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전 상서(前上書) 3. / 법정스님
사원이란 그 어느 특정인의 소유거나 개인의 저택일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상식입니다. 오직 수도자가 도업을 이루기 위해,
한데 모여 서로 탁마해 가면서 정진해야할
청정한 도량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원이 소수의 특정인에 의해 수도장으로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유행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네 <패거리>의 식성에 맞는 몇몇이서만 도사리고 앉아
굳게 문을 걸어 닫고 외부와의 교통을 차단한 채
거대해져 가고 있습니다. 전체수도자의 광장이어야 할 이 수도장이-.
따라서 엄연하게 대중이 모인 회상임에도 대중의 의사가 무시되기 다반사이며
결코 건전한 것일 수 없는 개인의 협착한 소견이
전체 대중의 이름을 사취하여 제멋대로 행사되는 수가 많습니다.
종래로 우리의 청백가풍인 <대중공사법>이 날이 갈수록
그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으니 이것은 곧 화합과 청백성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디를 가나 구역이 나는 것은
<권속관념>이라는 그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악취-.
그래서 원융한 회중이어야 할 대중처소가 <독살이>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세속을 떠났다는 이 출세간에서 까지 튼튼한 빽이 없이는
방부조차 내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운수를 벗하여 훌훌단신 수도에만 전념하던 납자들이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정착할 곳이 없어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소위 독신수도한다는 이 비구승단의 회상에서 정화이전이나 다름없는
냉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원은 마땅히 수행하는 이의 집이어야 할 것임에도-.
개인과 직위의 한계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선 사회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류들은
이 한계마저 무시하고 개인이 의자의 힘을 빌어 권력같은 것을
신경질적으로 휘두르기가 예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녁 노을만치도 못한 하잘 것 없는 명예라는 것을.
더구나 제행무상을 뇌이고 하는 이 출세간에서-.
그래서 대중이 모인 회상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마음 내어
모처럼 찾아갔던 초학인들도 발붙일 곳이 없어 되돌아가서는
생각을 고쳐먹고 저마다 <독살이>인 자기영토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도의 빛은 바래져 가고 사명감도 내동댕이 치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이 가야 할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아닌 줄 분명히 알면서도-.
부처님!
이런 시시한 일들에 탐착하자고 저희들이 불문에 들어선 것이겠습니까?
머리의 크기와는 당치도 않은 감투나 뒤집어 쓰고
우쭐거리자고 출가한 것이겠습니까?
부처님!
당신에게 올리는 이글도 이제는 그만 끝을 맺어야 겠습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높아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일 없이 조용하기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좀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대개가 유쾌한 대열에는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자신부터 유쾌한 기분으로 쓸 수는 없었기에.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의 입을 빌어서든지 이러한
자기비판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혼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귀촉도의 외침이라도 있어야겠습니다.
구도의 길에서 가장 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처세로서 위장할 것이 아니라,
시시로 자기위치를 돌이켜 보는 참회의 작업일 것입니다.
자기반성이 없는 생활에 밝은 미래를 기약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시대와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없는 종교라면
그것은 일고의 존재가치도 없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우리 강토에 들어온 지 1600년!
오늘처럼 이렇게 병든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물을 것도 없이 제자된 저희들 전체가 못난 탓입니다.
늘 당신에게 죄스럽고 또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처럼 뛰어난
당신의 가르침이 오늘날 저와 같은 제자를 잘못 두어 빛을 잃고
또 오해와 비난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밝히다시피 저의 이러한 작업이
이웃을 헐뜯기 위해서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입을 열면 벌써 그르친다는 말을 저는 늘 믿어오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입을 열어 한량없는 구업을 지은 것은
외람되게나마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고 싶은 저의 신념에서입니다.
한국불교의 건강은 저희들 제자의 한결같은 비원(悲願)입니다.
무관심처럼 비참한 대인관계는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무관심이 구도자의 주변에 뿌리내릴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수도 있습니다.
일체중생에게 주어진 당신의 자비가
무관심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주제넘게 큰소리로 지껄인 것입니다.
이 혼탁에서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비원(悲願)에서
버릇없이 당신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언제인가는 과감한 일대혁명이 없이는 당신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는 영영 질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박차고 나섰던
저 혼미한 브라만들에 대한 부정의 결의가 없고서는-.
위의 글에서 지나치리만큼 무차별한 사격을 가한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오늘의 현실을 제시하라는 뜻에서이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의 아픈 곳을 향해
자학적인 사격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한가지 밝혀드릴 것은, 얼마 전에 이글을 쓰다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스스로 중단해버리고 말았는데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저의 한 고마운 도반이 격려해준 힘을 얻어
다시 쓰게 된 것입니다.
비개인 그 어느 여름날처럼 당신 앞에 가지런히 서서
도업(道業)을 같이하는 청정한 인연에 조용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1964년 9월 어리석은 제자 법정 합장
출처 : 1964년 10월 11, 18일과 25일 3회에 걸쳐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에 실린 법정스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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