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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인신매매로 중국 남자들의 성노리개로 전락

마음정원(寂光) 2007. 8. 21. 11:49

탈북여성, 인신매매로 중국 남자들의 성노리개로 전락

 

미국이 탈북자들에 대해 난민 수용을 허용했다. 그 첫 번째 케이스로 6명의 탈북자가 미국땅을 밟자 전세계인들은 그들의 입을 통해 탈북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태를 듣게 됐다. 인신매매로 인해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기 일쑤인 탈북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태를 담았다.

10대 소녀가 40대 노총각에게 팔려가기도

기본적인 삶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생지옥과도 같아

“한창 커야 할 16~17세 여자 아이들이 남자들의 성 노리개가 되고, 또 정신질환자나 노총각의 여자가 되어야 하나요? 발이 묶이고, 달아날까봐 옷도 못 걸치게 하질 않나 혹시 달아나다 붙잡히면 오토바이에 손을 묶어 개처럼 질질 끌고 온 동네를 다닙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그렇게 살고 있을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잠들 수가 없습니다.”

지난 3월 23일 유럽의회 탈북자 청문회에서 증언한 탈북자 이신씨(여·28)의 항변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탈북 여성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어렵게 탈북해 중국 등지에 머물며 한국을 비롯한 제3국으로의 망명을 꿈꾸는 탈북 여성의 대다수가 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지속적인 탈북자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두리하나선교원의 천기원 목사 역시 “탈북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80~90%가량의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 강간 등 성적 인권 유린에 노출되어 있지만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라며 탈북자 문제에 대한 여론 환기를 강조했다.

두리하나선교원 측이 제공한 현지 조선족과의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헤이룽장성의 한 시골마을의 경우 15가구 가운데 12가구의 노총각이 탈북 여성을 ‘돈을 주고 사서’ 살고 있다고 한다. 탈북자 이씨의 이야기처럼 탈북 여성들의 상당수가 중국 현지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농촌 지역의 노총각이나 정신질환자 등 정상적으로 결혼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팔려가고 있다. 심지어 한족의 성적 노리개나 매춘 시장으로 팔려가는 여성도 있을 정도. 이것이 2006년 탈북 여성들의 실상이다.

두리하나선교원을 비롯해 탈북자동지회 등 여러 탈북 관련 단체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러한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며 탈북자 지원에 대한 여론 환기에 앞장섰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이런 현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미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 탈북자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탈북 여성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 탈북자 6명이 미국 정부로부터 난민 신분을 얻어 미국에 입국했다. 미국 의회에서 북한 인권법안이 통과된 2004년 이래 탈북자가 미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난민 신분를 인정받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번 사안은 탈북자 미국행의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미국 입국에 성공한 6명의 탈북자 가운데 4명은 여성이다. 이들의 미국행을 도운 두리하나선교원이 공개한 이들의 편지는 하나같이 가슴 아픈 사연으로 채워져있다.

우선 가장 나이가 어린 신찬미씨(가명·여·20)는 스무 살의 나이에 벌써 네 번의 결혼 이력이 있다. 신씨는 여러 번의 인신매매로 산둥 지역으로 팔려갔으나 다행히 오빠 신요셉씨(가명·32)를 만나 함께 미국행에 올랐다. 현재 중국에서 들끓고 있는 중국 인신매매 조직은 가만히 앉아 탈북 여성을 기다릴뿐 아니라 간혹 북한으로 들어와 북한 여성들을 속여 중국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또 다른 탈북자 데보라씨(가명·여·25)는 북한에 들어온 중국 브로커의 말만 믿고 탈북을 했지만 유부남, 그것도 15세 연상의 남자에게 팔려간 경우다.

