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 라마나는 자기탐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내면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되 가능한 한 오래 그 느낌을 유지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딴 생각에 의해 주의가 분산되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마다 '나'라는 생각의 자각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했는데―예컨대 탐구자는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이 나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그러나 그 궁극적인 목표는 육체와 마음의 모든 활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 '나'를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나'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의 생각 또는 지각의 형태를 띤 정신적 행위가 된다.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나'라는 생각은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나'라는 느낌이 되고, 이 느낌이 다른 생각 또는 대상들과 연결되어 자신과 동일시하기를 그칠 때, 그것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개인성의 의식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존재의 체험(experience of being)만이 남게 된다. 이 체험이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나타나지만, 수행을 거듭함에 따라 점점 더 쉽게 이루어지고 오래 유지된다. 자기탐구가 이 수준에 이르면, 더 이상의 개인적인 노력이 불가능한 애씀없이 자연스러운 존재의 자각(effortless awareness of being)이 있게 되며 여기서는 더 이상의 노력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노력하던 '나'가 일시적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나'라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진아 깨달음은 아니지만 수행의 최고 단계이다. 이러한 존재의 상태를 계속 체험하게 되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던 원습들이 점차 약화되고 파괴되는데, 그것들의 힘이 충분히 약화되고 나면, 진아의 힘이 남아 있는 습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림으로써 '나'라는 생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최종적인 확고한 진아 깨달음의 상태인 것이다.
'나'라는 생각에 대한 자기주시(self-attention) 또는 자각自覺의 이 수행법은, 마음을 제어하는 보통의 억압적인 수행법들을 능가하는 유연한 기법이다. 이는 (대상에) 집중하는 행법도 아니고 생각을 억누르는 것을 목표하지도 않으며,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자각하며 깨어있는 것이다. '자기 아닌 것들'로부터 주의와 관심을 거두어들여 마음의 근원에 머무르면서, '참으로 자기인 것'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자기탐구의 방법이자 목표이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부터 생각하는 자기에게로 주의를 되돌리는 형태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나'라는 느낌의 자각이 일단 확고하게 자리잡고 나면 더 이상의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적이다. 이때부터는 행위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존재의 과정이며, 존재하려고 애쓰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애씀없는 존재(effortless being)의 과정이다.
본래 자기인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노력이 필요 없으니, 존재함(beingness)은 항상 현존하며, 항상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아닌 것[즉, 육체와 마음]으로 존재하려는 척하는 것은, 비록 거의 언제나 무의식 수준에서이기는 하지만, 끊임없는 정신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기탐구의 보다 높은 수준에서는, 노력이 오히려 존재의 체험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노력을 그쳐야 그 체험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진아는 무엇을 행위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오직 존재함으로써 발견된다. 슈리 라마나 자신이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명상하지 말고―존재하십시오(be)!'
'그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존재하십시오(be)!'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그대가 존재합니다(you are)!'
자기탐구를 명상 수행과 같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깨어있는 동안 내내, 무슨 일을 하고 있을 때나 계속되어야 한다. 슈리 라마나는 일과 자기탐구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다고 보았으며, 조금만 해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초보자들의 경우에는 일정한 시간대에 정규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장시간의 좌선 정진(sitting meditation)은 결코 권하지 않았으며, 그의 헌신자들이 자신들의 세속적 활동을 버리고 명상 생활에만 전념하고 싶어했을 때 항상 찬성하지 않는 뜻을 나타내었다.
[ 문 ] 당신께서는 진아를 탐구(search)함으로써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탐구란 어떤 성격의 것입니까?
[ 답 ] 그대는 마음입니다, 아니 그대는 자신을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생각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모든 생각의 이면에는 '나', 즉 그대 자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일반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이 '나'를 첫 번째 생각이라고 합시다. 이 '나'라는 생각에 달라붙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 찾아보십시오. 이 의문이 그대를 강하게 사로잡으면, 그대는 다른 생각들을 할 수가 없습니다.
[ 문 ] 제가 그렇게 하면서 저 자신, 즉 '나'라는 생각에 달라붙으면 다른 생각들은 왔다가 가버립니다. 그러나 이때 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어보면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있는 것이 이 수행법입니다. 그렇습니까?
[ 답 ] 사람들이 흔히 이런 실수를 합니다. 그대가 진아를 진지하게 탐구해 들어가면, '나'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다른 어떤 것이 그대를 사로잡는데, 그것은 탐구를 시작했던 그 '나'가 아닙니다.
[ 문 ] 그 다른 어떤 것이 무엇입니까?
[ 답 ] 그것은 진아, 즉 '나'의 (진정한) 의미(the import of 'I')입니다. 그것은 에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고의 존재(supreme being) 그 자체입니다.
