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해설)

마음정원(寂光) 2008. 3. 11. 15:19


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溫皆空 度一切苦厄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해탈하여 觀自在菩薩이 되신 것은 바로 般若波羅蜜多를 깊이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을 밝히 볼 수가 있었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초월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반야에 의해서 해탈이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반야심경을 통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중점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본래적 반야의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관자재보살이나 보리살타나 삼세제불 까지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부처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즉 모든 부처님들은 이 반야에 의해서 반야의 도움으로 부처가 되었다고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관자재란 보는 눈이 자신 안에 있다는 말인데 이 말은 他에 의하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면 보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보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중생들의 육안으로 보는 것을 '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세계를 볼 때에 '본다'라고 말한다. 즉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열반의 세계를 볼 때에 비로소 견성성불 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자재보살은 견성성불하여 우리들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모든 세계를 스스로 볼 수 있는 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깨달음의 눈인 혜안을 얻었을 때 바로 관자재보살 혹은 부처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照見五溫皆空 度一切苦厄
석가모니 부처님은 반야의 경지를 알기 위해 그리고 반야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서 반야를 향하여 아주 깊이 반야 속으로 심취해 들어가셨다고 말씀하신다. 그 결과 반야에 의해 결국 오온이 개공한 것을 조견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가 모두 허상인 것을 밝히 보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상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초월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즉 도일체고액을 하여 관자재보살이 되신 것이다.

조견이라는 두 글자를 글자의 의미대로 받아들이자면 '지혜의 빛에 비추어 본다' 혹은 '지혜의 빛에 비쳐 보인다'라는 말이 된다.
자동차의 앞에 부착한 헤드라이트는 앞을 비출 수는 있지만 차 안은 비출 수가 없다. 그에 반해서 조견의 라이트는
지혜의 조명이므로 인간의 머리에 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의 조명으로 인간의 내부를 비추는 빛이다. 다시 말해서 조견은 '깨닫는다'는 의미로 '觀'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人間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眞實
空에 대해서는 理想과 같은 것 말고도 또 한 가지 유니크한 意味의 內容이 있다. 일찍이 '관계없다'라는 말이 流行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人間의 驕慢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우쭐대는 기분이 앞서는 것이다. 하지만 世上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이리 치닫고 저리 치닫는 사이에 차츰 人間의 모난 것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 관계는 흔히 그물의 코로 비유된다. 그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다. 어떠한 存在라도 他者와의 關係가 없고서는 그 自體만으로 存在할 수는 없다. 마치 그물의 코 하나만으로는 그물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물의 코 하나만으로는 그물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물의 코는 서로가 관계를 맺고 이어지고서야 비로소 그물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라면 자기만이, 물건이라면 그 물건만이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아'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아'는 좁은 의미의 '사심이 없다'나 '무아무중'은 아니다. 남과 무관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석가모니불께서는 다음과 같이 깨달은 것이다.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김으로 해서 이것이 생기고, 저것이 없음으로 해서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함으로 해서 이것이 멸한 것
그것은 그물의 코처럼 서로가 관계를 갖고 인연이 합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연기의 법'이라고도 한다. 석존에 따르면 "이 법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또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법은 내가 깨닫건 깨닫지 않건 우주에 존재하는 자연의 법이요 영원한 법칙이다"라고.

緣起나 空을 안다는 것은
佛敎思想에서는 緣起의 法까지도 '空'이라고 解釋한다. 그것은 앞에서의 그물의 코를 예로 말하자면 하나의 코만으로는 그물이 될 수 없으므로 여러 개의 코가 인연을 맺고 모여서 비로소 그물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그물코는 그 코만으로 홀로 설 수가 없으므로 이웃의 그물코와 關聯을 맺고서야 비로소 하나의 그물의 코가 생기는 것이다. 이 관계가 없었다면 그물의 코도 그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치가 '無我'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연기도 무아도 모두 공의 사실상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연기의 법, 다시 말해서 공의 이치가 되는 것이다. 연기가 모든 존재의 원리이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자면 "공이 일체의 존재의 원리이다"라는 결론으로 되는 것이다.
연기나 공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쉽게 말하자면 '덕분을 안다'는 것이다. 덕분이란 본래는 신이나 부처의 가호를 뜻하는 말인데 우리들은 남이 베풀어준 도움이나 은혜까지도 '덕분'이라고 해서 감사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사람은 혼자서 타인과 무관계로 고립할 수 없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으므로 자연히 '덕분'이라는 인사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덕분에'라는 인사는 누구나 흔히 입에 올리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지금 말한 것처럼 자기에게 무엇인가 플러스가 되었을 경우 그 감사의 뜻으로 사용된다는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자기에게 불리한 경우에도 '덕분'에 변함은 없다. 왜냐하면 행, 불행이라는 결과는 모두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原因이 있는 것이어서 그 필연적인 코스, 다시 말해서 연기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있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불리한 연상을 인연으로 해서 재기할 수가 있다면 불행의 '덕분'이고 '은총'이 아니겠는가.
나는 '저주'나 '양화'가 있다고는 생각해 본 일도 없다. 자기에게 있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도 우리가 보다 깊고 풍요롭게 살기 위한 위대한 것으로부터의 現像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덕분'을 아는 것이 공의 의미를 아는 일이며 공이 손에 들어오면 좋건 나쁘건 모두 '덕분'이라고 받아들여 마이너스의 사항도 플러스로 바꾸어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고액을 만나도 고액에 번민하지 않고 오히려 고액을 발판으로 삼아 일어설 수 있는 인연으로 될 것이다. 그것이 "도일체고액"이라고 하는 것이다.

