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독경

[스크랩] 예불문 해설

마음정원(寂光) 2013. 7. 14. 21:32

예불문 해설

 

오분향례

계향(戒香) · 정향(定香) · 혜향(慧香) ·

해탈향(解脫香) ·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광명운대 주변법계 (光明雲臺 周法界)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헌향진언(獻香眞言)

옴 바아라 도비야 훔

 

▶ 오분향

계향(戒香) · 정향(定香) · 혜향(慧香) ·

해탈향(解脫香) ·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오분향(五分香)은 본래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법신의 덕성을 일컫는 것이지만 모든 수행자가 서원하는 수행의 향기이기도 하다. 수행의 향기는 몸과 말과 뜻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나눌 수 없는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다섯 가지로 나누어 오분향이라 부른다. 향은 ‘맑고 청정한 향기’를 상징하는 공양물이다. 주위를 맑고 청정하게 하는 향의 작용을 수행의 덕성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향을 공양하거나 향을 사르며 오분향례(五分香禮)를 드릴 때는 수행의 덕성이 향과 같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서원해야 한다.

 

계향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삼업을 계행으로 잘 다스려 청정한 계행에서 나오는 향기이다. 계행 가운데 으뜸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버리고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다. 하나의 계행은 지혜의 근원이며, 한 사람의 계행은 자신과 사회를 맑고 청정하게 하는 원천이다.

 

정향은 본성[진여]에 의지한 고요한 마음에서 나오는 향기이다. 고요한 마음을 얻는 근본은 일정한 경계에 마음을 집중하는 지행(止行)을 닦는 것이다. 지(止)란 망념으로 나타나는 경계상(境界相)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경계상이 그치면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염불행자는 정토를 염원하는 발원이 깊으면 자연히 망념과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고요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혜향은 부처님의 지혜를 진실로 믿고, 깊이 이해하는 것에서 나오는 향기이다. 지혜는 법상(法相)을 관하는 관행(觀行)을 닦아야 얻을 수 있다. 관(觀)이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지혜롭게 분별하는 것이며, 생멸문에 의지하여 법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말한다. 관행으로 얻는 첫 번째 지혜는 묘관찰지이다. 이 지혜로써 모든 법이 비유비무(非有非無)임을 통찰하고, 일심의 법에 의지하여 공(空) 무상(無相)의 도리를 체득한다. 염불행자는 성소작지를 진실로 믿고, 자비광명으로 보여주시는 정토의 경계를 관찰한다. 일체를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관하는 화신관은 복과 지혜가 증장하는 불가사의한 법이다.

 

해탈향은 생사와 윤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해탈] 안심과 기쁨에서 나오는 향기이다. 해탈은 묘관찰지를 통찰하고 무생(無生)의 법을 체득함으로써 성취한다. 염불행자는 성소작지에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안심을 얻고, 믿음으로 행하여 생사해탈을 성취한다. 또한, 이 땅에서 정토의 경계를 감득하여 무량광명에 대한 믿음[信]을 결정하고, 무량광명에 섭수되는 기쁨[喜]을 얻으며, 태어남이 없는 법[無生法忍]을 성취할 수 있다.

 

해탈지견향은 생사해탈과 지혜의 향기이다. 대승불교는 생사해탈을 성취하여 개인의 안심을 얻는 것으로 목표를 삼지 않는다. 보리심을 일으켜 위로는 무상보리[삼신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나아가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동체대비심을 구현하고자 한다. 해탈지견향은 곧 일심의 근원에서 생사에 걸림이 없고 지혜와 자비가 하나 된 보살의 향기이다.[地上菩薩] 해탈지견향은 사상의 자유, 삶의 자유를 얻고, 중생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근기에 따라 안심과 희망을 부여하며 교화하는 지혜와 회향의 향기이다.[正定聚]

 

▶ 광명운대 주변법계 (光明雲臺 周遍法界)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광명의 구름 고루 가득 법계에 충만하니

온 누리 무량한 삼보님께 공양합니다.”

 

광명운대 주변법계는 깨달음의 지혜로 바라본 세계를 말한다. 광명운대는 광명의 구름이 ‘높고 평편하게 고루 가득한 모습’[臺]을 뜻한다. 법계란 불법이 적용되는 세계라는 뜻이니, 일체의 세계가 다 법계이다. 깨달음의 지혜로 바라보면 법계는 삼보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무량광명의 세계라는 것이다.

공양시방 무량불법승은 법계를 무량광명으로 장엄하며 시방에 무수히 많은 불 · 법 · 승께 오분향의 성취를 발원하는 마음을 바친다는 뜻이다. 삼보께 공양하는 가운데 최상의 공양은 진실한 믿음, 진실한 발원을 바치는 것이다.