[ 문 ] 당신께서는, 이 탐구를 시작할 때는 다른 생각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지만, 그 생각들은 끝이 없습니다. 한 생각이 물러나면 다른 것이 또 나타나서 도무지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 답 ] 생각들을 계속 물리치기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대 자신, 즉 '나'라는 생각을 꽉 붙드십시오. 그대의 관심이 그 한 생각에만 집중되면, 다른 생각들은 자동적으로 밀려나서 사라질 것입니다.
[ 문 ] 그러면 생각들을 물리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 답 ] 아닙니다. 한 동안은 아니면 어떤 사람들은 그럴 필요도 있겠지요. 그대는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계속 물리치려고 하면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끝이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물리치는 단호한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그대는 자신이 자기의 내면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수준이 되면 생각을 물리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 문 ] 그렇다면 노력하지 않고, 긴장하지 않고도 가능하군요.
[ 답 ] 그 뿐 아니라,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노력할 수도 없습니다.
[ 문 ] 좀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러면 전혀 노력하지 않으려고 해야 합니까?
[ 답 ] 지금의 그대라면 노력 없이는 안되지만, 그대가 좀더 깊이 들어가면 어떤 노력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아상我相(aham-vritti)의 근원을 파고드는 자기탐구를 통해서 마음이 내면으로 향해지면, 원습들은 소멸됩니다. 진아의 빛이 원습 위에 비치어 반사되는 현상이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습이 소멸되면 마음 또한, 단 하나의 실재인 심장의 빛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공부인(aspirant)이 알아야 할 핵심사항입니다. 공부인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진지하게 그리고 일념一念으로 아상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문 ] 초심자는 어떻게 이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까?
[ 답 ] 마음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하는 탐구를 통해서만 가라앉습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소멸시킨 뒤에, 마치 화장터의 장작불을 뒤집는 막대기처럼, 마지막에는 그 자체도 소멸됩니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생각하려 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하고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한들 무슨 상관 있겠습니까?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놓치지 않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하고 물으면, '나에게'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때 다시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어 들어가면, 마음은 그 근원[진아]으로 되돌려지고 일어났던 생각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계속 반복하여 이렇게 해 나가면, 마음이 그 근원에 머무르는 힘이 증가합니다.
오랜 세월(많은 생) 동안 되풀이해 온, 감각 대상(sense-objects)을 좇아가는 습習(vishaya vasanas)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무수히 일어나겠지만, 자신의 성품에 대한 탐구가 점점 강렬해짐에 따라, 그것들은 모두 소멸될 것입니다. '이 모든 원습을 다 소멸하고 진아로서만 남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심이 일어날 틈도 주지 말고, 자기주시를 꽉 붙들고 끈질기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감각 대상을 향한 마음의 습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가 필요합니다. 생각들이 일어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생각이 일어난 곳을 탐구함으로써, 모든 생각을 절멸시켜야 합니다. 딴 것(anya)에 주의를 팔지 않음이 무집착無執着(vairagya) 또는 무욕無欲(nirasa)이며, 진아를 떠나지 않음이 지知(jnana)입니다. 실은 이 둘[무욕과 지知]은 같은 것입니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바다 밑의 진주를 캐내듯이, 무집착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뛰어드는 사람은 진아라는 진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아에 이를 때까지 부단히 자신의 참된 성품의 기억[眞性記憶](swarupa-smarana)을 견지해 나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속박되어 있는 나는 누군가?'하고 탐구하여 자신의 참된 성품(swarupa)을 아는 것이야말로 해탈입니다. 마음을 항상 진아에만 고정시켜 두는 것이 자기탐구이며, 반면에 명상(dhyana)은 자신을 존재-의식-지복(sat-chit- ananda)인 절대자(Brahman)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문 ] 요기(yogis)들은, 진리를 발견하려면 속세를 버리고 한적한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 답 ] 행위의 삶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매일 한 두 시간만 정진해도 그대는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대가 올바른 방식으로 정진하면, 이때 유도된 마음의 흐름이 그대가 한창 일을 하는 중에도 계속 흐를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의 생각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진精進(meditation) 중에 그대가 취하는 노선(line)이 그대가 활동하는 중에 표현될 것입니다.
[ 문 ]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 답 ]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그대는 사람, 일 그리고 사물들을 대하는 그대의 태도가 점차 바뀌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대의 행위들은 자연히 정진시의 상태를 따르게 됩니다.
[ 문 ] 그러면 당신께서는 요기들과는 생각을 달리하시는군요.
[ 답 ] 인간은 자신을 이 세상에 얽매이게 하는 개인적인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 자아[假我]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포기(renunciation-출가)입니다.
[ 문 ] 세속적인 활동의 삶을 영위하면서 어떻게 이기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 답 ] 일과 지혜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습니다.
[ 문 ] 예컨대 직업상 지금까지 해오던 행위들을 계속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 답 ] 왜 안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예전의 자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의식이 점차 변화되어, 결국 소아小我(the little self)를 넘어서 있는 그것(진아)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문 ] 일에 종사하다 보면, 정진할 시간이 거의 없을 겁니다.
