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창작

말과 삶 / 언어철학

마음정원(寂光) 2007. 2. 1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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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특강 자료 <언어철학>
말 과 삶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므로 자신의 삶을 창조한다.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오면서 처음 말과 같은 첫울음을 우는 것도 자기 존재를 확인 시키는 말의 전달수단이 된다. 그런데 이 말이라고 하는 문제를 우리는 너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 왔다.

말이라는 것을 무관심하고 그저 무책임하게 다루어 온 것이다. 이러한 언어 적대관계가 왜 무엇 때문에 우리들 관심밖으로 벗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말과 삶이 갖는 언어철학적 객관성과 말이 우리 삶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다 심도 깊이 연구해볼 때가 되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전통적인 철학과 교육학, 과학이 갖는 언어적대관계는 우리의 삶과 문화를 외래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으로 비극적이지 않을수가 없다. 언어철학은 이러한 언어과학, 언어교육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다시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여기에서 언어적대관계를 갖고 있는 현상들이 어떤 것이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언어의미로부터 시작하여 언어와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말이 모두 거짓말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말은 언어와 일치하는 행동을 하라는 언행일치를 믿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일이다. 좀더 깊이 들여다 보면 쓸데 없는 말들로 공론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동양철학에서도 언어적대관계는 나타난다.

불교사상의 경우 道理나 實相이라는 것은 離言이라 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근본적 진리나 본체가 언어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고 또 언어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孔子나 老子의 경우 그 제자들에게 많은 삶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으면서도 진리는 언어적인 표현 이전의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有名萬物之母 [유명이 만물의 어머니]라 하면서 無名天之始 [무명이 하늘의 으뜸]이라 했다.

또한 중용에서 보면 하늘 위의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다고 하는가 하면 이것은 형이상학적 사실이 언어적 표현 뿐 아니라 감성적인 이해를 초월한다고 주창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효스님 역시 인간존재의 본체는 말이나 모양에 담겨 있지 않고 마음의 본체도 명상을 초월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전통적인 철학들이 언어의 우상이나 이언이나 무명이나 무성이나 초명상이나 하는 식으로 언어적대관계를 표현해 왔다. 철학 뿐만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과 교육학도 언어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확실한 논리는 언어를 통하는 것 보다 기호를 통해서 이룩되어야 믿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 교육 현장을 보자. 말 보다는 실물을 가르치라 하고 있지 않는가? 언어보다 실물 위주의 교육을 앞세우는 언어적대관계가 자본주의의 비극적 산물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의 현상은 다음기회에 말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왜 이러한 언어적대관계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몇가지 이유를 먼저 알아 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언어의 의미가 늘 불확정하고 또 분명하지 못하다고 철학가와 과학자, 교육가들이 느꼈기 때문이다. 보다 엄격하게 말해서 思惟의 전개를 말하기에는 언어가 불완전한 표현의 도구라는 것이었다.이것은 동일한 언어가 때로는 여러가지 의미들을 갖는가 하면 또 동일한 개념을 위하여 여러가지 언어 표현들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편경과 인식 때문이었다.
인간의 사유가 말에 의해 잘못 지배되고 있다는 논리이다. 인간의 언어는 마술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言神思想]언어숭배사상이나 [言靈思想]언어영혼사상 같은 것이다.

무속신앙이나 민속종교들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이 언령사상은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는 인간이 볼수 있는 세계의 사물들과 그 대비에 따라 발전해 왔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사물들로부터 유추해서 표현하는 성격을 언어가 가지고 있음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 가운데 네가 어찌 내 마음을 아느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주체의 깊이가 없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이나 형이상학적 체험을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들은 언어가 무엇을 표현함에 있어 늘 일정한 틀에 고정시켜 말해야 하는 언어적대관계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러나 태초에 말씀이 먼저 있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언어와 더불어 인간은 비로소 자기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우는 그 첫 울음 소리로부터 언어의 형식은 인간의 자유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해방의 도구였던 것이다. 이 절대적인 힘의 원천이 언어이며 이 언어가 삶을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언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관심을 갖는 언어비판 운동의 일환으로 언어철학 운동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언어철학 운동은 언어의 본질에 따른 철학적 과학적 교육적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언어의 기능에 있어 독일 철학자 하이덱거[heidegger]는 그의 후기 철학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를 인간이 그 속에 사는 집에 비유한 것으로부터 언어적 표현 방법을 떠날 수 없는 모든 학문들이 그 기본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덱거의 이 말은 한편의 시에서 말하는 이른바 시의 한 구절에 불과할 뿐이었다.

현대철학에 이르면서 언어가 언어철학으로 자리 매김하기까지 철학운동은 없었다.

