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편지

새해 아침 선우(善友)에게

마음정원(寂光) 2012. 1. 2. 08:55

새해 아침 선우(善友)에게-돌아보고 살펴보세-(법현스님.주간불교 2012.1.1일자 칼럼 원고)

 

 

새해 아침 선우(善友)에게-돌아보고 살펴보세-

 

 

불교는 앎(知),슬기(智),밝음(明)의 종교라네.

다르게 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말씀이 아닌가?

알아야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어둡지 않고 밝다네.

이런 가르침을 붓다의 입을 통한 말씀으로 하셨네.

물론, 표정과 눈짓, 동작과 침묵으로도 하셨지만

중요한 가르침은 다 말씀으로 하셨으니 불교는 말씀의 종교임을 알아야 하네.

말씀을 자세히 살피면 마음이 움직이고, 닦아지고, 그래서 밝아진다네.

그것을 일러 수행이라 한다네.

말씀을 모른다 할지라도 마음을 잘 닦아 밝아진다면 효과는 같다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고도 알아서 마음을 닦기는 매우 어렵다네.

45년간을 설했지만 한 말씀도 설하지 않았다는 글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기 때문에(以心傳心) 가르침 밖에 따로 전한 것(敎外別傳)이 있고,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붓다가 된다(見性成佛)는 말씀은

붓다께서 돌아가신 훨씬 뒤에 나온 이야기들이네.

싯다르타는 온갖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출가하여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쳐준 대로 다 해 보았네.

그러고도 모자라 자신만의 수행방법인 잘 살펴봄(또는 세밀히 살펴봄.vipasana)을 통하여

통찰지(洞察智)를 얻어 욕탐(欲貪)을 없앤 고요의 행복(nibbana.涅槃)을 누렸네.

그렇게 붓다가 되고도 늘 앞 쪽으로 대상을 향해 온마음(sati)을 갖추고 해야 할 일을 하셨다네.

이는 살핌을 강조하는 말이네.

그리고 ‘경전에 씌어 있다고, 옛날부터 내려온다고, 유력한 사람이 말한다고...’무조건 믿지 말라고 하셨네.

그럼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으며 따라야 하겠는가?

“붓다의 설법과 훈계를 들은 뒤 고요한 곳에 홀로앉아 골똘히 사유하며

게으르지 않으니 마음이 잘 해탈한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녹유경(鹿紐經)』등 여러 곳에서 누누이 강조하셨네.

바로 돌아봄과 살핌을 통해 옳다고 판단되었을 때

비로소 믿고 따르며 그렇게 할 때 여러 가지 묶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것이라네.

올 한 해 스스로 그리고 선우가 속한 단체에서 할 일이

목표는 제대로 정한 것인지, 의사를 모으고 추진하는 방법은 옳은지 살필 일이네.

그 효과가 모두를 위하는 것이고,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나중도 좋은 것인지,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나 문장의 표현은 거칠거나(惡) 속인 것(妄,紀,兩舌)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네.

아무리 목적이 좋다 할지라도

그것을 나타내고 설명하며 설득하는 말이나 문장이 좋지 않으면

그 결과도 좋게 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네.

잠깐 보고 듣기는 자극적이어서 눈과 귀를 자극할지는 모르나

오래가고 바르게 가지는 않네.

늦어도 바른 것이 좋다네.

아니 바른 것은 늦어 보일지 모르나 제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네.

불쏘시개로 태워야할 집이 있다고 하세.

곳곳에 불을 붙여야 불이 타는가?

몇 군데에 불이 붙으면 서서히 타들어가네.

그러면 전체가 다 붙을 때까지 계속 천천히 타들어 가는가?

그렇지 않네.

서서히 타들어가면서 집 안의 온도를 높이고 온도가 발화점에 이르면

“확!”하는 굉음과 함께 전체적으로 불이 붙어서

그 때는 불을 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네.

그것이 깨달음과 수행의 관계에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네.

이른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이 그것이네.

새삼스럽게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네만, 기억할 것은

1%라도 부족한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네.

1%의 부족을 채워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99%까지의 과정을 포함한 100%가 되는 바로 그 순간이네.

붓다도 6년간의 고행 또는 수억 겁의 인행(因行)이 있었지만

붓다가 된 것은 12월 8일 새벽 그 순간이었네.

그 이전까지는 보살(bodhisatta)일 뿐이었지.

재미있는 것은 붓다가 된 뒤에도 늘 닦았다는 것이네.

붓다가 되면 이전까지는 모르던 것을 알고,

하던 일은 단번에 그만두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네만

하던 일도 계속 했고. 밝음으로, 슬기롭게 했네.

심지어 2년간이나 말을 듣지 않는 제자들을 바라볼 때도 그랬네.

그 일을 겪으면서 붓다는 화합승가의 필요조건인

6화경(六和敬: 몸, 말, 뜻, 계율, 견해, 이익의 공유)을 말씀하셨지.

자기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바라 볼 때도 있었지만

그 때도 또한 밝음으로, 슬기롭게 바라보고 말씀하고 행동했네.

마음 쓸 일 하나 더. 전체를 태울 수 있는 발화점이나 끓이는 비등점을 넘지 않은 것은

희나리 같은 것이어서 타다 만 것이고 끓다 만 것이지 몰록 타고 다 끓은 것이 아니라는 것.

제대로 해 보고도 되지 않을 때 후회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뭐라 하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네.

요즘 말로 완전 연소하는 삶을 살아야만 그 결과에 관계없이 만족한 삶이네.

물론, 완전 연소하면 결과가 좋을 것이네.

하고자 하는 공부(수행), 일(활동), 사랑에 힘을 다 하세나.

그것이 돌아보고 살피는 삶이네.

그것이 불자의 삶이네.

법현(스님. 열린선원 원장, 태고종 전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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