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의 향기

시대의 등불이셨던 법정스님의 열반을 애도 드립니다..

마음정원(寂光) 2010. 3. 12. 15:10

시대의 등불이셨던 법정스님의 열반을 애도드립니다.

 

 

 

 

 

 

 

 

 시대의 등불이셨던 법정스님의 열반을 애도드립니다. 

 

애 도 문 

오늘 우리 종단의 큰스님이자, 무소유의 정신과 실천으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계신 법정스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버리고 영원한 해탈의 길에 드셨습니다. 우리 종단은 스님의 열반 앞에 애통한 마음을 감출 길 없으며 전 종도와 더불어 깊은 애도를 드립니다.

스님께서는 그동안 ‘무소유’의 지혜를 일러 주시고,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자의 본분을 지켜 온 큰 스승이셨습니다. 또한 스님은 일생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기시어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하셨습니다.

종도 여러분께서는 애통한 마음에 더해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의 정신을 받들어 수행정진에 가일층 진력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국민여러분께서도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차분하게 애도의 마음을 함께 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불기 2554년 3월 11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 승

 

 

    “장례의식 일체 행하지 말고

     승복 입은채로 다비해 달라”

 
      법정 스님, 11일 오후 길상사서 입적…13일 오전11시 송광사서 다비

  

일생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며 대중들에게 무소유(無所有)의 지혜를 일러주던 법정 스님이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5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평생 무소유의 삶을 가르치고 실천했던 법정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 대중들에게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제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주십시요”라는 말을 남겼다. 스님은 입적에 들 때까지 이처럼 무소유 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스님은 또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자신의 저서에서 약속한 대로 신문을 배달하던 배달부에게 전해줄 것을 상좌들에게 당부함으로써 어떠한 약속이든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의 사회 구현을 몸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또 『무소유』,『일기일회』등 종교를 초월해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스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은 평소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해왔다.

이같은 스님의 유지에 따라 송광사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3월 13일 오전 11시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다비할 예정이다. 또 일체의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추모객을 위한 분향소는 성북동 길상사 극락전과 설법전, 송광사와 불일암 등 4곳에 마련돼있으며 3월 12일 오후 12 송광사로 이동, 사자루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인 3월 13일 다비식을 갖는다.

길상사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는 스님의 유지와 『무소유』 중 ‘미리 쓰는 유서’에 담긴 내용에 따라 관과 수의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으며, 스님의 법체는 평소 사용하던 대나무 침대에 가사를 깔고 그 위에 모셨다.

 

법정 스님은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군에서 출생, 근대 고승으로 추앙받던 효봉 스님을 은사로 1954년 출가한 이래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해인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한 이후 무소유 정신을 강조하며 수행에 매진해왔다.

 

 

‘무소유’ 법정 스님은 누구인가

 

        연꽃과 같이 맑은 삶 사신 ‘영혼의 스승’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메아리를 뜻한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가꾸는데 앞장 선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진리의 길을 찾아 출가를 결심했다.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출가에 대한 스님의 변이다.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9년 해인전문강원을 수료하고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 뒤 스님은 <불교사전> 편찬 작업,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0년 초반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의 전신)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날카로운 필력을 드러냈다. 1972년 첫 에세이 집 <영혼의 모음>을 동서문화원에서 출판,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73년 6월에는 함석헌이 주도했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합세하면서 씨알의 소리의 큰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스님은 또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기관원이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 가 괴롭혔다.

 “피해자 처지에서 군사독재 당사자들을 향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핍박을 받는 처지였음에도 당시의 심정을 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위기에 봉착하자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조작 발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된다. 이에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했다. 그러자 독재 정권은 또다시 1975년, 이른바 제2 인혁당 사건(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을 벌인다. 도예종 등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인사들을 또 다시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그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바로 그 이튿날 여덟 사람 전원을 사형시키는 사법사상 유래가 없었던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목격한 법정 스님은 큰 충격을 받는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만든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법정 스님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산으로 들어가신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스님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무엇 때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75년 10월 스님은 거듭 털고 일어서는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갔다.

부도만 남아있던 불일암 터에 스님은 토굴을 다시 짓고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수행하듯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독서와 수행에 힘썼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저서가 바로 34년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무소유>이다.

1984년 스님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다. 4박 5일 일정으로 수련생들이 1,080배를 하게 하고, 윤좌 모임을 열어 참선 실수실참을 하게끔 매년 여름 실시되던 여름 선 수련회 기틀을 잡았다. 매년 7월과 8월, 불과 두 달간 열리는 수련회 연 참가 인원은 평균 500여 명으로 불자는 물론 타종교인들에게까지 큰 호응을 받았다. 송광사 수련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뒤 웬만한 큰 사찰들은 거의 여름철 선 수련회를 실시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스님은 다시 한 번 버리고 떠났다. 17년 간이나 살았던 정든 불일암을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 등쌀에 그조차 뒤로 하시고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들었다. 1992년 일이다.

1993년 7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을 모두 없어지는 기막힌 사실과 마주선다. 나라 지도자가 신앙하는 종교에 앞서 충성하려는 너무나 얄팍한 몇몇 사람 처사였음을 접한 스님은 아연실색했다. 그 어이없는 심정을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로 발표했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다시 한 번 세속 일에 관여하시게 된다. 날로 각박해져만 가고 메말라만 가는 우리 심성을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면서 살아가자는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한 것이다. 주변 친지들의 권유와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작은 역할이나마 하겠다며 1993년 8월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 시키고 1994년 1월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 10만장을 무료 배포하며 서울과 부산 이어 대구, 광주, 경남, 대전 등지에서 스님 최조의 대중 강연을 하며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뜻을 함께 하겠다는 회원들을 오늘까지 17년 째 이끌어 왔다.

한편 법정 스님이 늘 강조하고 실천했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이 성북동 대원각 터 7천여 평을 스님께 시주함에 따라 1997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가 개산되었다.

법정 스님의 이와 같은 발자취에 따라 오늘날 대중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無所有)를 몸소 실천하는 스님으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는 불교계의 어른 스님으로, 주옥같은 글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온 국민의 스승으로, 한평생 청정하고 올곧게 수행하며 대중들 영혼을 맑히는 이 시대의 큰 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처럼 법정 스님하면 떠올리게 되는 용어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낱말은 무소유다.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했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 이래 최근까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상좌와 지인들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했다. 이렇게 맑은 삶을 스님은 주옥같은 산문으로 풀어내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무엇보다 스님의 간결하면서도 쉬움 말씀은 일반 독자들이 불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데 큰 발자국을 남겼다. 1976년 범우사에서 펴낸 <무소유>는 초판 발행 한 뒤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명 에세이로 손꼽히고 있다. 그 밖에 <산에는 꽃이 피네>, <일기일회> 들은 수십만 독자가 찾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법정 스님의 주요 어록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에서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산방한담> 중에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에서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