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심리치료
‘알아차림’이라는 치유기제를 중심으로
왜 명상과 심리치료인가?
명상과 심리치료 모두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며 처방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상은 동양에서 인간의 정신적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오래된 방법으로서, 프로이트 이후 인간의 정신 문제 해결을 위해 심리치료라는 기법을 고심해오던 서양 심리학자들에 의해 치료의 새로운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동양의 명상에 대한 서양 심리학자들의 관심의 증가는 동서양의 교류가 보다 활발해진 20세기 이후의 사정을 고려하면 일견 당연해 보인다. 자신의 치료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목적에서 서양 심리치료자들이 동양 명상의 정신과 기법을 도입하여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있어 명상과 심리치료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으며, 특히 심리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명상의 치유적 메커니즘을 '알아차림'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고자 한다.
문제의 진단
명상을 인간 정신 문제의 해법으로 보는 불교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 바로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무지한 마음(무명, avijja)에서 찾는다. 탐은 좋아서 나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마음, 진은 싫어서 나로부터 밀쳐내려는 마음, 치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는 말 그대로 무지한 마음임을 알겠는데, 탐과 진은 뭐가 무지하다는 것일까? 무엇을 모른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존재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를 그대로 알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잘못 알고, 고통인 것을 즐거운 것으로 잘못 알고, '나, 영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런 것이 있는 줄 잘못 아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정신적 문제(번뇌, kilesa)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세 가지 독심(毒心)이다. 그렇게 잘못 알기 때문에 탐하고 성낸다는 것이다. 성냄은 지금 성내는 대상 말고 다른 것을 탐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탐심과 다르지 않다.
붓다, 오직 고통과 그 해결만을 말하다
이런 식의 설명에 우리는 동의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칫하면 '탐심과 진심, 치심을 갖는 것은 잘못이고 나쁘다'는 일종의 도덕관념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리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5계 등의 지계(sila) 역시 이런 '부도덕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불교가 탐진치를 경계하고 계를 지킬 것을 권장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존재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데 그 참뜻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알지 못할 경우, 5계를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억압하는 장치라고 잘못 이해할 소지가 있다. 붓다는 인간을 '단죄'하려고 하지 않았다. 붓다는 오직 인간 고통의 원인과 해결만을 말하였다. 그것을 치열하게 모색한 결과,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3가지 실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고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갈애(tanha)와 집착(upadana)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해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법은 탐진치의 독성을 바로 알고 계율을 지키는 바탕 위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붓다는 탐진치와 계율을 이야기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계, 정, 혜 3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계는 몸과 입을 통해 이미 겉으로 드러나 버린 거친 번뇌(vitikkama kilesa)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정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번뇌(pariyutthana kilesa)를 다잡기 위한 것이며, 마지막 혜는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일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아주 미세하고 잠재된 번뇌(anusaya kilesa)를 뿌리째 뽑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세 가지 수준의 번뇌에 대응하여 각각의 번뇌에 보다 효과적인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1) 여기서도 우리는 계를 어떤 도덕관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붓다는 오직 인간의 고통과 그 해결법을 말한 것이지, 그 외의 다른 것을 말하지 않았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알아차림'—인간 고에 대한 처방
그렇다면 이런 식의 문제 진단에 이어 불교, 특히 위빠사나 명상이 내리는 처방은 무엇인가? 인간의 삼독심으로부터 비롯된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생기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붓다가 제시한 해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알아차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12연기와 4성제, 8정도의 맥락에서 이야기해보자.