무엇이 삼보인가? 대승의 유일한 법인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불보요, 일심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법보이며, 일심을 향해 닦아가는 수행자가 승보이다. 그러므로 일심이 곧 삼보이다. 일심에 공양하는 것이 곧 삼보께 공양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염원하고 깨달음으로 성취하는 세계는 온 누리에 무량한 불 · 법 · 승이요,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인 무량광명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진실한 믿음으로, 어떤 사람은 깨달음의 지혜로 ‘광명의 구름 고루 가득 법계에 충만하니, 온 누리 무량한 삼보님께 공양합니다.’라고 찬탄하며 예배드리는 것이다. 삼보에 대한 예경은 불법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깊어질수록 더욱 진실한 마음이 일어나니, 삼보의 은혜가 지중함을 사무치게 깨닫는 까닭이다.

 

▶ 헌향진언(獻香眞言)

옴 바아라 도비야 훔

“금강 같은 마음으로 향을 사르는 존귀한 이를 찬탄하오니,

이로써 세계는 청정하리라.”

 

헌향진언은 ‘향을 바치는 참된 말씀’이라는 뜻이다. 대개 진언 혹은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것은 종교의 신성함을 우선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진언의 글자 자체에 신비성을 강조하면 또 다른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다.

헌향진언의 은 찬탄하다, 바아라(바즈라)는 금강, 도비야는 향을 사르는 존귀한 사람[燒香尊] 은 청정하다라고 번역하였다. ‘금강’은 믿음과 발원이 금강석처럼 견고하여 부서지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한 사람이 품어내는 수행의 향기는 자신 뿐 아니라 이웃, 나아가 세계를 청정하게 할 것이다.

향을 바치고 사르는 수행의식은 곧 청정한 수행의 덕성을 쌓아 자신과 이웃이 다 함께 맑고 청정하기를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들이 염원하는 정토는 청정이요, 청정이 곧 광명이다. 청정하면 자연히 자비로운 은혜를 베푼다. 그러므로 “금강 같은 마음으로 향을 사르는 존귀한 이를 찬탄하오니, 이로써 세계는 청정하리라.”라고, 청정을 발원하는 이를 찬탄하고 청정을 염원하며 예배드리는 것이다.

 

예불

 

불교는 교조이신 석가모니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지혜로 말씀하신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僧]을 보배로 삼아 받들어 모시고 따르니, 불 · 법 · 승을 삼보(三寶)라 부른다. 예불은 불 · 법 · 승, 삼보께 예를 드리는 의식이다. ‘예배(禮拜) 드린다.’라고 할 때, 예(禮)는 마음으로 지극히 공경하는 의업(意業)이며, 배(拜)는 자신을 낮추어 몸을 굽혀 예를 드리는 신업(身業)이며, 삼보의 명호를 부르며 찬탄하는 것은 구업(口業)이다. 온전한 삼업의 예불은 의식을 넘어 믿음 · 발원 · 염불의 선근공덕을 쌓는 깊은 수행이다.

예불문 가운데 최상으로 공경하는 표현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이니,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라는 뜻이다. 염불행자의 ‘귀명’(歸命)은 몸과 마음을 바쳐 무량광명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진실한 종교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배하여도 귀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귀명하면 반드시 예배한다.’고 하였다.

진실한 믿음으로 귀명하여 예배하고, 지극한 그리움으로 발원하며, 오로지 명호를 부르고 찬탄하는 그 마음에 자연히 망념이 그친다.[止行] 망념이 사라진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觀行]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만약 이러한 경험을 얻는다면, 그는 예불이라는 의식을 통해 수행의 맛을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불의 뜻을 알면 믿음과 지성심이 깊어지고, 이로 인해 이해가 깊어진다. 이해가 깊으면 자연히 행을 일으킨다.

 

지심귀명례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삼계의 중생을 인도하시는 스승이시고,

사생의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며,

저희들의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삼계는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재물욕, 수면욕, 음식욕, 이성욕, 명예욕인 오욕의 세계[욕계]와 육체의 물질이 미세하게 남아 있는 세계[색계]와 육체의 물질은 소멸하지만 업식(業識)이 남아 있는 세계[무색계]는 모두 윤회하는 세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지어 천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천국마저도 일심을 미혹한 범부의 관념으로 지은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업식으로 윤회하는 삼계의 중생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 영원한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스승이시다.