[ 답 ] 정진 시간을 따로 낸다는 것은 아주 초보 수행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진보하고 있는 사람은 일을 하든 않든 깊은 지복을 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의 손이 세상에 관여할 때에도, 그의 정신은 초연하게 홀로 있습니다.
[ 문 ] 그러면 당신께서는 요가의 길을 가르치지 않으십니까?
[ 답 ] 요기는 목동이 회초리로 소를 몰듯이 마음을 목표지점으로 몰고 가려 하지만, 이 길에서는 공부인(seeker)이 한 움큼의 풀을 내밀며 소를 제 발로 따라오게 합니다.
[ 문 ]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 답 ] 그대는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탐구가 결국에는, 마음의 뒤에 가려져 있던 그대 내면의 뭔가를 발견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대가 이 큰 문제를 풀어내면 다른 모든 문제도 다 풀게 됩니다.
[ 문 ] '나'를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답 ] 그대는 자신이 육체이고, 눈으로 보는 것만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어떻게 봅니까? 단 하나의 의식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나'라는 생각으로 나타나서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고, 눈을 통해 스스로를 투사投射하여 주위의 사물들을 보는 것입니다. 개인은 생시의 상태에 제한되어 있으면서, 다른 뭔가를 보고자 기대합니다. 그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 지각한 것만을 확실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보는 자(the seer), 보이는 것(the seen) 그리고 봄[見](the seeing)이 모두 같은 하나의 의식, 즉 '나, 나'(I, I)의 나툼[顯現]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관內觀을 해보면 진아를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환상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진실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는 지금 '나'를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앞에 놓고 보아야 합니까? 그 (존재의) 자각이 바로 '나'입니다. 그것을 깨달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 문 ] 생각들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다 보면 '나'에 대한 지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 답 ] 정말 그렇습니다. 그 '나'라는 지각은 하나의 형태, 아마도 육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진아와는 아무것도 연관될 수 없습니다. 진아는 연관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실재이며, 그 빛 속에서 육체와 에고가 반짝이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을 가라앉히고 나면 순수한 의식이 남습니다.
잠에서 막 깨어나서 외부 세계를 미처 인식하기 전에 순수한 '나, 나'가 있습니다. 자지도 말고 생각에 끌려가지도 말고 그 '나'를 착파着把하십시오(Hold on to it). 그것을 단단히 붙들기만 하면 외부 세계가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보는 자는 보이는 현상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남습니다.
에고란 무엇입니까? 탐구해 보십시오(Enquire). 육체는 지각 능력이 없으므로 스스로 '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아는 순수한 의식이며, 비이원적(non-dual)입니다. 따라서 진아도 '나'라고 말할 리 없습니다. 잠든 상태에서는 아무도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에고입니까? 그것은 수동적인 육체와 진아 사이를 매개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일정한 처소(locus standi)가 없으며, 찾아보면 유령처럼 사라집니다. 밤에 어떤 사람이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자기 옆에 유령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세히 살펴본다면, 실제로 유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무나 전신주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자세히 안 보면 유령이 그를 공포에 떨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기만 하면 유령은 사라집니다. 유령이 애당초 거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에고는 육체와 순수 의식 사이의 잡히지 않는 연결고리(intangible link)이지만, 실재하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것은 계속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힌두교식 결혼식에서는 잔치가 닷새나 엿새까지 가는 일이 흔합니다. 어느 결혼식에서 신부 측의 사람들이 어떤 사내를 신랑의 들러리로 오인하고 특별한 대접을 했습니다. 신부 측에서 그를 특별 대우하는 것을 보고, 신랑 측에서는 그가 신부 측의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기고 그들도 그에게 특별한 경의를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내는 양쪽에서 다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물론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신랑 측에서 그에게 어떤 것을 문의할 게 있어서, 신부 측에 그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사내는 탄로나겠다 싶어 얼른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에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찾아보면 그것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찾지 않으면 그것은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 문 ] 저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탐구하려고 하면 어느 새 잠이 들어버립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답 ] 깨어있는 동안 내내 탐구를 계속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잠이 들 때까지 계속 탐구하면, 잠자는 동안에도 그 탐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는 즉시 다시 탐구를 시작하십시오.
[ 문 ] 어떻게 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는 자기탐구로는 평안을 얻을 것 같지 않습니다.
[ 답 ] 평안은 그대의 본래적 상태(natural state)입니다. 그 본래적 상태를 방해하는 것이 마음(mind)입니다. 그대가 평안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자기탐구가 마음 속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탐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사라질 것입니다. 생각과 별개인 마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생각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것을 마음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대가 탐색해 들어가면, 마음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대는 영원한 평안을 깨달을 것입니다.