우선, 12연기의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 느낌 > 갈애 > 집착 > 유 > 생 > 노사]의 윤회의 굴레에서 특히 [느낌 > 갈애]의 순간에 알아차림을 두면 그 느낌이 갈애로 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4성제로 설명하자면 고통인 줄[苦] 모르고 집착하기 때문에[集] 역시 얻는 것은 고통뿐이며[苦], 고통에서 벗어나기[滅] 위한 처방으로 8정도[道]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8정도에서는 지혜 그룹(바른 견해, 바른 의도), 지계 그룹(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집중 그룹(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집중)으로 크게 나누어(계, 정, 혜) 인간 고통의 해결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바른 알아차림이다.2) 인간의 정신적 고뇌 해결의 측면에서 볼 때 12연기, 4성제, 8정도의 가르침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단연코 '알아차림 혹은 마음챙김(sati)'이다.
범박한 해법
인간 고의 원인에 대한 이런 식의 진단과 처방이 심리치료를 하는 서양 심리학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아마도 그건 너무 범박한3) 해법이라고, 인간의 무의식이나 개인의 다양하고 특수한 삶의 배경과 정신 역동을 고려하지 않은 '무딘' 해법이라고 하지 않을까? 혹은 지나친 일반론이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불교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계율을 정해 놓았다고까지 할지 모른다(이점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교는(명상은) 각 개인의 정신적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개인의 배경, 정신 역동에 따라 엄청난 다양성을 지니는—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고통에 내재한 힘(에너지, 욕구 등)의 '방향성'4) 혹은 '양상'에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다양한 고통이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거기 내재한 어떤 힘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서양 심리치료가 불교의 인간 고에 대한 인식 혹은 진단을 너무 범박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 같다.5) 그러나 오히려 이런 식의 해법은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보다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내용이냐 양상이냐' 부분에서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생산적 논의를 위하여
이런 식의 진단이 범박한 것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 범박함 때문에 문제 해결이 효과적이지 못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많은 심리치료자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명상이 지닌 심리치료적 한계와 관련한 맥락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자아가 먼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명상은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자아가 확립되지 못하여 명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아강도가 약한 사람은 주위에 흔치 않은 것 같다.6) 그리고 그런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맞추어 명상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명상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떤 명상법으로 어떻게 명상하고 있느냐, 즉 제대로 명상하고 있느냐이다. 즉, 자아의 강도가 문제가 되어 명상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므로 논의의 실익이 별로 없음을 위에서 말하였다—'제대로 하지 않아서' 효과가 없는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명상의 효과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명상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며, 우리는 그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대로 명상 수행을 하여 일정한 성취에 도달한 경우에 한하여 그것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7)
올바른 명상수행의 기준
명상 수행을 제대로 하느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올바른 불교의 가르침인가를 확립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실제로 어떤 불교 전통이 그 가르침을 지금 현재에 실천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가르침과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8) 불교는 붓다의 깨달음 이래 2,500년 동안 그 고유한 가르침이 4성제, 8정도, 12연기의 가르침으로 면면히 이어져왔으며9) 하나의 완정한 삶에 대한 관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전통이 가장 원본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역시 미얀마 등지를 위주로 한 테라와다(Theravada) 불교라고 할 수 있다. 테라와다 불교를 접해본 많은 이들이 이 전통이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불교의 전통임을 이야기한다.
명상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처럼 명상이 속해 있는 구체적인 불교 전통의 맥락을 흐리거나 왜곡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명상을 지나치게 실리적 목적을 위한 테크닉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명상의 본질에서 멀어질 소지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명상과 심리치료
보다 구체적으로 명상과 심리치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명상 |
심리치료 |
1. 정신 병리는 누구나 갖고 있는 것 2. 초(超) 인지적 과정 3. 자각 능력 증대 4. 문제와 맺는 관계(양상) 중심의 해법 5. 사례 및 상황에 개의치 않음 6. 보다 창의적, 주체적 7.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 |
1. 특정 정신 병리를 갖고 있는 사람만을 대상 2. 인지적 과정 3. 해석 능력 증대 4. 내용 중심의 해법 5. 사례 및 상황별 서로 다른 전략 6. 보다 기법적 7. 특정 이론에 바탕한 해법(정신분석, 행동주의 등) |
근본 예방책으로서의 명상
우선 1번을 비교해보면, 불교 명상은 정신병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으로 본 반면 심리치료는 특정한 정신 병리를 갖고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명상에서 말하는 정신병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탐진치, 무지, 무명을 말하는 것으로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기능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 한한 정신병리와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차이가 인간 고의 문제에 대한 양자의 태도 차이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선, 별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문제시 했다는 점에서 불교는 인간 존재와 고통에 대해 매우 섬세하고 철저한 진단을 내렸다. 자그마한 싹이라도 남겨두면 무성한 잡초로 자라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이다. 명상은 마치 기독교에서 인간의 원죄를 말하듯이, 인간이란 존재는 계, 정, 혜의 3학을 부지런히 갈고닦지 않으면 흐르는 강물에서 노를 젓지 않은 배가 하류로 떠내려가듯이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본다. 한편 심리치료는 정신의 기능적인 이상을 호소하는 때에야 비로소 작업에 착수한다. 이런 점에서 명상은 문제의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는 예방적 성격이 보다 짙다고 하겠다.
