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고요한 마음자리

마음정원(寂光) 2013. 10. 16. 09:37
고요한 마음자리 - 경봉스님
 
법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운데 있고,
종사가 법좌에 오르기 전에 법문이 있고
법문을 듣는 사람이 자리에 앉기 전에 있고,
종사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있는 것이다.
 
이 도리를 모르니 부득이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게 되고, 들어야 하는데
교가(敎家)에서 경전을 보고 말하는 것과 선가(禪家)에서 조사종풍(祖師宗風)을
드날리는 선리적(禪理的) 법문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산을 볼 때에 산이 푸르고 물을 볼 때에 물이 푸르게 흘러내리지만
수행이 어떤 경지에 올라가면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다.
 
眞理를 探究하고 修行을 해야 이 말이 通하지
自己 심리(心理)를 닦지 않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귀에 담아 놓으면 강철 쇳덩어리를 머금은 것과 같아서
이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말에 계합(契合)하게 된다.
 
그러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라, 물이 곧 산이요, 산이 곧 물이며
더 나아가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이것이 오묘한 도리인 것이다.
우리는 몸을 아끼지만 이론적으로 과학적 생리적으로 따져보면
부모님의 物件이지 내 物件은 아니다.
 
참으로 나(眞我)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運轉)하고 다니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 자리가
곧 내 몸을 運轉하고 다니는 運轉手며 내 主人公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것은 마치 남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도 主人을 찾지 않는
무뢰한(無賴漢)이 되는 것처럼 몇 십 년을 이끌고 다녀도
自己 主人公을 안 찾고 또 찾으려고 해도 힘 드는 것이다.
 
석가여래께서도 고귀한 왕의 자리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서 이 자리 하나를 찾으셨다.
여러분이 먹고 입고 거처하는 의식주의 세 가지 일에
날마다 노력하는 24시간 가운데 9시간 일하고 5시간 놀고 6시간 잠자고 4시간 남아있으니
그 중 단 1시간 만 이라도 내 主人公을 찾는 여기에 주력을 다 해야 한다.
 
그런데
精神統一은 커녕 온갖 煩惱 妄想이 일어나 精神은 서울로 부산으로
아들,딸집을 찾아가 심지어는 애틋한 生覺에 눈물까지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간 일, 현재의 일, 미래의 일들이 生覺을 키워서
그 妄想 도적이 들어 앉아 있으니 집안에 도적이 들어 앉아 있으면
主人이 방에 들어가기도 무섭고 겁이 나서 밖으로 쫓겨 나가듯
妄想이 앞을 가리면 다른 것을 生覺하기에 순일(純一)하지 못하다.
 
즉 화두가 一念으로 되지 못한다.
이것을 순일하게 하려면 우리가 수행정진을 하게되면
찌꺼기가 가라앉고 윗물이 맑게 되는 것처럼
마음자리가 원래 고요한 자리라 自己가 흔들어서 구정물처럼 되는 것이다.
 
지극한 곳에 들어 가 보라. 들어가려 해도 실은 잘 안 된다.
안 되지만 자꾸 하면 그런 마음이 다 쉬어져서 쉬고 쉬는 거기서 해야 한다.
여러분이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해도 소리 없이 걱정이 생겨서
내보내려 해도 안 나가고 귀신같이 들어 와서 가슴을 치고 머리를 친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기왕 우리가 이 사바세계에 나왔는데
이 사바세계를 舞臺 삼아 演劇 한 바탕 멋들어지게 하고 가자는 말이 그런 까닭이다.
 
항상 걱정 근심만 하고 살 바에 무엇 하려 어머님으로부터 나오기는 나왔느냐 말이다.
좀 근심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 털어 버려야 한다.
우리 인생은 기껏 살아 봐야 백 년을 더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지금껏 생활 해 온 모든 思考方式과 生活에 잘못이 있다면
다 비워버리고 참으로 바르고 산 精神으로 살아가야 한다.
 
근심걱정은 물질이나 사람에 관한 것 以外에는 없는데
설혹 좀 근심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超越한 精神에 계합(契合)하여 人生의 路線과 人生觀을 確立하여야 한다.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 말씀인데
參禪하는 것은 自己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