[ 문 ] 저는 '나'가 일어나는 근원에 대해서 탐구하다 보면 마음이 고요한 단계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는 아무 생각도 없고 하나의 텅 빔(emptiness), 공백 상태(blankness)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은한 빛이 충만한데 저는 그것이 몸 없는 저 자신이라고 느낍니다. 육체나 형상은 인식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체험은 거의 반시간 가량 지속되며 즐겁습니다. 영원한 행복, 즉 자유 또는 구원―또는 뭐라 부르든 간에―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체험이 몇 시간, 며칠 또는 몇 달 동안 지속되도록 수행을 계속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제가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이 맞습니까?
[ 답 ] 그것은 구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태를 의식침전意識沈澱(manolaya), 즉 생각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은 상태라고 합니다. 의식침전은 일시적으로 생각의 움직임을 정지시킨 집중을 의미합니다. 이 집중 상태가 끝나면 곧바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전처럼 밀려듭니다. 이러한 일시적인 마음의 진정 상태가 설사 천 년을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 해탈(liberation from birth and death)이라고도 불리는, 생각의 완전한 소멸 상태에는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러한 체험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그 즐거움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지, 안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탐구를 하지 않으면 그는 오랜 황홀경(trance)이나 깊은 수면 상태[요가 수면, yoga nidra]에 빠질 것입니다. 수행의 이 단계에서 적절한 인도가 없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해탈했다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까스로 무사히 목표에 도달했습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요기가 갠지스 강둑에서 여러 해 동안 따빠스(tapas-고행명상)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높은 단계의 집중 상태에 도달하자, 그 상태를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하는 것이 해탈을 이룬다고 믿고 그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깊은 집중 상태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갈증을 느끼고 제자에게 강에 가서 마실 물을 조금 떠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물을 떠오기도 전에 그는 요가 수면(yoga nidra)에 빠졌고, 그 상태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 동안 실로 많은 강물이 다리 밑을 흘러갔으며 강의 흐름마저 바뀌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그가 이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대뜸 '물! 물!'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도 갠지스 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깨어나서 맨 먼저 요구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깊은 집중 상태에 들어가기 전, 그의 마음의 가장 겉 층에 있었던 생각이 물이었고, 그의 집중 상태가 아무리 깊고 오래갔다 하더라도 그는 그의 생각들을 다만 일시적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시 의식을 회복하자 가장 겉 층에 있던 그 생각이, 마치 홍수가 둑을 터뜨리듯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명상에 들어가기 직전에 막 형태를 갖춘 생각이 이런 식이라면, 그 전에 뿌리를 내린 생각들도 절멸絶滅되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생각의 절멸을 해탈이라고 할 때, 그는 과연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자들(sadhakas)도 마음의 이와 같은 일시적인 진정 상태[의식침전, manolaya]와 생각의 영원한 소멸 상태[의식소멸, manonasa] 간의 차이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의식침전에서는 생각의 물결이 일시적으로 잠잠해지는데, 설사 그 기간이 천 년을 간다 하더라도 그렇게 일시적으로 가라앉았던 생각들은 의식침전 상태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의 영적인 진보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가라앉는 이러한 상태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 상태를 체험하면, 즉시 의식을 회복하여 이 고요함을 체험하는 자가 누구인지 안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어떤 생각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동시에, 이러한 깊은 수면[요가 수면] 또는 자기최면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이러한 체험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해탈로 가는 길과 요가 수면에 빠지는 것 사이의 분기점이기도 합니다. 구원으로 가는 쉽고, 직접적이며, 가장 빠른 지름길은 탐구의 방법(enquiry method)입니다. 이 탐구에 의해 그대는 생각의 무리[群]를 더욱 깊은 곳으로 몰아넣어, 결국 그 근원에 이르러 그 속에 녹아들게 합니다. 그때 그대는 내면으로부터의 반응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대가 모든 생각들을 일거에 섬멸해 버린 뒤 거기서 휴식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 문 ] 이 '나'라는 생각은 저한테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진아는 모르겠습니다.
[ 답 ] 그런 것은 모두 정신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그대는 지금 자기 자신을 그릇된 '나', 즉 '나'라는 생각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생각은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의 진정한 의미(true significance of 'I')(진아)는 일어나고 가라앉음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대의 존재(being)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잠을 잤던 그대가 지금은 깨어 있는데, 깊은 잠 속에서는 없던 불행이 지금은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잠들어 있을 때는 '나'라는 생각이 없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존재합니다. 참'나'(the true 'I')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거짓 '나' (the false 'I')가 활개치고 있습니다. 이 거짓 '나'가 그대의 올바른 앎에 방해가 됩니다. 이 거짓 '나'가 어디서 일어나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 그대는 오로지 본래의 그대, 즉 절대적 존재가 될 것입니다.
[ 문 ]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아직 그렇게 안됩니다.
