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의 향기

[스크랩] 차를 마시며..

마음정원(寂光) 2012. 10. 27. 09:43

 

 

우리 말에 ‘다반사’ 또는 ‘항다반사’(恒茶飯事)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는 것처럼 흔히 있는 일, 예사로운 일을 의미한다.

차는 이렇게 언제부턴가 우리 생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커피나 녹차를 마시는 것은 샐러리맨들의 일상이 되었고,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 자판기에서

차 한 잔 빼먹는 것은 그야말로 다반사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전망 좋고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나누며 정담을 나눈다거나

가정주부가 집안 청소를 말끔히 끝낸 후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즐기는 것은 생활의 작은 행복이라 할 것이다.

임어당(林語堂)의 말을 빌 필요도 없이, 우리가 여가와 우정, 사교, 한담을 즐기는데 있어서 한 잔의 차처럼 중요하고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드물다.

차는 이처럼 우리의 생활 속에 여유와 행복을 주는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소중한 식품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차인 작설차는 위에서 말한 생활차의 범주를 넘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기능까지도 갖는다.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생활차가 아니라, 이러한 자기 성찰의 기능까지도 갖는 전통차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본고에서 말하는 차는 커피, 보리차, 모과차, 생강차와 같은 생활차 또는 기호음료가 아니라,

차나무의 눈이나 잎을 재료로 해서 만든 전통차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불교는 어떤 절대자나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을 구제할 주체도 자기 자신일 뿐이다.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스스로 깨우쳐 부처가 됨으로써 고통과 번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다스리는 일일 것이다.

보조 지눌(普照 知訥)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슬프다. 요즈음 사람들은 너무 영리하여 자기 마음이 참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법인 줄을 모른다.

법을 저 멀리 성인들한테서만 구하려 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은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고집하면서 불법을 구한다면,

이런 사람은 억만년을 지나도록 온갖 고행을 쌓는다 할지라도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로울 뿐이다.

자기 마음을 알면 끝없는 법문(法門)과 한량없는 진리를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맑고 고요한 호수 위에, 하늘을 나는 흰 구름이 그대로 비치고 호숫가의 나무와 꽃이 굴절없이 비치듯,

우리의 마음이 맑고 고요해져야 우리 마음의 참모습과 모든 존재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비칠 것이다.

불교에서의 선(禪)은 바로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법이라고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차 마시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으로 인식해 왔다.

그리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 라든가 ‘선다일여’(禪茶一如)라는 말도 나타나게 된다.
불가(佛家)에서는 다례(茶禮)를 봉행할 때에 흔히 다게(茶偈)를 읊었는데,

지금도 새벽예불을 올릴 때에 부처님 전에 차나 청수(淸水)를 올리고 다음과 같은 다게를 송한다.

我今淸淨水 / 제가 이제 맑고 깨끗한 물로

變爲甘露茶 / 감로의 차를 만들어
奉獻三寶前 / 삼보님 전에 받들어 올리나니 

願垂哀納受 / 원하옵건대 자비로이 받아 주소서


감로(amrta)란 원래 ‘불사(不死)'의 뜻으로 천인(天人)들이 먹는 달콤한 ‘천주(天酒)'라고 한다.

천인들이 이 감로를 먹으면 수명이 길고 몸은 편안해지며 힘은 세어지고 몸은 빛나게 된다.

그래서 이 감로는 ‘불사약(不死藥)'이라고도 불리운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중생의 모든 고통을 씻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로법(甘露法)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감로의 차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과 열반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구한말의 이낭산(李郎山)은 마치 위의 다게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듯 다음의 다시(茶詩)를 남기고 있다.

香初老佛微微笑 / 차의 첫 향기에 노불은 잔잔히 미소짓고

 鍾後靑山聽      / 종소리 울린 후 청산은 묵묵히 귀기울이네.

[崔凡述, (韓國의 茶道)에서 재인용]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수행자들이 차를 즐겨 마시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차는 도반과 정담이나 법담을 나누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매개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늙고 병들어 사립을 닫고 산 지 십년
산 골짝 하도 깊어 찾는 이 드문데
지저귀는 산새소리에 마음이 끌리더니
흰 구름 깊은 곳에 중 하나 찾아오네.

[石鼎, (내가 애송하는 禪偈)]

이것은 청허(淸虛)선사의 시인데, 우리는 여기서 암자를 찾아온 스님과 선사가 만난 후,

차를 함께 나누게 되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짐작하게 된다.
특히 청허선사는 혼자서도 차를 즐겨 마셨고 마침내 다선일여의 경지에 드신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의 ‘다시(茶詩)’는 그것을 증명해 준다.

소나무에 솔바람 불고 전나무에 비 올 때
동병에 끓는 물을 죽로에 옮겨라
저 소리와 듣는 내가 함께 고요해지면
한 잔의 춘설 맛을 제호에 비기랴

[石鼎, (내가 애송하는 禪偈)]

주관과 객관이 끊어진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지에서 춘설차를 음미하는 것은 그대로 선(禪)의 경지라 해도 좋을 것이다.

완당(阮堂) 선생의 다음 게송도 다선일여의 세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靜坐處     / 조용히 앉은 자리

茶半香初  / 차는 반쯤 비웠는데 향기는 처음 그대로

妙用時     / 마음이 미묘하게 움직일때

水流花開  / 물은 흐르고 꽃은 피어나네.

혼자서 마시는 차는 본래의 자기와 통하고 우주와 통한다.

