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의 향기

가난한 절이 그립다. - 법정스님/오두막 편지

마음정원(寂光) 2012. 2. 12. 20:05


    가난한 절이 그립다 옛 스승은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반드시 그 뜻을 잃는다. 예번의 출가 수행자는 한 벌 가사와 한 벌 바리때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려고 하지 않았다. 사는 집에 집착하지 않고, 옷이나 음식에도 생각을 두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살았기 대문에 오로지 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런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럽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생각 일으켜 살던 집에서 뛰쳐나와 입산 출가할 때는 빈손으로 온다.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빈손으로 오듯이,
    이 절 저 절로 옮겨다니면서 이런 일 저러 일에 관계하다 보니 걸리는 것도 많고 지닌 것도 많게 된 것이다. 지닌 것이 많을수록 수행의 길과는 점점 멀어진다. 출가 수행승을 다른 말로는 '비구'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에서 음으로 옮겨진 말인데 그 뜻은 거지乞士다. 인도에서 모든 수행자들은
    전통적으로 음식을 탁발에 의해 얻어먹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일반 거지와는 달리 빌어서 먹으면서도 그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밖으로는 음식을 빌어 육신을 돕고,
    안으로는 부처님의 법을 빌어 지혜 목숨慧命을 돕는다는 두 가지뜻이 있다. 이와 같은 거지들이 모여 사는 곳이 절이다. 새대의 흐름에 따라 옛날과 한결같을 수 없는 것은 수행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시대의 어떤 흐름 앞에서라도 그 근본 정신을 잃는다면
    수행자의 존재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수행자들이 사는 세계를 흔히 출세간出世間이라고 하는데, 생활양식이 세속이나 다름이 없다면 굳이 출세간이라고 말할 것이 무엇인가. 오늘날 산중이나 도시를 가릴 것 없이 수행자가 분수에 넘치고 흥청거리는 것은 뜻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해 온 바다. 나라 안이 온통 경제 위기로 인해 일터를 잃은 실업자가 무수히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살길이 막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지금 이런 참담한 현실을 망각한 채 씀씀이를 함부로 하면서 흥청거릴 때인가. 지난 봄, 볼 일이 생겨 몇 차례 내가 예전에 살던 절에 가서 2, 3일씩 묵고 온 적이 있다. 내가 혼자서 조촐히 살던 때와는 달리 모든 것이 넘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주의 물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옛 스승들은 한결같이 가르치신다. 배 고프고, 가난한 데서 수행자의 보리심이 싹트는 것이라고. 시주의 은혜를 많이 입으면 그 무게에 짓눌려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렵다. 휴정선사도 그의 <선가구감>에서 출가 수행자에게 간곡히 타일렀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생사를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갈등의 수렁에서 뛰쳐나와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다.' 가난한 절에서 살고 싶은 것이 내 소원이요, 염원이다.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이 수행자로서 본질적인 삶이라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주의 갸륵한 뜻으로 길상사를 세워 개원하던 날, 나는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요즘 절과 교회가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절만은 가난하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청정한 도량이 되엇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떤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그 시대와 후세에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시켰다. 또한 이 절은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사석에서 몇 차례 밝힌 바 있듯이,
    내 자신은 시주의 뜻을 받아들여 절을 일으키는 일로써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운영은 이 절에 몸담아 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절을 세우는 데에 함께 동참한 크고 작은 시주들에게 나는 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에서 기꺼이 참여한 시주의 공덕은
    이 도량이 존속되는 한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에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절은 어떤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종단의 공유물이라는 사실이다. 시주가 이 도량을 나에게 의탁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해서 어찌 내 개인의 절일 수 있겠는가. 길상사가 마치 내 개인 소유의 절인 줄로 알고 그동안 경향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도움을 청해 올 때마다 나는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낱낱이 응답을 못 해드린 점 이해해 주기 바란다.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의 오두막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 어디를 가보아도 내 그릇과 분수로는 넘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이 오두막을 거처로 삼고 있는 것이다. 거듭 밝히는 바이지만 나는 가난한 절이, 청정한 도량이 그립고 그립다. -= IMAGE 19 =-

    산문집 '오두막 편지'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법정 스님의 산문집입니다.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에서 일곱번 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