[ 답 ]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우주는 '나'라는 생각으로 인해 존재합니다. 그 생각이 사라지면 불행도 끝나게 됩니다. 거짓 '나'는 그 근원을 찾을 때에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지 묻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음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는지를 일러 드리겠습니다.' 사실인즉 마음이란 생각들이 한데 모인 다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음을 없애겠다는 생각이나 욕망을 가지고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생각과 욕망은 마음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음은 새로운 생각들이 일어남에 따라 마냥 비대해집니다. 따라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음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 근원을 찾아 그것을 착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요가에서는 식심제어識心制御(chitta vritti nirodha)[마음 활동의 제어]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저는 자기탐구(atma vichara)를 이야기하며, 이것이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식심제어는 잠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 또는 음식을 굶었을 때에도 되지만, 그 상태가 끝나자마자 생각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무감각 상태에서도 평안이 있고 불행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감각 상태가 사라지면 불행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어(nirodha)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지속적인 효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효과가 지속되겠습니까?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면 됩니다. 불행이 있는 것은 대상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상이 없으면 그에 따른 생각도 없고 따라서 불행도 사라지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어떻게 하면 대상이 사라질 것이냐'입니다. 경전(srutis)이나 진인들의 말씀에 의하면, 대상이란 마음의 창조물(mental creations)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실체적 존재성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탐구해서 그 말씀의 진위를 확인하십시오. 결국 객관적 세계는 주관적 의식 안에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이처럼 진아는 세계 속에 두루 스며 있으면서 세계를 감싸고 있는, 유일한 실재인 것입니다. 진아에는 이원성이 없으므로, 그대의 평안을 방해할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아 깨달음입니다. 진아는 영원하며 따라서 깨달음도 영원합니다.
수행(abhyasa)이란, 그대가 생각에 의해 방해를 받을 때마다 진아(자기) 안으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파괴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진아 안으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 문 ] 집중이 왜 효과가 없습니까?
[ 답 ] 마음에게 마음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도둑을 경찰로 임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그대를 따라나서 도둑을 잡는 척하겠지만 결국 아무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대는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마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사라질 것입니다.
[ 문 ] 마음을 내면으로 돌릴 때, 우리는 여전히 마음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 답 ] 물론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통해서만 마음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인정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란 것이 있는데, 내 이것을 없애 버려야겠다' 하면서 달려들지 말고, 마음의 근원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은 밖으로 향하면 생각과 대상들을 낳지만, 안으로 향하면 스스로 진아가 됩니다.
[ 문 ] 그래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지금 이 '나'가 그릇된 '나'라고 하시는데, 그릇된 '나'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 답 ] 그릇된 '나'를 제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나'가 '나'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근원을 찾아내어 거기에 머무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대의 노력은 거기까지밖에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너머의 일은 저절로 진행될 것이며, 여기서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여기는 어떤 노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 문 ] 만약 '나'가 지금 여기 항상 있다면, 왜 저는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까?
[ 답 ] 바로 그겁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누가 말하는 것입니까? 참'나'입니까, 아니면 거짓 '나'입니까?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그릇된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그릇된 '나'가 장애물입니다. 참'나'가 드러나게 하려면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나는 깨닫지 못했다'라는 느낌이 깨달음에 대한 장애물입니다. 사실은 이미 깨달아 있으며,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깨달음은 새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지금까지 없었다면, 앞으로 새로 생겨나야 합니다. 새로 탄생하는 것은 결국 죽습니다. 만약 깨달음이 영원하지 않다면 그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새로 생겨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하지만 단지 장애물 때문에 지금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본래 영원한 그것을 우리는 무지 때문에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가 바로 장애물입니다. 이 무지를 극복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무지는 '나'라는 생각과 동일합니다. 그 근원을 찾으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은 유령과 같이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육체와 동시에 나타나서 살아 움직이다가 육체와 함께 사라집니다. 육체 의식이 곧 그릇된 '나'입니다. 이 육체 의식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이 '나'의 근원을 탐구하면 됩니다. 육체는 '내가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육체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대입니다. 이 '나'가 누군지 밝혀내십시오. 그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 문 ] 마음은 심장 속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습니까?
[ 답 ] 수행에 따라 그 시간은 늘어납니다.
[ 문 ] 그 시간이 끝날 때에는 어떻게 됩니까?
[ 답 ] 마음은 지금과 같은 보통 상태로 돌아옵니다. 심장 속에서의 단일성이 그대가 지각하는 다양한 현상들로 교체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출심外出心(outgoing mind)이라고 하며, 심장으로 들어가는 마음은 안주심安住心(resting mind)이라고 합니다.
공부인이 나날이 더욱 더 이런 방법으로 수행해 나가면, 마음은 그 결함들이 제거되어 극히 순수해질 것이며, 수행은 아주 쉬워져서 탐구를 시작하면 곧장 그 순수해진 마음이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 문 ] 정진 중에 존재-의식-지복의 체험을 한 적이 있는 사람도 정진하지 않을 때는 다시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할 수 있습니까?
[ 답 ] 예, 그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그 동일시를 잃어 갈 것입니다. 진아의 빛이 쏟아지는 속에서 환幻(illusion)의 어둠은 영원히 걷혀 버립니다.
