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마음

깨달음은 본래 있던 것을 아는 것일 뿐

마음정원(寂光) 2007. 6. 4. 11:27

마음과 느낌을 분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본래 분리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그저 현실에 따라 이 자연스러운 분리를 아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진실에 대한 무지에 의해 그것들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붓다는 우리에게 명상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상 수행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저 지식을 통해 아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수행하여 일어난 지식은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은 우리 마음의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마음은 이 지식에 집착하고 유지하려 합니다. 왜 이 지식을 유지하려 하는 것일까요? 그저 그 지식을 잃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 지식을 잃고는 슬퍼합니다!

 

진정으로 안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습니다. 사물이 어떤 것인지를 알며 우리 스스로를 잊지 않게 됩니다. 아프게 되더라도 그 안에서 혼란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수행은 마음과 그 느낌에 대한 수행입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좇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흡은 일하는 도중에도 계속됩니다. 자연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알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저 내면을 명확히 보기 위해 노력하세요. 명상도 이와 같습니다.

 

Sati를 유지한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지 그 일이 바로 계속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명상할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저 수행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모두 몸의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마음만 일정히 유지하면 Sati를 유지할 수 있으며 Sati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항상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서 있든, 앉아 있든, 걷고 있든, 누워 있든, 시간은 많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시간을 어떻게 적절히 이용하는지 잘 모를 따름입니다.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느낌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느낌은 느낌일 뿐이며, 행복은 행복일 뿐이고, 불행은 그저 불행일 뿐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것일 뿐입니다. 왜 거기에 집착하나요? 마음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낌과 마음을 분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바라보면 마음은 평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온은 무지에 의한 도피가 아닙니다. 마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지만 깨닫고 있습니다. 마음은 무지하기 때문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진실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과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과 정신적인 인상을 잘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정신적 인상을 잘 다룰 수 있으면 이 세상을 잘 다룰 수 있게 됩니다. 붓다는 세상의 모든 곤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붓다는 곤경을 잘 알고 있었고 곤경이 아닌 어떤 것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붓다가 가르치신 담마는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자세에 있던지 우리는 Sati를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명상을 하며 앉아 있을 때에도 Sati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온을 확립하고 정신적 에너지를 일구기 위해 명상을 합니다. 어떤 특별한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찰 명상은 Samadhi의 상태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 아잔 차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