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고요

나를 찾아가는 길

마음정원(寂光) 2011. 1. 12. 16:40

 
   
***나를 찾아가는 길*** 

    ...월 호 스님... 티베트에서는 달라이라마가 환생해 이 세상에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가 입적한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을 찾아가서 몇 가지 시험을 거쳐 쿤둔을 결정한다고 하지요. 가령 전생에 쓰던 물건들과 다른 물건들을 나열해 놓고, 자기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테스트를 거쳐 쿤둔으로 확정된 이는 가족을 떠나 라싸의 포탈라궁에서 살며 지도자 로서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환생한 달라이라마를 다시 찾아낸다니 과연 환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윤회란 또 무엇일까요? 달라이라마가 정말로 환생한 것이라면, 무언가 윤회의 주체로서의 ‘불멸의 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고정불변의 실체로서의 ‘나’을 찾으려는 노력을, 불교에서는 ‘물속에서 달을 건지려는 것(水中捉月), 거울 속에서 머리를 찾으려는 것(鏡裏尋頭), 배의 표식을 쫓아 물속에 빠진 검을 구하려는 것(刻舟求劒), 소를 타고 가면서 소를 찾으려는 것(騎牛覓牛)’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헛수고라는 것이지요. 불교의 근본교리는 무아설(無我說)입니다. 무아설이란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나’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가변적 존재로서의 ‘나’마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분명히 바로 지금 여기 존재합니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이가 바로 ‘나’입니 다. 하지만 그 ‘나’는 찰라 생멸하는 ‘나’입니다. 우리의 몸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세포들이 생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 하고 있는 몸과 마음을 떠난, 영원 불멸한 존재로서의 ‘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무아설입니다. 그렇다면, 윤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을까요? 고요한 연못 한가운데 돌을 던지면, 그 파문이 가운데서부터 가장자리로 물결치며 전달됩니다. 이때, 가운데 있던 물 그 자체가 가장자리로 옮겨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파동이 전달될 뿐이지요. 윤회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원 불멸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있어서 내생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이 죽은 후 그 육신에 담겨 있던 정신적 파동이 다음 생으로 전이된다 고나 할까요? 이렇게 보면, 달라이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후신이라는 말도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즉 관세음보살이라는 고정 불변의 주체가 있어서 윤회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갖고 자비를 행하는 이가 바로 관세음보살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살이라는 결정된 존재가 있어서 보살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을 하는 이가 바로 보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정신적 파동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을 때, 당신의 영혼은 진정한 ‘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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