원습原習을 모두 뿌리뽑지 않은 상태에서 얻은 체험은 안정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원습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모든 원습이 뿌리뽑힌 뒤라야 지知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형성된 마음의 습(mental tendencies)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과거[前生]에 수행을 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비교적 빨리 사라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좀 늦습니다.
[ 문 ]이러한 습들은 점차로 없어집니까,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 버립니까? 이것을 여쭈어 보는 것은, 제가 이곳에 머무른 지 오래 되었는데도 내면에서 아무런 점진적 변화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답 ] 해가 떠오를 때 어둠은 점차적으로 걷힙니까, 아니면 단번에 걷힙니까? - (주:1)
[ 문 ] 저의 탐구가 진보되고 있는지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답 ]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정도가 진아 깨달음을 향한 진보의 척도입니다. 그러나 진아 깨달음 자체는 진보라는 것이 없고 항상 그대로입니다. 진아는 항상 깨달음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깨달음의 장애물은 생각들입니다. 수행상의 진보는, 진아가 항상 깨달아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이 장애물들이 얼마나 제거되었느냐 하는 정도에 의해 가늠됩니다. 그러므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그것이 누구에게 일어났는지 탐구함으로써 생각의 일어남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는 생각들의 근원으로 들어가며, 생각들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 문 ] 의문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제가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 답 ]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가 해소되면 또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나고, 그것이 해소되면 또 다른 의문이 뒤를 따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모든 의문을 다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의문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의문들의 근원으로 들어가서 거기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의문을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 문 ] '나는 누구인가?'하고 대답 없이 계속 물어야 합니까? 누가 누구에게 묻는 것입니까? 탐구를 할 때에는 마음에 어떤 보심保心(bhavana) - (주:2) [태도]을 지녀야 합니까? '나'는 진아입니까, 아니면 에고입니까?
[ 답 ]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에 있어서 '나'는 에고입니다. 이 물음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이 에고의 근원 또는 시초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마음에 어떤 보심[태도]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는 자신이 이러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아무개라는 이름을 가진 육체다라고 하는 보심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대의 참된 성품에 대해서는 어떤 보심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실재할 뿐이며 어떤 보심도 아닙니다.
[ 문 ] 그러나 '나'가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는 결국 하나의 공허한 공식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제가 스스로에게 이 물음을 끝없이 던지면서, 마치 어떤 진언眞言을 암송하듯이 해야 됩니까?
[ 답 ] 자기탐구는 절대로 공허한 공식이 아니며, 그것은 어떤 진언을 암송하는 이상의 것입니다. 만약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가 단순히 마음 속으로 하는 질문일 뿐이라면, 그것은 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탐구의 목적은 온 마음을 그 근원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나'가 또 다른 '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탐구는 더더욱 공허한 공식이 아닌 것이, 이 탐구는 마음을 순수한 진아자각(Self-awareness)에 꾸준히 맞추어 가는 온 마음의 강렬한 활동(집중)이기 때문입니다.
[ 문 ] 아침저녁으로 얼마 동안씩 시간을 내어 이 자기탐구를 해도 충분합니까? 아니면 항상, 심지어 글을 쓸 때나 걸을 때에도 계속해야 합니까?
[ 답 ] 그대의 참된 성품은 무엇입니까? 글쓰는 것입니까, 걷는 것입니까, 아니면 존재하는 것입니까? 유일한 불변의 실재는 존재입니다. 그대가 그 순수한 존재의 상태를 깨닫기까지는 이 탐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일단 그대가 그 안에 자리잡게 되면 더 이상의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도 생각의 근원을 탐구하려 들지 않겠지요. '나는 걷고 있다' 또는 '나는 글을 쓰고 있다'하는 생각이 드는 한, 누가 그것을 하는지 탐구하십시오.
[ 문 ] 생각을 계속 물리쳐 나가면 그것을 탐구라 할 수 있습니까?
[ 답 ] 그것도 하나의 디딤돌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탐구는 그대가 그대의 진아를 꽉 붙들고 마음의 움직임, 즉 생각의 파동(thought waves)을 그쳐 버렸을 때 진정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 문 ] 그러면 탐구는 지적知的인 것 아닙니까?
[ 답 ] 아닙니다. 그것은 내적 탐구(antara vichara)입니다.
초심자에게는 마음을 붙들고 그것을 탐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아의 한 투사물投射物입니다. 누구에게 그것이 나타나는지, 그리고 어디서 그것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라는 생각이 그 근본 원인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나'라는 생각도 사라지고, 하나의 무한히 확장된 '나'라는 의식('I'- consciousness)이 있을 것입니다.