舍 利 子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共 空不異色
受想行識 亦不如是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共 空不異色
색즉시공의 색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포함한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육감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세상을 말하며 공은 허공 즉, 무상한 이 세상을 가리키며 공즉시색의 색은 열반의 세계 곧 반야의 세계를 말하며 공은 영원불멸의 진공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이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는 무상하고, 공즉시색이란 진공의 세계만이 영원불멸의 실상의 세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세계를 반야의 세계라 말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의 가치 기준을 오로지 보이는 이 세상에 두며,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안개와 같이 사라질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삶의 가치를 현상세계에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부처님의 참 뜻이 아니다. 부처님의 뜻은 오직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결국 중생들이 반드시 해야할 일은 무모한 생명을 가진 무아를 반야의 생명인 진아로 바꾸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바로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무상한 색즉시공의 생명을 공즉시색의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라는 말이다.

色不異共의 眞正한 意味
나는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의 '不異'를 "색은 공의 異質이 아니고 공은 색의 異質이 아니다"라고 해석한다. 이를테면 얼음과 물은 이질의 물질이 아니라 H20라는 分子式이다. 다만 조건(因緣)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형상이나 그 작용이 다를 뿐이지 물의 본질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 異質이다. 물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색이다. 비나 눈이나 얼음도 색이어서 그 어느 것도 이질이 아닌 불이의 관계에 있는데 색불이공이란 물 끼리만이 아니라 공과도 이질이 아닌 불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 하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존재란 다만 그것만으로 그 자체가 고립해서 있을 수는 없어 다른 것과 관련을 맺고서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공이 지니는 하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은 산소와 수소가 관련을 맺어 생기는 화합물이므로 물과 공과는 물질적인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만남.관련'이라는 점에서 이질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물은 공과 다르지 않으니 색불이공이다.
공이 시사하는 두 번째 의미는 모든 것은 항상 변해가고 있어 쉴 사이가 없다는 '무상'을 설법하신 것은 아니다. 석존과 거의 같은 세기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스는 유명한 "만물은 流轉한다. 만물은 영원한 변화 속에 있다"라는 말을 납기고 있다. 색인 물은 대기중의 기온으로 인해서 얼음이나 수증기나 안개로 된다. 물은 땅 위를 흘러서는 그 높고 낮음에 따라서 폭포나 강으로 되어 항상 변하며 움직이는 無常的인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물은 공과 다르지 않아 색불이공이다.