내용이냐 양상이냐
2~5번까지는 모두 문제의 '내용 대 양상'의 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위에서 보듯이 명상은 심리치료에 비해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와 맺는 관계 양상에 보다 주목한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 초인지적적(meta-cognitive) 과정을 다루며 당사자의 문제에 대한 해석 능력보다 자각을 증대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해석은 내용에, 자각은 양상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데 있어 문제의 내용을 다루는 것—심리치료가 하는 일—이 적절한가, 아니면 모든 고통에 내재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다루는 것—명상이 하는 일—이 효과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내용과 양상이라는 이 두 차원은 어느 사태에든 본질적으로 수반되는 두 차원이다. 어느 한 차원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두 차원 모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차원 모두 적절하게 다루어주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양의 심리치료에서 자각과 양상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으로 게슈탈트 심리치료나 ACT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명상은 인간이 처한 구체적 문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그 문제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문제 중심적 대응 방식보다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주체) 중심의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명상을 통해 사람의 바탕 자체가 질적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그럴 때 각 개인이 처한 특수한 상황들은 그 사람이 명상수행을 통해 터득한 지혜로써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명상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명상과 심리치료에 대한 이런 비교를 통해 인간 고의 문제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해결을 양자가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別論]
아래에서는 불교와 위빠사나 명상이 인간의 정신적 문제에 대한 관계 양상을 바꾸는 핵심으로 제시하는 '알아차림'을 인간의 욕구 문제와 관련시켜 보았다. 그런 다음 정보처리 관점에서 본 알아차림의 치유적 메커니즘, 그리고 명상적 상태의 본질과 치유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보았다.
[別論1]
욕구의 충족과 초월—의식 상태, 특히 알아차림과 관련하여
욕구 충족과 욕구 초월은 서로 배타적인가?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야 욕구를 초월할 수 있는 건가? 성인들은 한때 자신의 욕구를 '원 없이' 충족시켜본 다음에야, 신물이 날 정도로 질린 다음에야 구도의 길에 나섰던 것인가? 붓다는 세속적 영예를 다 누린 다음에야 구도의 길에 나서지 않았는가(예수는 좀 다르지만...)?
그러나 이런 문제 제기 자체가 욕구의 충족과 욕구의 초월을 서로 다른 별개의 행위로 간주하는 이원론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또한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이 그 행위의 유일한 해석 근거라고 생각하는 경직된 사고를 보여준다. 문제는 욕구를 충족하는가, 아니면 놓아버리는가 하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특히 명상적 관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하는 순간순간의 의식 상태(state of consciousness)라고 할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든 -그것이 욕구 충족의 행위든, 욕구 포기 혹은 초월의 행위든- 그것을 '자각하고 있느냐'가 그 행위의 질을 판단하는 보다 본질적인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행위라도 어떤 의식 상태에서 하느냐가 향후 그 행위의 진행방향을 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구의 문제를 직선적 단계의 문제[욕구를 갈망 --> 욕구의 충족 --> 욕구의 해소 --> 욕구의 초월]로 보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행위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견이 아닐까. 그것보다 자신이 지금 어떤 단계에 있건 지금 현재 어떤 의식 상태에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욕구를 중심으로 하는 행동 차원과 자각(awareness)을 중심으로 하는 의식 차원은 서로 차원이 다르기에 반드시 [욕구 해소 혹은 충족=자각 없음, 욕구 절제 혹은 포기=자각 있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두 차원에서만 본다면 산술적으로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 있다.
