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집에 이르면 불국토를 상징하는 여러 구조물들이 미혹에서 깨달음의 이르는 순서처럼 차례차례 펼쳐지기 마련이다.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범종각, 석등, 탑, 법당, 대웅전을 비롯하여 대적광전, 극락전, 미륵전, 관음전, 명부전 그 외 산신각, 칠성각 등. 충북 진천읍 연곡리 만뢰산 남쪽에 자리 잡은 보탑사寶塔寺는 이런 일반 산문山門과는 다르다. 파격이다. 언 듯 보자면 일주문은커녕 대웅전도 없다. 다만 3층 목탑이 덩그러니 서있고 바로 뒤편으로 지장전, 북동쪽으로 자그마한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산세를 보면 절터로는 가히 좋은 자리는 아니다. 현재 진천군 백곡면과 진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만뢰산은 덕성산의 한 줄기가 서운산을 이루고 다시 엽돈재를 넘어 남쪽으로 뻗힌 산이다. 산 정상에는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은 옛성터가 남아 있는 왜소한 산세로, 선가禪家의 큰 인물을 배출하기에는 밑 힘이 부족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이 목탑은 경주 남산의 마애탑을 모태로 한 42미터 높이로, 탑 내부에는 밖에 있어야 할 대웅전, 법보전, 미륵전을 기능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1층은 동서남북으로 사방불四方佛이 수미산을 상징하는 999개의 백자탑의 각면을 자리잡고, 2층은 티벳불교에서 따온 윤장대, 3층은 미륵전으로 꾸며져 있다. 터라는 것이 무시하지 못할 일이라, 이 목탑을 세운 후 구도자의 행렬보다는 년간 2만 명의 초중고등학생이 줄줄이 방문하는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황룡사의 9층탑의 위용을 상상하고, 지장전의 배경이 된 고구려 장군총의 모습을 간접체험하기 위한 선생님들의 배려일 터. 그러나 불가佛家에서의 죽음이란 적멸, 열반, 소멸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다비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새롭게 시작한 중창 불사佛事에서 장군의 무덤인 장군총 모습으로 지장전地藏殿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성에 차지 않는다. 절 집의 건물들을 보면서 먹장삼 결가부좌의 승려들의 모습을 읽어왔는데, 보탑사는 웬일인지 크기 만한 물량주의와 더불어 바람이 들어간 퍼포먼스 적인 가벼움이 읽혀진다.
큰길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6.5Km의 길은 아늑했다. 계곡을 따라 고여 있던 안개에 햇살이 내려앉고 나지막한 구릉과 넓지 않은 벌판은 젖빛이었다. 긴 대궁 사이에서 차차 일어나는 아침 햇살. 사실 벌들의 교미, 남녀의 사랑, 연어의 산란, 붉게 물든 단풍, 잘 열려 매달린 사과 등등의 찬란함은 종말에 근접한 모습이었다. 가을을 자랑하는 들국화가 고개를 들어 길가에 피어오르고, 만장처럼 울긋불긋한 산등성이는 이제 하얀색으로 변할 겨울세상을 위한 절정에 이르는 만반의 준비.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부단히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 구성되고 실존한다. 행行에 의해 이 세상은 상相을 이룬다. [담마파다Dhammapada]에 의하면 세상을 고苦-두카로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8만4천의 마을과 또 그만큼한 궁전들, 회관들, 침상들, 코끼리들, 말들, 수레들, 보석들, 여자들, 가신들, 소들, 8만4천 벌의 옷들, 8만4천 벌의 그릇들. 지구가, 수미산이, 개천이, 강들이, 호수들이, 그리고 대양마저도. 얼마나 불안정한가? 산도 사라지고 부족도 없어지고 붓다도 세상을 떠났다. 보라 그토록 무상한 것이다" 그 생각을 따르자면 이곳에서의 존재는 무수한 과정의 흐름 속에 생겨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허한 물거품일 뿐이다. 그러나 안개가 걷혀 가는 가을 들판의 아름다움은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고苦를 읽어내기에는 너무 찬란하다.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이 자리 이 순간의 중요성을 설법하는 듯하다. "소멸하는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고의 과정이라면 고-두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
한 겨울 법안문익法眼文益은 도반들과 길을 나섰다가 폭설을 만났다. 그들 일행은 서둘러 근처의 지장원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계침桂琛 선사를 만났다. 계침이 물었다. "수좌들은 어디로 가는가?" "이럭저럭 행각을 합니다" "행각하는 뜻은 무엇인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가장 친절한 것이다" 이것은 알고 모르고의 분별을 이미 떠나왔는가 아닌가를 묻는 대답이고 법안문익은 잘 건너뛰었다.
아침에 눈이 걷히자 길채비를 하는 그에게 계침은 다시 물었다. "삼계三界가 모두 마음 안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 뜰 아래 돌덩이는 마음 안에 있는지, 마음 밖에 있는지 말해보라" "마음 안에 있습니다" "행각하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마음속에 돌덩이를 넣고 다닌단 말인가!" 법안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떠나기를 포기한 채, 계침 선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절 집 앞에 앉아 구태여 이 이야기를 떠올리는 이유는 보탑사 때문이다. 삼계가 모두 마음 안에 있고, 흘러가는 삼계에서 피안에 닿으려면 마음을 잘 써야 하고 알아야 한다. 보탑사의 운명도 무상無常이다. 무상이라는 의미는 비실재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꾸준히 변해간다는 의미이다. 탑에 세월이 덧씌워지면 훗날 이곳에 오는 사람은 다른 모습을 읽는다. "그가 틀리고 내가 맞는가? 옳고 그름이 있기는 있는가?" 내가 이 자리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가람의 터가 좋고 나쁘고, 분위기가 무겁고 가볍고, 이 곳 승려들의 기운을 구별할 것이 아니라 관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차원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다.
하여 대웅전, 윤장대, 미륵전으로 가득 찬 아파트 13층 높이의 3층 목탑을 마음에 넣고 무겁게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구별의 없애는 멸도 일심一心으로 각覺으로 나갈 일이다. "삼계三界가 모두 마음 안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 뜰에 우뚝 솟은 3층 석탑은 마음 안에 있는지, 마음 밖에 있는지 말해보라" "할!" 물어보는 계침 선사에게 몽둥이 삼십 방을 날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