[ 문 ] 저는 슈리 오로빈도 아쉬람(Sri Aurobindo Ashram)의 어머니[慈母](Mother) - (주:3)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마음을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공백 상태로 유지하여, 신이 그의 참된 존재의 모습으로 현신現身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은 이런 취지였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올바릅니다. 신의 힘이 내려올 겁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체험이 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더 나아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 답 ] 그대 자신으로 존재하십시오(Be what you are). 아무것도 내려오지 않으며, 아무도 현신하지 않습니다. 에고를 잃어버리는 것이 그대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도 그대가 그것입니다. 그대는 그것과 별개가 아닙니다. 공백을 보는 것은 바로 그대입니다. 공백을 보는 그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다립니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하는 생각, 보고자 하는 기대, 그리고 무언가를 얻겠다는 욕망은 모두 에고의 작용입니다. 그대는 에고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에고가 이런 이야기들을 한 것이지 그대가 아닙니다. 더도 말고 그대 자신이 되십시오!
일단 태어난 이상 그대는 무엇엔가 도달합니다. 그것에 도달하면 그대는 또 되돌아 나옵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이야기는 그만두십시오. 그대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십시오(Be as you are). 그대가 누구인지 밝혀내어, 태어남과, 가고 옴과, 되돌아감으로부터 벗어나, 진아로서 머무르십시오.
[ 문 ] 진아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답 ] 진아를 안다는 것은 진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대는 진아(자기)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설사 그대가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고, 들여다 볼 거울이 없다고 해도, 그대의 눈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대가 부인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비록 진아가 대상화되지 않는다 해도 그대는 진아를 자각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그대는 그것이 대상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의 진아를 부인하겠습니까? 그대가 '저는 진아를 모르겠습니다' 할 때, 그것은 상대적인 앎이라는 견지에서의 (진아) 없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상대적인 앎에 워낙 익숙해 있어서, 그대 자신을 그것(대상)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릇된 자기인식(wrong identity)이 이 분명한 진아를 알기 어렵도록 만듭니다. 진아는 대상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진아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까?
[ 문 ] 당신께서는 존재(being)를 말씀하시는데,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 답 ]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이나 저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I am that I am)하는 말이 진리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고요히 있으라'(Be still)는 말로 집약됩니다. 고요히 있으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그대 자신을 소멸시키라'(destroy yourself)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형상이나 모양이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하는 관념을 버리십시오.
경전에 이르기를, '그것은 "나"로서 빛난다'(ahamiti sphurati) 하였습니다. '나-나'(aham-aham)가 진아이며, '나는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aham idam)는 에고입니다. '나'가 오직 '나'로서만 유지될 때, 그것은 진아입니다. 그것이 옆길로 벗어나서 '나는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가 되면 그것은 에고입니다.27 (이 문단은 역자 증보이다.)
진아를 깨닫는 데는 고요하게 있는 것이 필요한 전부입니다.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아지(atma-vidya)가 가장 얻기 쉬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진리(truth of oneself)야말로 우리가 면밀히 탐구해서 알아낼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주의 집중(attention)의 목표로 삼아, 심장 안에서 예리하게 통찰해야 합니다. 이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번뇌망상으로부터 벗어난, 고요하고 또렷한 의식에게만 드러납니다.
심장 가운데서 형상 없는 진아, 즉 '나'로서 항상 빛나며, 어떤 것도 실재한다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이 없이, 고요히 존재함으로써 깨달아지는 이 의식만이 완전한 실재입니다.
주:
1) 해가 떠오르기 전에 어둠은 점차적으로 걷혀 가다가 해가 뜨는 순간 단번에 걷혀 버린다. 이것은 습(習)의 제거 과정은 점진적이지만, 깨달음은 순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2) 보심(保心, bhavana 또는 bhava)이란 수행자가 명상하거나 숭배하는 대상에 대해 지니는 일정한 내심의 태도 혹은 마음 자세를 말한다. 명상하는 심적인 태도의 경우에 이것은 명상의 대상에 대해 일정한 마음의 상을 그리는 것(mental imagery)이며, 역자는 이를 보심관(保心觀)으로 번역한다.
3) 슈리 오로빈도(1872-1950)를 도우며 이 아쉬람을 함께 이끌었던 프랑스 출신의 미라 알파사(Mirra Alfassa, 1878-1973)를 가리킨다.
출처 : 명상나라 http://www.zen.co.kr
"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 "
항구적인 마음의 평화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한쪽으로 더 치우치면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으로 향하여 앉아서 명상하는 일에만 너무 치중하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데 소홀하다면, 똑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외부의 '현실 세계'에서 살기보다는 자신의 내면 세계로만 움츠러 들 수도 있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불균형한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유의해야 할 4가지 측면이 있다. 만일 이 4가지에 동등한 비중을 둔다면, 자연스럽고 쉽게 발전해 가는 중에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4가지 측면이란 ,알기(knowing), 존재하기(being), 되어가기(becoming), 주기(giving)이다.