|
자각 없음 |
자각 있음 |
욕구 해소 |
1 |
3 |
욕구 초월 |
2 |
4 |
1.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욕구를 해소: 중독 등 부작용, 개인적, 사회적으로 심각한 타격
2.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욕구를 초월: 인내, 극기, 고행 등 일시적 미봉책, 억압에 의한 반작용 등. 역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
3. 자각이 있는 상태에서 욕구를 해소: 욕구 충족의 꼭 필요한 지점에서 멈출 수 있음, 자각은 전체를 바라보는 鳥瞰的 시야를 확보해주고 환경에 꼭 맞는 '的中'의 행위를 하도록 만들기 때문.
4. 자각이 있는 상태에서 욕구를 초월: 이것은 갑자기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3의 상태가
충분히 지속되었을 경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욕구는 이제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욕구와 함께 하면서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어'는 일어나는 욕구를 진압한다는 말이 아니다. 욕구의 발생과 충족, 해소라는 욕구에 대한 수평적 관점을 넘어 자각이라는 의식상태의 기준을 새롭게 대입한다는 의미다.
물론 복잡하고 서로 갈등이 많이 생기는 현대사회를 사는 데 있어 겉으로 보이는 규율 준수 차원의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같은 사회를 사는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우리 사회가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위의 2의 단계처럼 일시적인 미봉책일 수 있다. 우리는 3의 단계를 충분히 경험한 다음 4의 단계를 지향해야 한다. 1의 단계는 막아야 하고 2의 단계 역시 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욕구를 갈망 --> 욕구의 충족 --> 욕구의 해소 --> 욕구의 초월(해결)]라는 수평적 전개
보다는,
욕구(행동 차원)
------------ ===> 수직적 관점
자각(의식 차원)
이 보다 온전한 관점이라 하겠다.
조감과 적중
자각하는,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욕구의 해소가 진행된다.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면 쉽게 중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지만, 자각하는, 알아차림이 충분히 계발된 상황에서는 욕구 충족을 꼭 필요한 지점에서 '멈출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욕구 충족의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그것은 알아차림이 있는 경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감(鳥瞰)하는 시야를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에서 무엇이 자신과 타인에게 이롭고 해로운지를 보다 쉽게 판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또한 자각의 적중(的中) 기능과도 관련이 있다. 적중이란 말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들어맞는다는 말이다. 알아차림은 자신의 모든 의도와 행위가 주변 상황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반응하는 '꼭' 맞는 행위만을 하도록 만들어준다. 이런 앎을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지혜(panna)라는 말로 표현한다.