같이 미국에 도착한 탈북자 나오미씨(가명·여·34) 역시 비슷한 상황. 북한에서의 어려운 삶에 지쳐 탈북해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집으로 가고자 한 나씨는 자신이 일하던 담뱃가게에서 만난 한 중국인에게 친척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가 바로 인신매매범이었다는 것을 탈북한 후에 알게 됐다. 나씨는 엄청난 고생을 감수해야 했고 또다시 목숨을 건 탈북을 시도해 결국 미국으로 향하게 됐다.

두리하나선교원의 이경희 간사는 “성적 학대도 문제지만 거듭된 가정의 해체가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인신매매 등으로 인한 성적 학대가 탈북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요즘 탈북자는 대부분 힘겨운 탈북 과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건강한 20~40대이다. 우선 이들은 탈북하는 순간 성장기를 함께 보낸 북한 가정과 결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가정의 해체이다.

중국에 도착한 이후에는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인신매매 일당에 의해 이리저리 팔려 다니나 보니 그때마다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또 해체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것. 어차피 돈을 주고 탈북 여성을 산 남성에게 가족관계를 느끼는 것은 어렵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한 모정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는 이번에 탈북한 이들 가운데 최고령자인 한나씨(가명·여·36)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에서 인민학교 교사이던 한나는 애초부터 탈북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딸의 운동복 살 돈이 필요해 중국에 장사하러 갔다가 인신매매 일당에게 붙잡힌 것. 딸을 위해 국경을 넘었지만 결국 다시는 딸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신매매 일당에 의해 중국 남성에게 팔려간 한나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 계속되는 중국인 남성의 구타가 힘겨웠지만 아이를 위해 버티려 하던 한나는 결국 그 집을 탈출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구타가 반복되었기에 그녀는 아이마저 포기하게 된 것. 다행히 한나는 천 목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이미 그는 북한과 중국에서 낳은 두 명의 아이를 모두 잃고 말았다.

다음은 미국에 입국한 6명의 탈북자들이 두리하나선교원 측에 보낸 편지들 중 세 명의 것을 발췌한 것이다. 암흑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던 탈북자들의 삶과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사연들이다.



성명 : 신찬미(가명)

나이 : 20세

고향 : 함경북도 회령시

저는 2002년 10월 23일 조선으로 넘어갔다가 10월 27일 다시 중국으로 탈북했고 3일 후인 10월 30일에 셋째 오빠와 사촌언니가 두 살 난 아기를 등에 업고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오빠 그리고 사촌 언니와 아기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바깥 날씨는 너무 추웠고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져내려 역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편안할 것 같아 들어갔는데 갑자기 아기가 울자 한 노인이 공안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잡혔습니다. 그후 북송된 저는 2002년 12월에 또다시 중국으로 탈북해 무사히 강을 넘었고 친척을 찾아가는 큰길에서 나이 50세나 되는 조선족을 만났는데 그는 제 옷차림으로 조선인이라고 짐작하고 자기를 따라오지 않으면 공안에 신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두려워서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그 집 창고에서 7일간 먹고 자고 하면서 숨어 지내다가 남자 2명과 함께 연길 시내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저를 데리러온 사람 중에 서른 살쯤 된 총각이 있었는데 그가 저를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저는 목욕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그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다음날 그 남자는 친구들에게 제가 처녀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타국에서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남자 하나 소개해줄 테니 시집가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도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제가 거절했더니 그 사람은 공안에 전화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사람의 소개로 2003년 1월 17일 한 이북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아주머니가 한 남자를 소개시켜주었고 저는 중국 돈 5천원에 팔려갔습니다. 저는 죽어도 그와 살지 못할거라는 생각에 나무를 하다가 도망 쳐서 한 노인의 도움으로 저를 팔아먹은 북한 아주머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번보다 더 좋은 남자가 있으니까 시집을 또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거절하자 또 공안을 부르겠다고 협박하고는 저를 산동성에 있는 서른일곱 살 먹은 한족 남자에게 팔았습니다. 그 남자에게 집으로 보내달라고 사정을 하자 그 사람은 저를 청도에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있던 교회로 갔는데 그곳에는 저를 도와주던 한국 분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를 팔아먹은 그 여자에게 전화를 해 또다시 그녀에 의해 흑룡강성의 회족 남자에게 세 번째 시집을 갔다가 어렵게 셋째 오빠와 전화 통화가 되어 목단강을 건너 심양교회에서 오빠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오빠는 북경 대사관을 거쳐 한국으로 가려고 시도하다가 그만 체포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서너 번의 교화소 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슴 터지는 장면들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너무나 배가 고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길 옆에 심은 생강냉이 한 이삭을 훔쳐 먹었다는 죄로 오른손 넷째 손가락의 뼈가 다 부러지도록 맞아 지금도 뼈가 부러졌고 발을 내밀라고 해서 발을 내밀었더니 구둣발로 발을 사정없이 밟는 치욕스러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저의 왼쪽 엄지발톱은 시퍼런 멍이 들고 발톱이 모두 빠졌습니다. 그리고 강냉이 한 이삭을 입에 넣고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손으로 뒷머리를 지고 앉아 있게 하고 회초리로는 다리를 사정없이 때려서 다리와 발등에 상처가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 교화소에서는 하루 세 끼 통 강냉이 쌀에 겨가 절반이나 섞인 밥에 두부콩을 50알 정도 넣고 밥 찌는 손기계로 하나하나 찍어놓고 교화인들에게 배식을 합니다. 반찬은 없고 국이 있는데 말풀을 뜯어다가 대충 물에 헹군 다음 그것으로 국을 끓여줍니다. 그곳에서는 벼농사를 짓는데 교화인들이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개구리를 잡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펄펄 끓는 물에 넣고 숟가락 뒤로 개구리 머리를 누르고 있다가 죽으면 그것을 씹어서 먹습니다.