'알기(knowing)'란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미 기초적인 사실, 즉 나는 영혼이다, 나의 진정한 품성은 평화이다, 나에게는 마음과 지각 그리고 잠재의식이 있다 등이 주어져 있다. 이제 이들을 모아서 함께 맞추어야 한다. 이 사실들은 조각그림 맞추기의 조각들과도 같으므로, 정확하게 짜 맞추어야만 올바른 그림이 나타난다. 각각의 조각들은 작은 한 부분의 모양만을 담고 있어, 그 자체로는 완성된 그림에 대한 힌트만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정보들을 천천히 읽고 처리해 나가면서 우리의 인생살이에 맞추어 볼 때, 일관성있는 시야를 얻게 된다. 일단 이해가 있으면, 나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완성될 그림을 이해하면 하나 하나의 조각 그림이 어디에 위치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지각이 명료하게 유지되어 긍정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지식이 있으면 긴장이 예상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초연할 수 있다.
'존재하기(being)'는 요가, 즉 명상에서의 경험을 가리킨다.
배운 지식의 조각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해도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들을 실제로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헝가리어의 간단한 구절을 배워 올바른 순서로 반복할 수 있다 해도, 선생이 그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 구절은 나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평화', '사랑', '영혼', '초연함'과 같은 단어들을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게 되는가? 오로지 체험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평화를 경험하는 것이 '평화'라는 단어를 실재(實在, real)하는 것으로 만든다.
이는 평화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바탕이 된다. 왜냐하면 단어와 경험이 일치할 때에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이론적인 지식을 실제로 경험할 때, 그 지식이 검증되는 것이다.
경험은 지식에 대한 신뢰를 만들고, 이러한 신뢰감과 진리에 대한 분별력으로 인해 기초가 굳건히 다져진다.
'되어가기(becoming)'는 행동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바로 앞에서 지식과 경험 간의 조화가 강조되었다. 거기에 모순이 있으면 지식에 관한 신뢰와 확신은 사라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 있어서도 조화는 극히 중요하다.
앉아서 명상하는 중에 자신을 평화로운 영혼으로 경험한 직후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면, 평화로운 경험은 무의미해지며 영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에 빠져든다.
명상은 실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즉 명상에서 얻은 긍정적인 힘이 행동에 반영되어야 한다. 나는 실제로도 명상 중에 경험한 존재가 되어 가야 할 것이다.
명상의 결과를 현실에 옮기는 것은 대개 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할 일이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기적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지각 그리고 잠재의식의 사이클을 통해 영혼이 행동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명상 중에 평화로운 산스카라스를 만든다 해도, 이미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비평화적인 잠재의식이 계속해서 마음 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는데 때로는 그것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분별하여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각을 통해 의식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필히 이해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 부정적인 행동과 습관을 변화시키려고 실제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명상 중의 경험이 아무리 좋아도 행동이 이 경험과 상반된다면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면 나의 마음은 평화의 보금자리가 되는 대신에 부정적인 생각과 계속 싸워야 하는 싸움터가 되어 버린다.
'주기(giving)'는 다른 이들과 조화롭고 이타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로우면 타인과의 관계도 자연히 좋아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이유는 나 자신 속에 비평화적인 불꽃을 당기는 것이 주로 타인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우호적으로 베풀 때에는 나도 우호적으로 베푸는 마음으로 되기란 쉽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에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좀 거북하다고 느끼는 상황으로부터 시작해서 공공연한 적대적인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에게 주는 일을 실천하면 나에 대한 보호책이 된다.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불행한 다른 영혼에게도 도움이 된다. 나는 주고 받는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평화와 호의를 퍼뜨리겠다는 생각만을 갖는다는 것은, 공포나 원망으로 응하거나 내 마음 속에 분노를 일깨울 수 있는 여지조차 없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직면하게 되는 좋지 않은 상황은 나에 대한 시험과도 같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진정 알 수 있다. 거기에서 승리하면 지식을 얼마만큼은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확인할 수 있다. 만일 화가 나거나 부주의해지더라도 '다음에는 올바르게 행동해야지'라는 욕구가 있으면,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다시 음미할 수 있게 된다.
때때로 자신의 긍정적인 경험을 나눔으로써 남들을 도와 줄 수 있는 입장에 서기도 한다. 그때 자신의 말로 설명해보면 내가 얼마만큼 이해했는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식을 되돌아 갈 때마다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 간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발전해 간다.
주는 일은 보답이나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행해져야 하고, 단지 내가 내 것으로 만든 긍정적인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줄 때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이 나의 긍정적인 행동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보답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주는 행동은 진실로 이타적인 행위이다. 내가 꽤 오랫 동안 명상을 연습하면, 주는 일은 언어를 초월한 그 이상의 것이 된다. 즉 지식과 명상 경험이 나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단지 긍정적인 참된 자신의 모습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평화와 미덕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알기, 존재하기, 되어가기, 주기라는 네 가지 측면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룰 때, 영혼은 자연히 평화 가운데 머물며 타인과도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의 영혼의식 상태를 '생에서의 자유(freedom of life)'라고 부른다.
출처 : 지혜샘터 http://iamiam.maru.net/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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