종교적 계율이 지닌 참뜻도 여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모든 종교적 계율은 그것을 지키는 행위가 우선이 아니라 어떤 의식 상태에서 계율을 실천하느냐가 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각을 계발하는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외면적 행위만을 중시하는 '어렵고 결국엔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 길을 가야만 한다. 물론 불교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계율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계율을 지킴으로써 알아차림과 마음집중을 보다 수월하게 계발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최종적으로 지혜가 생기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別論2]
정보처리 관점에서 본 알아차림의 치유기제
정보처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받는 정신적 고통이란 결국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정보의 찌꺼기(residue)’라고 할 수 있다. 정보처리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정보량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정보를 처리하려고 하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정보의 찌꺼기가 발생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이란 ‘물리적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하루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24시간이다). 그것은 오히려 각 개인이 모두 다르게 경험하는 ‘주관적 시간’을 말한다. 각 개인이 저마다 다르게 경험하는 ‘주관적 시간’이란 곧 각 개인의 ‘시간에 대한 주관적 속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보처리의 질 = 일정 정보량 / 시간에 대한 주관적 속도감
결국, 주어진 정보량이 일정하다고 할 때 시간에 대한 주관적 속도감이 느릴수록 정보처리의 질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정보처리의 질’이 높고 낮음에 따라 스트레스 수준이 결정된다고 할 때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관건은 시간에 대한 주관적 속도감을 느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한번에 여러 개’의 정보를 처리하던 기존의 방식10)에서 ‘한번에 하나씩’의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옮겨가 처리되지 않은 정보의 찌꺼기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처리해야 할 정보량이 아무리 많아도—문명의 각종 이기의 발달로 개인에게 처리가 요구되는 정보량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시간에 대한 나의 주관적 속도감이 충분히 낮다면 나의 정보처리의 질은 여전히 높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자신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11)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속도를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의 페이스에 보다 적절히 조율하는 것을 의미한다(이것은 현상의 무상함을 여실히 본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고통과 실체없음의 속성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현상은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의 알아차리는 힘과 기민함이 충분하지 못하면 많은 현상들을, 즉 정보들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현상이라는 정보를 놓치지 않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매순간 그것들을 정확하게 볼 수 있으면 처리되지 못한 정보의 찌꺼기는 발생하지 않고 따라서 각종 정신적 고통도 생기지 않는다. 이것이 허둥댈 때도 ‘허둥댐과 함께 있으라(be with the hurry)'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주관적 속도감이 충분히 낮아지면 또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에 대한 경험자 자신의 반응 선택의 범위가 넓어지고 여유가 생긴다. 카밧진은 이를 두고 ‘창의적 공간(creative space)12)’이라고 표현했다. 반응 선택의 범위가 넓고 선택 결정에 여유가 있을 때 더 우수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명상 수련에서 매일 의도적으로 수련을 위한 일정한 시간을 마련하는 것도 주관적 속도감을 느리게 만드는 환경을 가꾸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좌선, 경행, 일상수행 등의 활동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명상적 상태의 경험이 시간에 대한 경험자 자신의 주관적 속도감을 느리게 만들어 처리되지 못한 정보량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 명상을 통한 치유의 보다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치유기제의 핵심에 있는 명상적 상태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좀더 살펴보고자 한다.
[別論3]
명상적 상태13)의 본질과 치유
명상적 상태에 대한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 명상적 상태를 경험한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인식하는 자신에 대해 ‘자꾸자꾸 뒤로 물러서는 것(repeatedly stepping back)’이다14). 말하자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 현상을 인식하는 나(I₁) > 인식하고 있는 나(I₁)를 다시 인식하는 나(I₂) > I₂를 다시 인식하는 나(I₃) > I₄> I₅ > …
과 같은 방식의 인식이다. 인식하는 나를 자꾸 다시 인식한다고 해서 대상은 사라지고 인식하는 나만 남은 자기몰두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명상적 앎의 상태를 오해한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명상적 앎’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보이는 대상이 사라지고 인식하는 나만 남는다는 얘기가 아니다(혹은 사마타 명상에서처럼 보이는 대상만 남는다는 얘기도 아니다). ‘명상적 앎’이란 오히려 대상은 대상대로 그대로 존재하고, 나의 앎은 앎 그 자체로 분명히 구분되어 존재하는 상태, 즉 대상과 그 대상을 알고 있는 나, 오직 그 둘 뿐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다. 거기에는 앎을 주관하는 나라는 실체는 끼어들 틈이 없다[무아]. 오직 앎의 대상과 앎이라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과 앎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무상].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이것'이라고 붙잡을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괴롭다[고]. 그것은 대상과 그 대상을 인식하는 나의 관계성을 보다 또렷하게 자각하는 앎의 상태이며, 또한 끊임없이 ‘나’를 대상과의 ‘상대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나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다만 나의 앎 혹은 인식만이 있을 뿐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곧 '명상적 앎(meditative awareness)'의 상태다.
