. 수 만개의 사원들 가운데 일부분만 집중수행에 전념하고 있지만 이 사원들은 집중적인 수행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행센터와 아울러 상좌부 불교 수행의 살아있는 전통을 말해주는 주요한 중심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 수행센터에서는 세속적이거나 매체를 통한 상호작용(TV, 라디오 등)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루종일 수행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삶의 평범한 일상적인 활동조차도 외부의 소음을 거의 의식할 수 없는 고요한 환경 속에서 수행의 연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침실이나 수행장소들은 통상 장식이나 가구가 거의 없는 소박한 구조로 되어 있고 수행센터의 각종 규칙들은 인간의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갈망을 최소화시킬 수 있도록 짜여져 있으며 날마다 법문과 인터뷰로 수행을 점검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가르침을 통해 계율과 도덕을 강조하고 생활의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동시에 초조, 들뜸, 불안, 갈등과 같은 심리적인 혼란이나 죄의식을 없애줍니다.

수백 명의 수행 스승들은 집중과 통찰력을 이용하는 법과 몸 안에서 나타나는 빛과 무늬의 구상화 연습, 신체의 각 부분에 대한 집중의 방법들과 심지어는 비교(秘敎)적인 치료 기술들까지 전수하고 있습니다. 계율은 그 자체가 일종의 수행의 형태가 되기도 하는데 일부 사원에서는 수천 가지의 계율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은 인간의 감각적 욕망과 수행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통제되어지지 않는 습관들을 절제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의 전통은 결코 특정한 성향을 띠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수행 스승들은 친밀하면서도 지혜로운 친구의 역할을 떠맡고, 다른 스승은 남을 위해 헌신적인 일을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상좌부 불교의 이와 같은 헌신적인 측면이야말로 대중적 종교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스승들은 엄격한 수련과 부단한 노력을 강조하는 반면, 다른 스승들은 다만 수행자의 마음이 고요해져서 모든 존재를 위한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좌부 불교의 경전은 일차적으로 불교의 뿌리에 근거를 둡니다. 말하자면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무아(無我), 사성제[苦, 集, 滅, 道] 등의 사상이 반복되어 강조되고 설명되어집니다. 상좌부 불교 이론과 불교 심리학의 상당한 부분이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을 체계화시켜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 가지 번뇌’, ‘관(觀)의 네 가지 대상(4념처)’, ‘깨달음의 네 단계’같은 것들이지요. 다소 복잡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가르침들은 수행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정교하고 깨끗하게 다듬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은 마하 사티파타나(Maha Satipatthana : 4념처)입니다. 이 수행은 호흡하는 것을, 마음을 챙겨 지켜봄으로서 신체 각 부분과 감각 대상,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대한 관찰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두 가지 중요한 기본적인 수행, 즉 사마타(Samatha : 止)와 위빠싸나(Vipassana : 慧)를 말합니다. 사마타는 정적, 고요, 집중을 의미하며, 위빠싸나는 지혜, 통찰력을 의미하는데, 마음과 육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 간에 현재 이 순간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타의 수행을 통해 계발된 강한 정신력이 수반되었을 때, 위빠싸나는 정신과 육체의 전체적인 과정이 다만 무상(無常)과 고(苦)로 점철된 단순한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위빠싸나는 ‘나(자아)’라는 것이 있다는 근본적인 착각을 포함하는 번뇌와 집착, 탐욕, 증오 따위를 의도적으로 파괴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수행자는 고통을 본질로 하는 이 세상에서 생사의 수레바퀴인 윤회(Samsara)를 벗어난 자유를 얻게 되어 열반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수행하는 도중 이따금씩 법열의 상태나 신비한 힘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에 집착하지 않도록 합니다. 수행자는 이 모든 현상을 윤회의 또 다른 일면으로 보고 자신의 수행을 지속하도록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을 것입니다. 결국 `자아`라는 것을 떠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입장에 항상 서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상좌부 불교는 삶을 덧없고 근본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유일한 실체적 가치는 깨달음의 성취, 즉, 열반(Nibbana)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상좌부 불교는 그 가르침과 수행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분명히 부정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단순한 상태, 그리고 통찰력과 지혜와 자유의 필요성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대승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붓다의 미묘한 기적이나 깨달음에 대한 찬양의 노래는 거의 없습니다. 또한 선시(禪詩)에서 볼 수 있는 깨달은 자의 자유로움이나 본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의 시도 없습니다. 그리고 밀교의 복잡 미묘한 방법론이나 황홀경의 노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좌부 불교는 결코 희열을 배척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알란 와트(Alan Watt)는 마지막 저서인 [도(道) : 물길(The Watercourse Wa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좌부 불교가 번창하고 있는 나라에 사는 민족들은 모두 무한히 즐겁고 인간적인, 생각이 열린 사람들이다."

상좌부 불교는 인간의 정신과 삶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하고 균형 잡힌 정신력과 주의력, 그리고 통찰력을 통해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보리수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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