저희 집은 온 가족이 탈북하고 사회적으로 문란한 집이라고 하면서 국가에서 무상 몰수하라고 하여 돈 한 푼 못 받고 국가에 바쳐야 했습니다. 결국 거리에 나앉게 된 어머니는 큰어머니 댁으로 가시고 저는 2006년 1월 23일 다시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중국으로 데려다준 사람은 룡정시 조선족에게 중국 돈 4천원을 받고 저를 넘겨주었고 3월 2일 산동으로 팔려가 살다가 청도에 있는 오빠와 연락이 되어 천 목사님을 만나 이렇게 자유를 찾았습니다.

성명 : 데보라(가명)

나이 : 25세

고향 : 함경북도 청진시

제가 북한에 있을 때는 키도 크고(171cm) 얼굴도 예쁘게 생겼다고 해서 인민무력부 5과라는데 뽑혀서 평양에 올라가 조선인민무력부 대장들인 현철해와 박재경도 만나보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과오를 범하고 출당된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끝내는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저는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준다는 중국 브로커의 말만 믿고 중국으로 왔다가 저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이나 많은 유부남의 여자가 됐습니다. 그는 아내가 돈이 많아서 일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어요. 내 인생의 첫 남자가 이런 협잡꾼이라는 게 너무도 억울해서 저는 며칠 동안 엄마를 부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그 사람은 내가 도망갈까봐 외출도 못하게 하고 매일 시시각각 집으로 전화를 해서 내가 집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어쩌다 전화를 안 받으면 그 즉시로 달려와서 따지고 야단치고 했어요. 그리고 자기한테는 경찰 친구가 아주 많고 또 직접 대면한 적도 있어요. 만일 내가 달아나면 잡아내는데 한 시간도 안 걸린다면서 잡히는 날에는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어요. 저는 말도 통하지 않아 벙어리로, 그냥 그 사람의 심심풀이로 힘겨운 날을 보내야 했어요.