그래서 [다신전(茶神傳)]에서는 여럿이 마시는 차는 소란스러워 아취(雅趣)가 줄어든다고 하면서,

차는 혼자 마실 때 신령(神)스럽다고 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전통차에 깃든 이러한 정신과 아취를 이어받기 위해서라도,

불교인이라면 아니 문화인이라면 적어도 다기 세트 하나 정도는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우리 국민의 경제수준이라면 다기 한 벌 마련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된다. 정 어렵다면 일인용 다기를 구입해도 좋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다기로는 차를 달이는 도자기 주전자인 ‘다관’,

달인 차를 다관에서 받아 찻잔에 나누어 주는 그릇인 ‘유발’, 다 달인 찻잎이나 찻잔 씻은 물을 모아두는 ‘퇴수사발’,

차를 담아 마시는 ‘찻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찻잔받침과 차숟가락(茶匙), 차수건(茶巾)과 차통, 나아가 차반(茶盤)이나

차탁(茶卓) 등의 다구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으로 형편에 따라 하나 하나 장만해 가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인 다기와 다구를 마련하여 차를 마시게 될 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우선 차를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향기(香)와 빛깔(色)과 맛(味)은 차의 세 가지 특성으로서 흔히 차의 삼요소라고 불리운다.

 따라서 코로는 차의 은은한 향기, 아가의 살갗에서 나는 것 같은 향기를 맡으면서,

그 향을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들이킨다. 눈으로는 차의 빛깔을 바라본다.

 

우리 나라에 일반화되어 있는 찐차, 이른바 녹차의 빛깔은 녹색이고 한국의 전통자생차로 만든 덖음차의 빛깔은 다갈색이다.

녹색과 다갈색의 찻물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눈과 마음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혀로는 차의 고유한 맛을 느낀다. 차에는 다섯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단 맛, 쓴 맛, 떫은 맛, 고소한(짠) 맛, 신맛이 그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맛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어느 한 맛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야 훌륭한 맛이다.


이 밖에도 귀로는 찻물 끓는 소리라든가 다관에서 물 따르는 소리를 듣는다.

이러한 소리는 숲속의 바람소리 또는 시냇물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를 닮아 귀를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손으로는 도자기 잔의 촉감과 따뜻함을 느끼며 즐긴다. 또한 차는 우리의 의식을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음을 기억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차는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六根)을 편안하게 하고 청정하게 하는 작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차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과 대면하기도 하는 것이다.

지허(指墟)스님은 우리의 조상들이 다음과 같이 차를 즐기고 사랑했음을 알려준다.


우리 조상은 청자 찻잔받침 위의 고운 모습의 차에서 높고 맑은 한국의 가을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분청자기 찻잔 속의 잘 다려진 차에서는 이른 봄에 새 움 피는 골짜기의 한낮같은 산을 보았고,

따뜻하게 우러난 차를 대하면서 잃었던 자신을 만나곤 했다. 또 백자의 찻잔받침 위에 얌전히 담긴 목화송이 같은 찻잔 속의 차에서

보리밭 너른 들 위로 화창한 봄 하늘을 수놓은 게으른 흰 구름을 만나기도 했다.

[지허 스님, (茶: 아무도 말하지 않은 한국  전통차의 참모습)]

다음으로 차 소비자로서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가급적 좋은 차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차는 꼭 값비싼 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같은 차라도 우리가 차를 어떻게 보관하고 어떤 물을 쓰고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차가 될 수도 있고

나쁜 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은 꼭 지켜져야 한다.

첫째, 변질되거나 부패된 차를 마시지 않기 위해 차를 잘 보관해야 한다.

차는 통풍이 원활하고 서늘한 곳에 보관해야 하며, 특히 습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차를 꺼낸  후, 차 봉지는 고무줄이라든가 테이프를 이용해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변질되거나 부패된 차는 화분 같은 데 버리거나, 따뜻한 물에 풀어 세수를 하거나 몸을 씻을 때 사용한다.

둘째, 다관에 넣을 차의 양을 사람 수에 따라  잘 조절하여야 한다. 차의 양이 너무 적으면 차가 싱겁고,

너무 많으면 독하여 차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된다.

셋째, 좋은 물을 사용해야 한다. 초의 선사는 ‘물은 차의 몸’이라고 할 정도로 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은 양지보다는 음지의 석간수가 더 좋고 석간수 중에서도 노란 돌이나 횐돌 사이에서 나오는 물이 좋다.

같은 석간수라도 흐름을 멈추고 안정되어 있는 물을 활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指墟, (茶)]. 석간수의 물을 이용하기가 어려우면 미네랄워터도 무방하다.

러나 염소 냄새가 나는 수돗물을 사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수돗물을 이용하여 차를 끓일 바에는 아예 차를 마시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넷째, 차를 마실 때는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갖는다.

일본의 센노리뀨(千利休)는 화(和), 경(敬), 청(淸), 적(寂)을 ‘사규(四規)’로서 제시하고 있거니와,

차를 마실 때는 항상 화합의 마음, 공경의 마음, 맑은 마음,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공부가 성숙되면 다선일여의 경지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내면을 돌아보기보다는 밖을  향해 치닫기만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에 쫓기며 여유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생활방식도 대부분 전통문화와는 거리가 먼 서구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불교인은 이러한 서구물질문명의 도도한 흐름에  그냥 떠밀려 가서는 안 된다.

이럴수록 불교적 가치관과 인생관을 굳건히 하고 불교적 생활의 지혜를 모색해야 한다.

 

우리 전통차를 마시는 일은 그 지혜의 하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통차는 콜레스테롤의 저하라든가 비만 방지 및 당뇨병의 예방 효과,

그리고 항암 작용 등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며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과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전통차를 대면하고 차 석 잔 마시는 것을 생활화하도록 다같이 힘써가야 할 것이다

출처 : 불교명상음악과 염불
글쓴이 : 善德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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