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마음정원(寂光) 2006. 2. 8. 01:02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

        “세상 만물 중에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일체 존재의 ‘동시적 상호의존성’ …자타불이.동체대비 가르침 차별적 배타주의 세계관 극복하는 ‘원융화합의 길잡이’ 역할 일체 존재의 동시적 상호의존성을 가리키는 연기는 세계존재와 인간존재의 근거와 본질을 규명하는 진리다. 마치 만다라의 그림과 같이 존재는 서로 얽혀 의미를 만들어 낸다. 각자가 우주이자 모두가 우주다.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연기(緣起)다. 연기이므로 무아(無我)이고 공(空)이다. 연기는 모든 존재의 동시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뜻한다.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연기법에 따르면 고통도 한시적일 뿐, 영원한 것이 아니다. “고통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지고의 행복인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부처님은 강조한다.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은 근본적으로 ‘우월주의’라는 우열(愚劣)의식에 기초하며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이 초래된다. 예를 들면, 백인 우월주의에 따른 나치 독일인이 유대인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죽일 때 죽어가는 유대인의 고통에 대한 어떠한 공감이 일어나지 않았다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와서는 성실하고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버지이고 좋은 이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독일인이나 유럽인의 고통에는 유태인과 달리 공감하였다한다. 이는 유대인이나 다른 인종은 자신들을 우열(愚劣) 관계로 보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보려하지 않은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다른 동물을 먹기 위해 죽일 때도 동물이 죽어가는 고통에 대해 크게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처자식이나 가족 또는 가까운 이웃의 고통에는 깊이 공감한다. 만약 동물 또한 같은 수준으로 공감한다면 함부로 죽이기가 힘들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간에 그리고 사람과 동물 간에 자연 간에 관계를 우열로 보려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에서 인간 이외의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우열을 말한다.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이야기하지만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한 자비를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각과 견해의 차이에 따라 인간은 물론 자연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연기법(緣起法)의 중요한 의미는 이렇게 생각과 견해와 관계하는 세계관의 문제와 관련해 있다. 이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요 근본 가르침이요 중심 가르침이다. 세계존재와 인간존재의 근거와 본질을 규명하고 있는 진리이다. 따라서 불교의 중심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연기의 빠알리는 paicca-samuppda이다.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내는 이 말은 불교 흥기에 즈음한 다른 인도종교나 철학에서 나타나지 않은 불교만의 전문용어이다. 기본적으로 paicca-sam-uppda의 세 부분으로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다. paicca는 연(緣)으로 옮겨져 ‘~ ~ ~ 때문에’, ‘~ ~ ~ 에 의해서’라는 뜻과 samuppda는 기(起)로 옮겨졌으나 sam이 ‘함께’라는 의를 가지고 있어 ‘함께 일어남’이나 ‘함께 생김’의 의미를 각각 가지고 있다. 세계존재와 인간존재의 근거와 본질은 그 자체로서 ‘원인과 조건에 의한 일어남’ 또는 ‘여러 조건의 화합에 의한 일어남’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불교는 연기법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많은 경전에서 연기에 대한 압축적인 정의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라고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구절은 공간적으로 모든 존재의 동시적인 상호 의존 관계와 동시에 시간적으로 이시적(異時的)인 생멸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비유적으로 경전에서 3개의 갈대 단이 땅 위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즉 세 개 가운데 하나를 제거해 버리면 다른 두개의 갈대는 서지 못하고, 다시 두 개의 갈대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1개도 역시 서지 못한다. 다만 세 개의 갈대는 서로 의지해야만 설 수 있는 것으로 서로 간 원인과 조건이 동시에 되는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는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승의 〈화엄경〉에 이르러서는 ‘인드라망’ 즉 ‘제석천 궁전의 그물 비유’를 들고 있다. 