목사님 어떻게 저를 도와줄 수 없을까요.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성공해서 자유를 찾은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눈물만 나네요. 목사님이 도와주시면 은혜 잊지 않고 꼭 보답할게요. 기회만 주신다면 목사님 실망시켜드리지 않을게요. 정말 하늘에 대고 맹세합니다.

성명 : 나오미(가명)

나이 : 34세

고향 : 함경북도 청진시

저는 1979년 OO인민학교에 입학하고 4년 교육을 받았으며 그 뒤로 6년제 고등중학교 교육을 받았고 1989년 ○○여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회령 구두공장에서 재봉공으로 일했고 1995년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공장을 그만두고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에서 왔다는 한 손님을 음식 가게에서 담배를 팔며 알게 되었고 그에게 “친척을 찾으려 하는데 대가는 후하게 주겠다”라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도움으로 탈북한 후에야 그가 인신매매범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흑룡강성 오상시의 룡봉산향이라고 불리는 산골마을의 조선족 집에 돈 4천원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집간 집은 빚이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나마도 인정이 너무 박하고 저를 4천원이라는 인민폐에 데려왔다는 이유로 고된 농사일로 인해 얻은 병도 치료해주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라는 사람은 병이 들어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급기야 저는 집을 나왔고 어렵게 찾은 친척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혼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잉태해 8개월이 지났는데 어느날 밤 갑자기 공안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제가 거짓 증언을 한다며 위협하고 배를 걷어차며 심문했습니다. 저는 배 안에 있는 생명을 봐서라도 1년만 견지해달라고 호소해 4천원의 벌금을 내고 1년이 되면 다시 송환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난 지 6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경찰이 들이닥쳐 아들을 안아보지도 못하고 끌려갔습니다. 파출소에서 한족 여 검사에게 떠밀리어 화장실에서 몸수색을 받았습니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몸 구석구석까지 훑었으며 심지어는 생식기 검사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인민폐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후 교도소로 이송됐는데 그 감방 안에는 스무 명이 넘는 여인이 갇혀 있었고 감방에 들어온 시간은 12시도 훨씬 지났는데 밤새도록 계속 잡혀 들어오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끝없이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북송되었고 보위부에 들어가자 또 몸수색을 했습니다. 옷을 전부 벗기고 겨드랑이며 입 안이며 콧구멍, 귀안, 머릿속과 발바닥 심지어는 벽을 마주한 채 손을 뒷짐지고 일어섰다 앉았다를 30번이나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인민폐를 감추었다면 스스로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감방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가까스로 비집고 앉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는 아침 5시에 기상 나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다리를 포개고 포갠 다리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하루 종일 앉아있는 것입니다.

또 행동이 조금이라도 늦거나 보고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은 나무 몽둥이 아니면 쇠관으로 된 몽둥이로 맞았습니다.

감방에는 다섯 살 난 어린아이들부터 여든의 노인도 있었지만 모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노인들은 몸이 불편해 행동이 굼뜨거나 어디가 아파 움직이지 못해도 꾀를 부린다고 하여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신병 간수들의 발에 차이고 몽둥이로 얻어맞곤 했습니다. 감방 안에서 주는 식사란 새까맣게 타 붙은 통 강냉이 누룽지를 소금물에 말아 세 숟가락 정도나 되게 얼구어서 주었고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모기소리 만큼이라도 코고는 소리가 들리면 기상을 해야 함으로 단 하루도 편하게 잠든 날이 없었습니다.

그후 저는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왔습니다. 하루하루를 쫓기며 살아도 중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도무지 삶의 기회를 주지 않을 뿐더러 살아갈 의미마저 없게 만들었습니다. 후대를 위해서도 열심히 일하고 노력의 대가를 받고 싶지만 이 소박한 꿈마저도 이 사회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 꿈을 하느님께서 꼭 이루어주실 거라고 마음속으로 믿으며 끝없이 기도를 드립니다.

글 / 신민섭(일요신문사)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기사제공 ]  레이디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