하이덱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 아니라 그 집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며 우리들 자신인 것이었다. 언어의 인간화, 언어의 사물화로부터 이루어지는 언어는 곧 인간 그 자체이며 이러한 우리 인간의 사유와 사상과 삶에 있어서 언어의 창조적인 기능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삶과 사람됨이 새로운 언어철학의 기본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문제인 까닭이며 이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이제 새로운 세기의 언어철학적 상대성원리가 새롭게 대두하고 있다. 세계를 언어의 광장이라 한다면 이 언어의 세계상은 상대적 에너지를 갖게 되고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영어는 엥그로색션이라는 그 고유의 세계상에서 출발할 것이며, 독일어는 독일민족의 전통적인 세계상을, 우리말은 우리 겨레의 세계상을 가져야 할 일이다.

이 언어의 세계상은 우리의 감성적인 지각과 감정적인 표현과 정서적인 느낌과 이성적인 사유를 우리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하는 우리 삶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의 언어는 그러므로 우리의 얼이며 정신이다. 세계의 언어광장에서 우리 언어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의 차이는 독창적인 성격의 차이를 가져온다.

이 세계는 동일한 언어권을 형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동일한 성격과 동일한 얼, 동일한 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언어철학 운동의 상대성원리인 것이다. 이 원리는 상대성을 인식할 수 있는데서 비롯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구 기술문명의 지배 아래 살면서 번역문화의 혼탁속에서 제정신을 찾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살아왔다. 유럽정신이라 하는 제약된 논리와 제약된 과학이 정당한 세계인줄 착각하며 살아 왔으며 형상과 질량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가 유일한 삶의 대안인 것으로 착각해 왔다. 정신과 자연이라는 이원론에 휩쓸려 살아 왔으며 陰과 陽, 理와 氣라는 이원론만이 숭상되는 세계상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언어가 다르듯이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은 그 삶의 방식과 내용과 성격과 구조들이 분명 다른 것이었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것이 더 편리한지도 아직은 결론지을 때가 아니다.
현대 이론 물리학이 당면하고 있는 과학의 개념들도 서구 중심으로 발전되었기에 우리에게 부적당한 경우는 허다하다.
수학도 마찬가지이다.

수학의 기본공리들과 기본 원리들 속에 아직도 분석되지 못한 언어가 숨어 있음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언어의 예술이라 하는 시문학도 조각이나 미술, 음악에도 언어의 전제는 배제될 수 없다. 이것이 시대마다 그 민족마다 예술적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말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영어보다 오히려 우리 말에 있어 표현의 한계를 느낀다는 말을 자주 들을 때 마다 필자는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때가 있다. 영어로 표현하면 쉬운데 우리말로 표현하려니까 더 어렵다고 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수치이다.

말과 삶에 있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우리말의 논리는 술어를 중심으로 한 다원적인 언어구조를 갖고 있다. 인도 유럽 말은 주어와 술어인 이원적 구조인데 우리 말은 주어도 술어를 수식하기 위해 필요할 때 얼마든지 덧붙여 진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시나 대화 속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잊어버려야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 한다.

조병화 시인의 하루만의 위안이라는 시에서 보듯이 나와 너와 우리도 사람도 없는 시가 이루어져 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는 님이나 당신이라는 말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주어를 잊어버리고 시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쁜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우리들이 대화를 하게 될 때 외국인들은 대화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막상 대화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은 아주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요즘 잘 보이지 않던데.....
아, 어딜 좀 다녀 와서.....
그래? 재미 있었어?
응, 잘 다녀 왔다는 생각이야.

우리 말이 동작이나 그 양상을 표현하는 술어 중심이라는 것은 변화하는 양상을 그대로 이해하고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사고방식을 발전시켜 왔음을 알수가 있다.
우리말이 얼마나 현상학적인가 하는 것이다.
인도나 유럽 말이 동일성을 추구하는데 비해 술어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말은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 언어의 사고방식이 직관적이고 직선적인 추리보다 윤회적인 추구를 더 선호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과 윤회적인 사상의 언어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구 중심의 문화 속에 편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것 보다 분노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는 친구를 만나면

어떻게 지내니?
응, 그럭저럭.
야 너 그럼 아직도니?
글쎄 잘 되는 것이 없어서.
허긴 그럴수도 있지 뭐.
응, 이러면서 사는 거지.
그래 너무 서둘지 마
응 그래 고마워.

이러한 말들이 오고가도 대화를 하고 있는 너와 나,
그리고 대화를 엿 듣는 사람도 어떤 내용의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말의 구조가 상관적인 대화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말에 있어 접미사가 참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접미사에 따라서 말이 주어가 되고 목적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저 분은 얼굴이 아름답다.
저 분은 얼굴만 아름답다.
저 분은 얼굴도 아름답다.

우리 말의 접미사는 말의 방향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려 놓기 때문에 말을 듣는 사람은 이야기가 완전히 끝날 때 까지 차분하게 듣고 있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빨리 빨리 성격도 이 접미사의 언어영향 때문이다.

그리고 듣고 보니까 그 이야기는 맞지 마는
당신 태도에도 문제가 없는건 아닌데요? 하는 말 가운데 이 마는 이라는 접미사가 맞다가 되는 것이 아닌만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한다.
우리말의 이러한 구조는 변화하는 현상에 대한 다양한 판단을 가능케 하고 있다.