즉 제석천 궁전에 드리워진 입체적인 그물과 각각의 그물코에 달린 투명구슬에는 서로 다른 구슬들이 동시에 겹겹이 그리고 끝없이 되비치고 있는 것으로, 훗날 화엄종의 법장스님은 다시 이를 원용하여 좀 더 실감나게 제자들이 연기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먼저 법장은 팔방(八方)과 상하(上下)에 서로 마주보는 거울들을 설치한 뒤 가운데에는 거대한 횃불을 밝히고 불상을 놓았다. 제자들은 중앙의 불상뿐 아니라 각각의 거울에 비친 불상들 또한 모든 거울에 비친다는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거울에 비친 수많은 불상들이 또다시 모든 거울에 다시 비치고 하여 불상이 배가 되고, 다시 그것의 배가 되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모든 다른 구슬에 있는 영상들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 있는 복합적인 영상들도 서로 되비추는 구슬로 이루어진 인드라 그물(網)과 같다는 것이다. 이같은 실험의 예는 일체 존재의 근거와 본질은 우주적 연대 속에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간의 관계 선상에 있는 것으로 다른 종교와 철학의 세계관에 비교하면 심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의 인과법(因果法)으로 설명한다하더라도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직선적인 또는 단일 방향의 인과와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연기법은 당시나 현재의 많은 사람들이 세계존재의 근거와 본질 문제에 있어 인습적으로 쉽게 상정하고 있는 창조론(創造論)이나 유물론(唯物論) 또는 우연론(偶然論) 등과 같은 세계관을 그대로 파기하고 부정[破邪]하고 진리를 밝힌 것[顯正]이기에 연기법은 그대로 세계관의 혁명,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깨뜨림과 드러남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며 왜 ‘깨달음’이라는 말을 특별히 사용되고 강조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기법에 의하면 창조주와 같은 절대적인 제일원인(第一原因)이나 자기원인적인 존재도 있을 수도 없고 기계적인 물질적 법칙만으로 볼 수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교 흥기 이전의 세계와 인간의 근거와 본질을 유일한 창조주로서의 (인간 모양의) 뿌르샤(Purua)나 범신의 신체 부위로부터 전개되었다거나 다른 한편에서는 물질적인 전개로 보는 것에 대한 파기로서 연기법이다. 이는 셈족의 자매종교 계열(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또한 불교의 비판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체로 유신종교는 신 아래 인간과 다른 생명 간에 또는 같은 인간 사이에도 천부적(天賦的)으로 차별적인 지위와 권한의 위계를 말한다. 즉 ‘인간 우월주의’와 ‘유대민족 선민주의(選民主義)’ 그리고 ‘바라문 선민주의’와 같이 특정 민족이나 계급만이 우월하다는 배타적 차별주의가 그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창조신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라는 수직의 주(主)와 종(從)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연기법의 의미는 이러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대신에 세계의 근거와 본질은 ‘쌍방향적 상호관계’로서 수직의 주종이 아니라 모두 수평의 평등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남자가 있기에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있다. 인간이 있기에 자연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왜 불교가 일체 생명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강조하고 사람간의 평등을 강조하게 된 근거를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 세계는 연기의 이치를 투철하게 알지 못하기에 우열(愚劣)과 빈부(貧富).귀천(貴賤).미추(美醜).정(淨)과 부정(不淨). 다소(多少).고하(高下).장단(長短) 등과 같은 상대적인 이변(二邊) 또는 양변(兩邊)에 관련하는 고통에 매몰되어 있다. 마치 이러한 이변과 양변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도 되는 것 인양 강하게 집착하여 대립과 충돌의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연기법은 모두 인연 따라 있는 것이지 따로 빈부.귀천.미추 등이 고정되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연기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러한 이변과 양변에 대한 불이(不二)나 중도(中道)가 이야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로지 해결하려고 했던 점은 인생의 고통 문제였다. 다시 말해, 인생의 고통 또한 조건적으로 연기(緣起)하는 것이지 고정되어 있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더군다나 신이나 물질적인 법칙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기법은 우리 스스로 고통의 조건을 제거해버리는 노력을 한다면 고통이 다한 지고(至高)의 행복인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르침임을 함축하고 있다. 부디 올해에는 모두가 부처님의 연기법을 깊이 이해하여 자타불이(自他不二)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으로 개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반목과 대립으로 인한 고통에서 원융과 조화의 행복한 삶이기를 희망해 본다. 조 준 호/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에서-
희망이란 아이/이루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