受想行識 亦不如是
위의 文章을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다.
受卽是空 空卽是受 受不異共 空不異受
想卽是空 空卽是想 想不異共 空不異想
行卽是空 空卽是行 行不異共 空不異行
識卽是空 空卽是識 識不異共 空不異識
이 말은 오온 중 색의 부분이 제외된 말로써 인간 내면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말로써, 색즉시공에서 설한 색계, 즉 물질세계가 무상함과 같이 수상행식인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세계 역시 무상하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의 존재는 모두가 안개와 같이 사라질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空의 마음
苦의 사실 을 음미해 보면 고와 번뇌란 마치 한 장의 종이의 안과 거죽처럼 떼어놓을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고의 이면에 번뇌가 있고 번뇌가 고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고나 번뇌가 어째서 일어나는가를 관찰하는 지혜는 일체의 고나 번뇌를 정리.정돈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심경이 말하는바 '일체의 고액'이 그것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不如是
전자인 '색불이공'과 '후자인 '색즉시공'은 어떻게 다른가. 또 '공불이색'과 '공즉시색'은 어디가 다른 것이다,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불이'와 '즉시'의 차이이다.
'색즉시공'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그대로 공이라는 말이다. 원시불교의 사상에서는 지극히 소박하게 꽃이 피어나는 경치 그대로가 '무상'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沙羅雙受(사라쌍수)의 꽃의 색은 成者必衰의 이치를 나타낸다'라는 허무의 어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색즉시공은 나중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한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
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앞에 '색즉시색'이라 가설을 놓으면 알기가 쉬워지리라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색즉시색'이란 '상식적인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것이다. 이를테면 예쁜 꽃을 보면 솔직하게 "예쁘다,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것이 '색즉시공'이다. 처음부터 무리해서 '색즉시공'이라고 관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색즉시공'에 머물러 거기에 틀어박혀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색즉시공'까지도 승화시켜 다시 '색즉시색'이라는 현상으로 되돌아오면 앞에서의 아름다움이 전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바른 진리가 뒷받침되어 보이기 때문에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아름다운 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집착도 차츰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색즉시공'이라는 심경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色卽是空을 糾明하는 智慧
'糾明'가운데에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규명하는 일이 인생에 있어서의 최고의 확인일 것이다. 유명한 선승이 읊은 다음 한 수에 깊은 규명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아직은 일지 않은 파도 소리를 들어보렴
물속에 있다고 마음으로 들어라'
하고
법구경에 "언젠가는 죽는 것을 지금 생명 있음을 고마워하라"라고 설법하신 것처럼 한정된 수명을 타고난 우리들이 지금 살아서 여기 이렇게 있다가는 엄숙한 사실에 "고맙습니다"라고 감사하면서 시간과 생명을 소중히 해서 만든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들은 또 남과 관계를 갖지 않고 고립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인연의 '덕분'과 경건한 태도로 사는 것이 '공불이색 공즉시색'을 잘 소화시킨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受, 想, 行, 識도 또한 空이니라
"受想行識도 역시 또한 이와 같도다"라고 심경은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인체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요소가 空이다(五溫皆空)라는 뜻이다.

舍 利 子 是題法 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詩題法이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法文을 말한다. 곧 三藏을 말한다.
1 경장 ;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모아 기록한 책
2 율장 ; 불교도들이 지켜야할 일상생활의 윤리와 규범을 기록한 책
3 론장 ; 부처님의 경전을 논술 혹은 해설하여 기록해 놓은 책
(한문문화권에서는 삼장을 대장경이라 한다)
반야심경을 통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시제법이란 진리의 본체이며 실체이신 반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시제법은 반야에 의해 나타난 모든 근원적인 지혜 또는 영원한 생명을 말하다.
공상이란 시제법을 말씀하신 것으로써, 제법 즉 모든 법이 모든 것에 걸림이나 막힘이 없다는 뜻으로써 시공을 초월한 상태의 부처님 말씀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시제법의 의미는 삼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시제법은 삼라만상 모두가 진리요. 부처님의 법문이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제법의 존재에 대한 형태와 상태를 3가지로 표현한 말로써 부생불멸이란 문자 그대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말인데, 이것은 '시제법'의 실체인 반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불변의 준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남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시작된 것은 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반야는 '태어나고, 죽고, 있고, 없고'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구부정'이란 말씀도 마찬가지로 더러움도 깨끗함도 초월되어 계신 분으로 이해해야 하고, '부증불감'도 같은 의미로써 반야는 늘 수도 줄 수도 없는 존재로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신 분으로 그 분은 바로 시대신주요 시대명주인 것이다.