사생은 태생(胎生) · 난생(卵生) · 습생(濕生) · 화생(化生), 즉 모든 생명들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안락(安樂)에도 직결된 대자비의 성언이다. 무엇이 사생의 안락을 보장하는가? 깨달음의 지혜이다. 자신이 깨달으면 일체 중생이 깨닫는다. 일체 경계가 일심인 까닭이다. 자신이 일체를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관하면 모두가 화신으로 변한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깨달음의 지혜를 열어 보이시고, 사생을 안락하게 하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다. 지혜의 생명[慧命] 무량광 무량수의 생명을 주신 아버지이시다.

우리들이 근기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수행문을 선택하여 수행하지만 그 수많은 불보살의 가르침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혜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들의 근본 스승이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석가족의 성자[모니]로 출현하시어 무상보리[삼신의 지혜]를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 일체 중생이 윤회를 벗어나고 안락하도록

위없는 지혜 보이신 거룩하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지심귀명례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등도사 아미타불

至心歸命禮 西方淨土 極樂世界 我等導師 阿彌陀佛

서방정토 극락세계에서

저희들을 이끌어주시는 스승이신 아미타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는 육방의 모든 불국토 가운데 가장 수승한 국토이다. 극락세계는 부처님의 세계요, 깨달음의 세계이며, 마음이 편안하고 대상 경계가 지극히 즐거운 세계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예토에서 오악(五惡)을 짓지 않도록 타이르시며 정토를 가리켜 태어나기를 권하시고, 아미타 부처님은 정토에서 무량광 · 무량수의 불가사의한 공덕으로 우리들을 영접하여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게 하신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땅에 출현하신 뜻[일체 중생을 구제함]과 보신불(報身佛)의 뜻[일체 경계가 한 마음, 한 생명]을 아미타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실어 가르침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셨으니, 예토와 정토는 달라도 두 분 성인의 뜻은 다르지 않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관계도 이와 같다.

 

“무량광 무량수의 불가사의한 공덕으로

일체 중생을 정정취에 들어가게 하시는 아미타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至心歸命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무량한 공간, 끝없는 시간의 세계

인드라망 모습으로 바다같이 광대한 세계에

항상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시방은 공간에 제한이 없는 무량한 세계를 뜻하고, 삼세는 시간에 제한이 없는 끝없는 세계를 뜻한다. 제망은 제석천의 그물을 말하는데, 범어와 혼용한 ‘인드라[Indra]망(網)’이라는 말이 불자들에게 더 익숙해져 있다. 인드라망은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한 그물이다. 이 그물은 매듭마다 빛나는 보배 구슬이 달려 있는데, 그 각각의 구슬에는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나타나고, 그 나타난 수많은 구슬마다 다시 다른 구슬들의 영상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을 ‘하나 가운데 일체가 들어 있고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를 안고 비추는 모습이 겹겹으로 다함없이 전개되는 것을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고 일컫는다.

인드라망의 구슬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이 참으로 본성의 빛을 발하기만 하면, 이 마음 가운데 일체 중생이 다 들어있고, 다른 사람 역시 내 모습을 담고 있으며,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그의 모습에도 수많은 인연을 담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이와 같은 관계에 있으면서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생명처럼 연결되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드라망 모습으로 전개된 세계[刹]가 바다와 같이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불타[Buddha]는 범어의 발음을 따라 옮긴 말이며, 삼신[법신 · 보신 · 화신]의 지혜인 무상보리를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불타야중’의 耶는 어세를 돕는 조사로 쓰인 것이니, ‘모든 부처님들[衆]’이라고만 번역하였다.

모든 부처님들은 대승불교에서 출현하신 부처님들이다. 초기불교는 1세계 한 부처님[석가모니불]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본성[體]과 덕성[相]과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의 모습[用]을 인격화하여,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 화신불(化身佛)이라는 개념들로 정리되었고, 그 부처님들이 과거 · 현재 · 미래, 시방에 항상 계신다고 하였으니 수많은 부처님들이 출현하시게 된 것이다.