명상적 앎의 상태에서는 경험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나 사이에 자꾸 자꾸 ‘공간’이 생긴다. 위에서 카밧진은 이것을 ‘창의적 공간(creative space)’이라고 표현했다. 그곳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공간이다. 변화와 성장, 치유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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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우 빤디짜 사야도(보리수선원 법문, 2008. 12)
2)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12연기는 인간 번뇌의 원인과 발생 과정에, 8정도는 그 해결방법에 보다 무게중심을 둔 설명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4성제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3) 범박하다 (泛博/汎博-) [형용사]데면데면하여 구체적이지 못하고 범위가 넓다.
4) 여기서 '방향성'이란 탐심이라는, 나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힘, 진심이라는 나로부터 밀쳐내려는 힘처럼 '나, 자아'를 중심으로 한 힘의 방향을 가리키기 위한 용어다.
5) 이것은 마치 동양의 한의학이 인간의 모든 질병을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6)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극심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명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Boorstein).
7) 이것은 마치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진 자격 미달 선수를 올림픽에 출전시켜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하여 그 선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는 것과 비슷하다.
8)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수행방법에 관한 문제는 각 개인의 기호나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적어도 수행방법에 관한 한, 필자의 기호와 신념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일 뿐 특정 전통이 완벽하게 옳은 것임을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9) 불교의 가르침이 불교 이전의 가르침과 가장 다른 것은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알기 위한 수행법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붓다가 등장한 것은 오직 위빠사나 수행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빤디짜 스님, 보리수선원 2008년 12월 법문). 붓다 이전에도 사마타 등의 수행법은 많이 있었다고 한다.
10) 그러나 인간은 한번에 언제나 한 개의 정보밖에 처리할 수 없다. 한번에 여러 개의 정보를 처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처리되지 않은 정보들은 스트레스가 된다.
11) 물론 위빠사나에서는 수련 중 마치 ‘병자’ 혹은 ‘노인’처럼 느리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주관적 속도감을 늦추기 위한 하나의 방편 혹은 ‘은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 Kabat-Zinn, Full Catastrophe Living p.96; 물론 이것은 마음챙김 요가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제까지 몸에 아무런 도전도 주지 않았던 것과 운동 등을 통해 지나치게 몸을 밀어붙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자 자신의 심리적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가를 통해 깨닫게 되는 자신의 몸의 한계점에서 호흡함으로써(breathing at that limit) 혹은 그 속에 머묾으로써(dwelling in) 발생하는, 변화가 태동하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몸뿐 아니라 마음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훌륭한 비유로 보인다. 몸과 마음 모두 이 창의적 공간에 있을 때에라야 변화와 성장이 가능하다.
13) 명상’은 춤 명상, 좌선, 걷기 명상 등 눈으로 보이는 외면적 활동에 중점을 두는 활동주체 의존적, 사실 지시적, 과거형 어휘인 데 비해, ‘명상적 상태(meditative state)’란 명상적 앎(meditative awareness)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무인칭적, 상황 설명적, 초미시 현재형(microscopic present) 어휘이다. 변화와 성장, 치유의 핵심은 외면적 명상 활동을 얼마나 많이 실행하느냐가 아니라(물론, 명상 활동을 많이 실행하면 명상적 상태를 경험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지만), 명상적 상태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본질에 가깝다. ‘명상적 상태’는 명상 활동을 수행하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명상적 앎’ 자체만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삼법인의 무아(無我) 체험과도 보다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14) 우 빤디타 사야도는 알아차림(sati)을 ‘관찰하는 힘(observing power)’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것은 사물을 그것에 몰입하여 열심히 관찰하는 힘이 아니라 ‘관찰하는 나를 관찰할 줄 아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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