不生不滅
만약에 높은 곳에 있는 물체가 영원히 높은 곳에만 있고 물이 언제까지나 차가워 물을 만나는 인연이 없다면 인력이나 증기력의 물질적 현상이 생길 리가 없다. 다시 말해서 "실체라는 상태가 없기 때문에 물질현상이 있을 수 있다"라는 깊은 관찰의 실천이 심경의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고 있다는 것도 여기에서 알게 된다.
"이(是) 모든 법(諸法)은 空想이므로"라는 漢譯文한역 문에 약간의 말을 덧붙여서 "이(是) 모든 법(諸法)은 空을 相으로 해서"라고 바꾸어 읽으면 의미를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체의 사상은 '공을 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공은 보이지 않지만 상은 눈에 보인다.
또 '제법은 공상'을 거꾸로 하면 '공상은 제법'으로 되어 앞에서의 공즉시색의 전개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법은 모든 사물이나 현상이므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나 앞에 있는 책상, 방문이나 나를 포함해서 일체가 제법이다. 이 모든 일체의 제법은 무상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한걸음 나아가서 그 공의 相이 "불생불멸(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이라고 설법하는 것이다. '불'이라는 글자에서 우리들이 받는 인상은 '부전'이나 '불사신'등 부정적인 의미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불교용어인 경우에는 불은 때로는 비나 마찬가지로 '초월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불생불멸은 영구히 죽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생과 사를 상대적으로 생각해서 앎을 기뻐하고 죽음을 꺼려한다는 경지를 초월한다면 생사에 휘둘리는 일이 없다. 그것이 생사의 공의 상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죽음의 경우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민하는 감정은 쉽게 정리되지 않지만 노력해서 정리할 수가 있다면 죽음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이다.

是題法 空相

是故空中
无色
无受想行識
无眼耳鼻舌身意
无色聲香味觸法
无眼界 乃至 无意識界
无无明 亦无无明盡 乃至 无老死 亦无老死盡
无苦集滅道
无智亦无得 以无所得故

是故空中 无色 无受想行識
이미 해탈하여 열반(是故空中)에 이른 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뗏목의 비유와 같이 지금까지 알았던 부처님의 말씀도 버리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해탈된 부처님들이 계신 시고공중의 세계는 현상세계(물질과 정신세계)가 초월된 열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야이며 이 세계는 인간의 몸과 정신적인 활동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지식들 모두가 아니고, 육근과 육경 그리고 물질과 정신세계, 12가지 연기, 사성제 등 이 모두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각각에 대하여 부정어를 넣음으로써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 또한 이 세계는 더 이상 알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완성된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无色
색이란 넓은 의미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현상세계의 모든 것을 말하며, 좁은 의미에서는 사람의 몸, 즉 육신을 말한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색은 육근과 육경을 말하고 있다.
무색이라고 하는 것은 시고공중의 세계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물질세계가 초월된 열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무수상행식이란 위에서 말한 색의 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 즉 정신과 마음의 기관을 말하며 또한 이 기관을 통해서 발생되는 행동과 결과를 말하는데, 곧 정신세계가 초월된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고공중의 세계는 오온의 존재 자체가 초월된 세계로서 생로병사나 번뇌망상이 전혀 없는 영원한 열반의 세계를 말한다.

无眼耳鼻舌身意 无色聲香味觸法
无眼耳鼻舌身意는 수온을 말하는 것으로써 사람의 각 기관을 말하고 无色聲香味觸法은 그 상대적 요소를 말하고 있다. 곧, 육근과 육경을 말하는 데 시고공중의 세계에는 이 모든 것들이 없다는 말이며 이것은 육신의 세계나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해탈된 부처님들이 계신 극락세계는 육신의 세계가 아닌 마음의 세계요, 零의 세계이며 열반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无眼界 乃至 无意識界
시고공중의 세계를 말씀하고 계신데 안계는 육신의 눈으로는 불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육신의 눈은 보이는 것이 한계가 있으며, 시작과 끝은 공간적인 한계를 말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세계는 근원적 위대함이다. 근본의 영원성은 시작과 끝이 하나의 원리이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이 세상의 한정된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육신의 세계가 바로 번뇌망상과 육신의 고통이 계속되는 현세를 말한다.
의식계는 태어나서 자라면서 배운 모든 지식을 총칭하는데, 시고공중의 세계는 이러한 것이 아닌, 마음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마음이란 중생들의 마음이 아니고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 즉, 해탈된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고공중의 세계는 보이는 것으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계가 초월된 深深寂靜(심심적정)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无无明 亦无无明盡 乃至 无老死 亦无老死盡
위의 말씀은 처음인 무명과 끝의 노사를 말씀하셨고 乃至로써 이들 사이의 10가지 인연을 생략함으로써 12支인연을 설명하셨고 이는 곧 반야를 설명하고 계시다.
12支란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이다. 즉 이 12支 연기법이 아니며 또한 12가지 연기법 모두가 다하는 일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위의 내용을 풀어서 직역하면

是故空中
반야의 세계는

无无明 亦无无明盡
无明이 아니며 또한 无明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行 亦无行盡
行도 아니며 또한 行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識 亦无識盡
識도 아니며 또한 識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名色 亦无名色盡
名色도 아니며 또한 名色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六入 亦无六入盡
六入도 아니며 또한 六入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觸 亦无觸盡
觸도 아니며 또한 觸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受 亦无受盡
受도 아니며 또한 受가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愛 亦无愛盡
愛도 아니며 또한 愛가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取 亦无取盡
取도 아니며 또한 取가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有 亦无有盡
有도 아니며 또한 有가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生 亦无生盡
生도 아니며 또한 生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无老死 亦无老死盡
老死도 아니며 또한 老死가 다하는 일도 없다.