부처님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불괴신(不壞身)이시다. 우리들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고 가르침을 실천하면 부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들이 귀명하여 따르면 이 땅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명이 살아계시고, 저 정토에는 아미타 부처님이 현재도 법을 설하고 계신다. 부처님의 생명을 영원하시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시방삼세와 우리들 마음 가운데 항상 계시며

법을 설하시는 법신 보신 화신, 모든 부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至心歸命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磨耶衆

무량한 공간, 끝없는 시간의 세계

인드라망 모습으로 바다같이 광대한 세계에

항상 법으로 다가와 인도하는 모든 가르침에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달마[dharma]는 범어의 발음을 따라 옮긴 말이며, 법(法)이라 번역한다. 이란 ➀ 자연과 중생들, 물질과 정신 일체는 각기 고유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➁ 우리들이 어떤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가르침, 이 두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일체 현상은 모두가 각기 고유한 성품을 지닌 법의 모습[法相]이며, 근기 따라 베푸신 모든 경전과 논서의 말씀은 가르침의 법[敎法]이다. 우리들이 부처님의 지혜를 진실로 믿고,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은 삶 가운데 전개되어 있고, 마주하는 일체 인연들은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며 다가와 가르침을 전한다. 더욱이 인터넷이 인드라망의 세계임을 증명하는 이 시대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법이 전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선지식이 전하고, 자연이 전하고, 인터넷이 전하는 그야말로 불법이 상주하는 시대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보고 듣고 만나는

자연과 중생들의 고유한 성품, 모든 가르침에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지심귀명례 대지 문수사리보살 대행 보현보살

至心歸命大智 文殊舍利菩薩 大行 普賢菩薩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 마하살

大悲 觀世音菩薩 大願本尊 地藏菩薩 摩訶薩

큰 지혜와 묘덕을 갖추신 문수사리보살님,

큰 덕행으로 널리 이롭게 베푸시는 보현보살님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대원의 근본으로 존귀하신 지장보살님, 큰 보살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은 처음 발원하신 본원(本願)이나 수행으로 쌓은 덕성에 따라 명호를 갖는데, 여기서 귀명의 대상으로 삼은 보살님들의 명호도 그러한 뜻이다. 보살은 범어 보리살타의 준말이며, 각유정(覺有情)이라고 번역하니, ‘위로 무상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모든 보살은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중생들의 원을 따라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나누어 실천하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신이며, 화신이시다.

대지 문수사리보살의 ‘문수사리’[Mañjuśrī]는 범어의 발음을 따라 옮긴 말이며, 묘덕(妙德)으로 번역한다. 앞에 큰 지혜라는 뜻을 붙여 ‘대지 문수사리보살’이라 부르니, 한문과 범어가 혼용된 명호이다. 대행 보현보살은 본래 범어의 ‘널리 상서롭다.’는 뜻을 번역한 것인데, 큰 덕행으로 널리 이롭게 베푸신다는 뜻일 것이다. 대비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원하는 것에 따라 즐거움을 주거나[大慈] 고통을 함께 느끼며 가엾이 여겨[大悲] 그 고통을 제거해 주신다. 대원본존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들이 모두 구제될 때까지 성불의 인연을 미루고 보살행을 실천하기로 서원’하셨으니, 곧 대원의 근본을 세우신 존귀하신 보살님이시다. 지장은 대지비장(大地秘藏)의 뜻으로 대지가 만물을 광명의 세계로 끌어내는 비밀한 능력을 갖추고 있듯이, 지장보살도 지옥 중생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무궁한 능력의 덕성을 갖추고 있음을 비유하여 붙인 명호이다. 마하살은 ‘큰 보살’이라는 뜻이며, 여기서 다 모시지 못한 모든 큰 보살님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처님의 부촉 받고 중생들의 원을 따라

지혜와 자비를 나누어 실천하시는 모든 보살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 十六聖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五百聖 獨修聖 乃至 千二百 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영축산에서 불법이 전해지던 당시에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십대 제자, 십육 성자,

오백 성자, 독수 성자, 천이백의 모든 위대한 아라한,

한량없이 많은 자비하신 성인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 부처님께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이후,《법화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로소 도량에 앉아 나무를 관하고 거닐면서 삼칠일 가운데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였다. ‘초칠일에는 내가 얻은 지혜는 미묘하고 최 제일이라고 사유하였다. 2칠일에는 내가 스스로 사유하는 것은 다만 불승(佛乘)을 찬탄하는 것이라고 사유하였다. 3칠일에는 과거 부처님이 행하신 방편력(方便力)을 깊이 생각하여 ‘나도 지금 성취한 깨달음으로 응당히 삼승(三乘)의 법을 설하리라.' 하고, 사유하였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유하시기를 마치고, 녹야원에 나아가 처음 교화하여 교진여 등 다섯 비구가 탄생하니 비로소 교주와 법과 제자라는 교단의 조건이 성립되었다. 그 후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십대 제자[사리불 · 목건련 · 대가섭 · 아나율 · 수보리 · 부루나 · 가전연 · 우파리 · 라훌라 · 아난다] 십육 아라한 성자, 오백의 아라한 성자, 독수 성자[독각, 연각] 그리고 1,250인의 아라한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가 탄생하였다. 이 모든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대각을 성취하신 지혜로 법을 펴실 당시에 출가하여 온 삶을 수행과 전법에 힘쓰며 불법을 빛나게 한 선지식들이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부처님이 계실 당시에 불법을 처음 배운 제자들은 아공(我空)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날 수는 있지만 아직 법공(法空)을 깨달을 수 없었고, 대승의 발보리심을 일으킬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삼칠일을 사유하신 이후 전법하시자