또한 우리 말 가운데 우리 말의 이중성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 그렇지만 하물며 뿐만 아니라와 같은 언어 씀씀이에 따라 말의 앞 뒤가 전혀 새롭게 바뀌고 변화하는 구조적 양상을 가지고 있다. 흔히 정치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고 또 토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러한 말의 양상을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인의 말은 늘 거짓말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리고 토론자들의 말 또한 이러한 유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어떤 토론자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서 그런데 그러나로 시작이 되면 정반대의 토론으로 진행되기 쉽상인 것도 우리말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말놀이에 다름 아닌 말의 수사적 혼돈과 혼란에 대한 진실한 말 씀씀이는 다음 기회에 다시 논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우리말의 삼차원적 시간관을 의미하는 것 부터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말은 인도나 유럽말처럼 일차원적 시간관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일차원적 시간관과 삼차원적 시간관의 차이를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애써 외래화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의 특징을 우리 스스로가 말살하고 있음이다. 일차원적 시간관은 물리적인 시간관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려서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는 것이 일차원적 시관관인 것이다.
현재도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 지고 남는 것은 순간 뿐이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쾌락만 난무하고 있다. 순간을 즐기자는 한탕주의나 쾌락주의 사고방식에 우리의 삼차원적 시간관이 함몰되어 가고 있음이다.
우리말의 시간관이 삼차원적 둥근 원과 같은 시간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의 사상과 직결된다. 일컬어 원 사상이라는 이 시간관은 둥근 원의 아래 반원은 과거이며 위의 반원은 미래이며 이 원의 직경으로 현재를 둘러 싸고 있는 삼차원적 시간관이다.

우리말 속에 보이는 말 뜻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적으로 살아있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관관은 삼차원적인 구체적인 삶의 논리와 이에 따른 구체적인 시간관을 갖는다.
이제 이쯤에서 우리 언어가 갖고 있는 말과 삶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의 삶 가운데 언어는 존재의 집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결정되고 구체화 되는 형식임을 언어철학은 말하고 있다.
말이란 우리 삶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삶을 움직이는가 하는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말이란 결정을 뜻한다.

언제나 가변적인 현실이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통해 구체적인 형식과 성격과 성질로 변화하게 된다. 우리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때 이 진단 자체가 질병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말 가운데 병명이 확인되는 순간 그 환자의 상황은 변할 수 밖에 없는 경우와 같다. 의사의 말에 따라 환자의 어디가 어떻게 병들었는지 알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해 진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과 성질도 판사가 판결을 하는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판사의 말 가운데 살인이라고 하는 말이 떨어지면 이것이 정당한 것이든 아니든 한번 떨어진 말은 그 현실을 일정한 각도에서 드러나게 하므로 상황을 변화시킨다. 사랑하는 남녀 중 어느 한사람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떨어지면 지금까지 불확정 적이고 유동적인 두 사람관계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 말은 결정적인 현실로 나타난다.
언어는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통해서 새로운 상황을 이룩하고 현실을 창조한다.

그러니까 언어는 곧 말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이란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듯이 들어 맞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이 비록 유동적이고 불확정 하지만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빈 말이 아닌 현실을 채우는 일정한 현실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말 가운데 빗나간 화살이 허공으로 사라지듯이 빈 말이 되는 것은 거짓말에 속한다. 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한번 입에서 떨어진 말은 되돌릴 수 없이 초월되기 때문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도 이 말이 한번 입에서 떨어지면 그 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따라 다니게 된다.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나 함부로 지껄이는 말들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이 모욕적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상처로 깊이 남는다. 사람의 입에서 한번 떨어진 말은 감옥과 같은 구속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은 보이는 현실적 미래적 과거적인 삼차원적 언어라 했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진실이니 그리움이니 기다림이니 순수니 하는 언어의 형이상학적 언어도 보이는 것이기에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말을 일컬어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것이라 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는 혼돈과 혼란 속에서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할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말의 타락, 말의 폭력, 빈 말이나 다름 없는 말의 거짓말이 횡횡하고 있는 말의 일차원적인 쾌락을 즐기기 때문이다.

말 속에 있어야 할 말의 도덕이 없고 말의 가치관을 우리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으며 말을 아끼고 사랑할 줄 모르는데 연유한다. 남이 하는 것이라면 다 하고 싶은 욕심,

이 욕심은 말을 함부로 하는데서 시작된 결과이다. 말에는 격이 있다. 우리 말의 이성화, 우리 말의 언어지성, 언어이성과 언어순수가 절실한 때이다. 어린 아이의 말 배우기가 욕설로 부터 시작이 된다면 이 아이의 인성은 욕설과 같은 세계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얼마나 가공할 일인가?
뿐만 아니라 말은 선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이 유혹처럼 달콤한 말들로 우리 사회를 살인적인 가시를 가지고 실존이라는 허무의 늪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 말이 우리의 삶의 길을 열어줄 새로운 지평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언어철학운동은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

 


언어철학론 시창작 특강과 함께 / 이 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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