무명(혼돈)은 결코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고 활화산처럼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것도 목적을 갖지 않은 무목적 활동이다. 그 활동이 12인연인 行으로서, 닥치는 대로하는 행동.행위이다. 본능도 그 하나이다.
성본능이 강요하는 성행위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이 母胎에 임신한다. 나는 <부모은중경>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남은 무명을 인으로 하고 부모를 연으로 하느니라"하는 구절에 생각을 깊게 한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연의 불가사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이 인이 되어 어머니의 태 속에 깃든 생명체의 識과 名과 色이 성장해서 六入이 발달, 이른바 五體 六根이 발달해서 이윽고 出産하게 된다.
신생아는 한동안은 다만 사물을 접촉할 뿐이지 차고 덥고 괴롭고 즐거움을 식별하지 못한다. 촉각밖에 없으므로 십이연에서는 觸이라 부른다. 사물을 접촉해서 차고 덥고 괴롭고 즐거움을 느끼는 감각이 작용하게 되는 것을 受라고 한다. 受의 감각이 발달함에 따라서 빠르게도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찾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므로 그것을 愛라고 한다. 욕심이 생기면 자기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당연히 자기 것으로 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이것을 取라고 한다. 取하고 싶은 생각이 왕성해지면 반면에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싫은 것을 멀리하거나 버리거나 하는 선택의 혼미가 일어난다. 그것을 有라고 한다. 선택하는 동안에 차츰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고 에고의 정도 일어나서 걱정이나 분노나 슬픔 등의 고뇌가 생긴다. 이것이 生이다. 생에는 생존이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고뇌와 생존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생존하게 되면 당연히 고뇌와 함께 늙고 고뇌와 함께 죽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老死이다.

无苦集滅道
시고공중(반야의 세계)에는 사성제가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사성제는 무명의 중생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성불하여 열반에 이른 부처님들에게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无智亦无得 以无所得故
시고공중(열반의 세계)은 알아야 할 것도 얻을 것도 없는데 그 이유는 현상세계의 물질이나 정신세계의 지식 등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智란 부처님의 지혜를 말하며 得이란 불자들이 취해야할 열반의 세계를 말한다. 이 말은 진정한 불자들이라면 신앙생활의 목적이 바로 이 두가지 소망이어야 하며 이러한 뜻도 목적이나 집착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보리를 알려는 것과 열반에 이르려는 것이 마음에 욕심을 가지고 얻으려 한다면 안된다는 말이다.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无가碍 无가碍故 无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境涅般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故
모든 중생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타행을 행하고 계신 부처님들을 말한다. 승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頓悟漸修(돈오점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頓悟漸修(돈오점수)란 열반의 세계에서 점진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자재보살이 어린아이라면 보리살타란 성장된 어른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관자재보살이 다시 보리살타가 되어 이타행을 행하였을 때에 비로소 완성된 부처님으로써 구경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리살타 부처님께서 구경열반에 이르게 되면 그때에 비로소 반야의 실체인 삼세제불로 나타난다.

心无가碍 无가碍故 无有恐怖
보리살타가 되신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꺼리낌이나 걸림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마음에 걸림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다.