아함 등 모든 가르침을 수지하여 아라한 이룬 성인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至心歸命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서쪽에서 동으로 진동하여 우리 한국에 이르기까지

역대로 법의 등불을 전하신 모든 위대한 조사님들

하늘 아래 가르침의 근본을 전하신 스승님들

일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위대한 선지식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서건(西乾)은 ‘인도, 서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동진(東震)은 ‘동쪽의 중국, 동으로 진동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불문을 지은 이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리의 보편성과 불교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뜻으로 ‘서쪽에서 동으로 진동하여’라고 번역하였다. 인도에서 비롯된 불교는 지리적 문화적 영향으로 동쪽으로 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기원전 544년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불교는 서기 67년경 중국에 전해지고, 이어서 372년 고구려에, 384년 백제에, 527년 신라에 전해졌다. 그 시대 불교가 한국에까지 전해오는 과정에 수많은 선지식들의 노고는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불교가 신라에 전래된 지 10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절에 태어난 원효(617~686)는 400여 경론을 열람하고 《대승기신론소》를 저술하였고, 80여부 15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하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원효의 독창적인 불교사상이 인류 평화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불교가 동으로 진동할 때 모든 신들은 숨을 죽였으니

노고를 마다 않고 위풍당당하게 전법하신 조사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

무량한 공간, 끝없는 시간의 세계

인드라망 모습으로 바다같이 광대한 세계에

항상 수행하고 전법하시는 모든 승가대중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승가[samgha]는 범어의 발음을 따라 옮긴 말이며, 중(衆)이라 번역한다. 출가한 수행자가 3~4인 이상이 한 곳에 모여 화합하며 수행하기 때문에 그 뜻을 따라 중(衆 : 무리중) 혹은 화합중(和合衆)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승가는 본래 출가 수행자의 단체를 일컫는 말이지만 지금은 줄여서 승(僧)이라 하면 출가 수행자 한 사람을 부르는 말에도 사용하며, 존대어로 ‘승님’ 또 ‘스님’으로 변한 것으로 본다. 현대의 승가는 출가 수행자의 교단(敎團)을 일컫는 본래 의미와 달리 재가자를 포함한 사부대중을 말할 때도 사용한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된 현대는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가 교단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고 있다. 화합하는 교단을 이루어 수행과 전법으로 지혜의 등불을 이어가는 것이 불교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불교의 생명력을 힘차게 하는 조건은 정법의 선지식, 청정한 수행환경, 신심 깊은 도반이다.

 

“오탁의 세계에도 불법에 귀의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수행과 전법으로 불교의 생명을 이어가는 승가대중께

지극한 마음으로 신명을 바쳐 예배드립니다.”

 

유원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唯願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원공법계 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오직 원하옵니다. 다함없는 삼보님은 대자대비로

저희들의 정례를 받으시고 그윽이 가피력 입게 하시어

법계의 모든 중생들과 함께,

나와 남이 일시에 불도 이루기를 원하옵니다.

 

정례(頂禮)는 자신의 머리를 부처님의 발아래 대고 손으로 받드는 자세를 취하여 절을 하는 최상의 예법이다. 가피(加被)는 ‘모든 부처님이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베풀어 보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그 가피의 힘을 가피력이라 한다. 가피에는 현훈가피(顯熏加被)와 명훈가피(冥熏加被)가 있다.[그윽할 冥. 스며들 熏. 베풀 加. 은혜 입을 被]

현훈가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불보살이 출현하시어 설법을 듣거나, 약을 구해 받거나, 치료를 받아 몸이 낫거나, 위험한 길의 인도를 받거나, 꿈에 예시를 받는 등을 체험하는 것이다. 명훈가피는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유함이 그윽한 가운데 힘을 얻거나, 환희심을 느끼는 등을 말한다.

 

“법계의 모든 중생들과 함께,

다 같이 아미타 부처님의 대원의 바다에 들어가

미래세가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하고

나와 남이 일시에 불도 이루기를 원하옵니다.”

 

출처 : 아미타파
글쓴이 : 正牧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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