遠離顚倒夢想 究境涅般
잘못된 생각과 세속으로부터 뇌리 속에 쌓아놓은 잘못된 인식들을 멀리 떠나 보낸다는 뜻으로써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모든 생각을 소멸한다는 뜻이다.
遠離顚倒夢想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배우고 익히고 쌓은 모든 것과 잘못된 신앙생활을 통해서 잘못된 것들이며 또한 깨닫지 못한 세속의 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머리 속에 쌓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즉 비진리를 진리로 착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의 실체를 분명히 알아야 하며 전도된 모든 몽상을 하루속히 멀리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전도된 몽상자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올바른 생각 혹은 참 진리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과 또 전도된 몽상의 實體가 바로 포기할 수 없는 自身의 存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遠離顚倒夢想이란 결국 虛像인 自身의 존재를 포기하라는 말이다. 이렇듯 보리살타 부처님의 遠離顚倒夢想은 이 世上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버렸다는 말이며 그 結果 究境涅般으로 入聖했다는 말이다.
究境涅般이란 無住處涅槃 이라고도 한다. 깨닫기 위한 過程에서의 頓悟漸修요 깨닫는 것이 완성되면 즉 眞理의 눈을 뜨면 바로 頓悟頓修이다. 頓悟頓修가 된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세계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 다시 頓悟漸修의 過程이 반듯이 있어야 究境涅般의 完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열반과 究境涅般이 다른 것이며, 관자재보살과 보리살타부처님이 다르며 삼세제불 부처님도 상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究境涅般은 완성된 세계를 말하는 데 이것을 가리켜 반야의 세계 혹은 반야의 경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약三菩提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前生, 現生, 來生의 三世諸佛이란 永遠 前부터 永遠까지 항상 변함없이 存在하고 있는 佛을 말한다.
衆生이 解脫이 되면 즉시 无上正等正覺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성장에 의해서 无上正等正覺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衆生이 解脫하여 眞理에 눈을 뜨면 觀自在菩薩이요, 觀自在菩薩이 원리전도몽상이 되어 구경열반에 들어가면 보리살타가 되는 것이며, 보리살타 佛이 득아뇩다라삼약삼보리가 되면 삼세제불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삼세제불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 최고의 佛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며,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이루워진다는 것을 釋迦牟尼佛께서는 반야심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무명의 중생들을 포함한 이 우주 삼라만상 모두가 반야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도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즉 무명의 세계도 열반의 세계도 반야가 주관하고 있다는 말이다.

得阿뇩多羅三약三菩提
佛의 최고 경지로서 무상정등정각이라 한다.
삼세제불께서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와 같이 삼세제불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에 언제나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고 계신 분으로써 시공을 모두 초월하여 계신 최고의 佛이며 이 분을 곧 반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无上呪
是无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无上呪 是无等等呪
삼세제불께서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무상정등정각의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으시므로 般若智가 완성되었다. 즉 반야의 본체가 되신 것이다.
이렇게 반야의 본체가 되신 삼세제불의 말씀을 가리켜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无上呪 是无等等呪 라고 말씀하고 있다.
반야는 是大神으로써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절대신이고, 또한 반야는 시대명주로써 한없이 맑고 밝은 빛이고, 또한 반야는 시무상주로써 이 우주 안에 반야바라밀다를 능가하는 어떠한 진리도, 말씀도 없고, 또한 반야는 시무등등주로써 이 세상에서 이 반야바라밀다와 비교할 어떠한 신도, 진언도 없다는 말이다.
이 4종류의 주의 형용은 經題인 '마하반야밀다'로 통한다. 다시 말해서 大는 摩訶의 보편성을 明은 반야의 지혜의 平明함을 무상은 반야바라밀다의 아득함을, 그리고 무등등은 마음의 절대성을 칭송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진실인 주는 번역불가능
반야바라밀다의 수행, 그 자체가 훌륭한 주 그 자체이어서 진실하여 거짓이 아니다.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반야바라밀다 는 중생들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소멸해 주시는 능력이다. 能除一切苦나 眞實不虛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이 우주 삼라만상 中에 반야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釋迦牟尼佛께서도 처음에 해탈을 위해 정진수행을 할 때에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 것이며, 그 결과 度一切苦厄을 하여 관자재보살이 되었다고 반야심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반야는 진실하시며 그 안에는 거짓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반야 본체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진실 뿐 거짓이 없다.

故說般若波羅蜜 卽說呪曰
阿帝阿帝
波羅阿帝
波羅僧阿帝
菩堤娑婆訶

故說般若波羅蜜 卽說呪曰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진리를 설명하시고 佛께서 설하신 진리와 바램을 말씀하시길

阿帝阿帝 波羅阿帝 波羅僧阿帝 菩堤娑婆訶
阿帝阿帝란 佛께서 무명의 중생들에게 바라시는 요지는 중생들 모두가 佛과 같이 성불하여 구경열반에 이르는 것이요, 이를 위해서는 波羅僧阿帝 즉, 자리와 이타 두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자리란 상구보리를 통하여 그 자신을 구원하여 佛과 같은 생명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요. 이타는 상구보리로 말미암아 구원의 완성을 이룬 자들이 佛의 자비심으로 이웃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하화중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을 이루었을 때 이러한 사명을 다한 佛께서 비로소 구경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며 삼세제불이 되는 것이다.
앞의 아제는 상구보리를 뒤의 아제는 하화중생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얻어진 진리는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