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통찰 수행으로 지혜 키우기

마음정원(寂光) 2010. 2. 21. 15:17

통찰 수행으로 지혜 키우기


통찰은 인도말로 빤야panna라고 하며, 한문으로는 반야般若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반야심경의 반야가 바로 이것이며 다른 말로는 지혜라고도 한다.
통찰지혜는 깊이 꿰뚫어 아는 지혜며 여러 차원으로 아는 지혜이다.

 

 글  지장

 

 

나를 의식하는 명상으로 행복 찾기
평소 우리가 외부의 어떤 대상을 알고자 한다면 눈으로
보고 관찰하거나 손으로 만져 보고 맛을 보거나 냄새 등을 맡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 가고자 할 때는 자신의 내면을 보고 느끼고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감각기관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내면세계를 알고자 한다면 특별한 마음의 기능을 활용해야 한다. 그 기능은 사실 알고 보면 아주 특별하지는 않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자세로 있는지, 어떤 느낌과 감정 상태에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고 살피는 기능이다. 이것을 자각 기능, 알아차림, 혹은 내적 통찰 기능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나를 의식하는 기능은 너무나도 당연한 기능이며 자연스런 기능이다. 때문에 이런 기능을 써서 무슨 명상을 하고 자아를 찾고 행복을 찾을 수 있겠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나를 의식하는 기능은 계발이 되기 전에는 단순히 나의 표면적인 모습을 의식하거나 일시적으로 나를 느끼는 수준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이 계발되고 강화돼 자신의 내면을 깊이 꿰뚫어 보는 통찰의 수준으로 전환된다면 그 때부터 또 다른 차원의 나를 보고 알게 된다. 이 기능은 노력하면 할수록 몸의 근육처럼 지속적으로 키워 나갈 수 있다.

 

 

통찰을 통해 나를 알아보자
어떤 대상을 아는 것에는 세 종류가 있다.

단순히 아는 것과 이면에 있는 의미를 함께 아는 것, 그리고 다차원으로 알아 이해를 수반하며 아는 것이다.

단순히 아는 것을 불교에서는 상想이라 이르며 인식작용이라 번역한다. 이면에 있는 의미를 함께 아는 것은 식識이라 하며

알음알이라고 번역한다. 다차원으로 알아 이해를 수반하며 아는 것을 반야 혹은 통찰지라 한다.


이 세 가지를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어린 아이가 십 원짜리 동전을 보면 노랗고 둥글며 단단한 것으로만 안다. 하지만 어른이 이 동전을 보면 이것은 돈이며 얼마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금속세공인이 동전을 보면 구리와 다른 물질이 합금되어 있으며 제작할 때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갔을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어린 아이가 보는 방법이 단순히 아는 것이고 어른이 보는 방식은 이면에 있는 의미를 함께 아는 것이다. 그리고 금속 세공인이 보는 방식이 통찰의 방식이다.

 


통찰하면서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의 특성을 같이 알면서 보게 된다.

계속해서 생겨나고 사라지며, 불만족스럽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작용하고 있는 특성을 알면서 동시에 대상을 인식한다.

처음 나를 지속적으로 의식하거나 지켜보면 나의 존재하는 모습이지만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진정 내 자신이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의식하지 않고 살아 왔다. 다른 사람에 의해 묘사되는, 거울에 비춰지는 겉모습을, 혹은 생각하고 있는 주체를 자신의 모습이라 고집하고 살아 온 것이다. 때문에 또 다른 시각에서 혹은 차원에서 느껴지고 바라봐지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초기에는 짜증과 답답함이 수반된다. 더 진지하게 나를 알아 껍데기를 벗어 버리거나 가식을 포기하면서 점차 가벼운 마음 상태로 바꿔 가야 한다.

 


명상 수행 초기에는 나의 외형적인 모습과 익숙한 느낌들을 만나게 된다.

즉 몸의 자세나 형태, 움직임, 일반적인 느낌, 감정, 생각 등을 알게 된다.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는 모습,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 코끝이나 가슴, 배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다리의 저림, 허리의 통증, 지루함, 졸림, 혹은 걸을 때 양 발의 움직임, 걷는 행위, 발바닥에 생기는 느낌, 찻잔을 들고 있는 느낌, 차를 우리는 동작 등이다. 명상이 진행되면서 점차 나를 의식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 힘이 강화되면 이런 외형적이거나 익숙한 느낌들을 의식하는 것에서 전체적인 내면의 느낌, 있는 그대로의 순간의 느낌, 상태까지도 의식하게 된다.


호흡을 느끼더라도 코끝에서 느껴지던 느낌이 마치 온몸으로 호흡을 하듯 느껴지거나 몸 구석구석이 전체적인 덩어리로 느껴진다.

무언가 꽉 찬 상태로 의식된다. 혹은 찻잔을 들고 손의 느낌을 느낄 때 손과 찻잔의 형태는 의식이 안 되고 오직 한 느낌만이 느껴진다.

그 느낌이 점차 확대되기도 한다. 이때부터 실질적인 통찰이 시작된다고 본다. 그냥 단순히 자신을 의식하는 차원보다는 발전된 양상이다. 주로 내면의 전반적인 느낌을 강하게 의식하는 단계이지만 힘 있게 대상을 지켜보는 측면이 더 강하다. 대상을 좀 더 정확하게 느끼면서 그 특성을 알아 가면 제대로 통찰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통찰의 과정은 나 자신을 잘 보고 아는 것이며 나를 올바르게 잘 알고 잘 이해하는 것이 바로 반야지혜이다.

 

 

자신의 모순과 한계 깨닫기
명상에 힘이 생겨 냉철하게 자신의 현재 존재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어느 순간 자신이 지닌 모순과 한계를 깨닫게 된다.

모순과 한계를 깨달았다고 결정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을 이제 올바로 보고 알게 됐다는 것이다. 또 자신을 아는 만큼 다른 사람과 세상을 더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타인을 올바로 알 수 없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또한 올바른 시각으로 볼 수 없다. 자신이 가진 한계와 모순을 모르기 때문에 편견과 고정 관념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기준에 많이 접근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다고 반응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와 모순을 보고 인정하게 되면 타인이 가진 한계와 모순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된다.

꼭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자기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완벽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엉뚱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상하고 엉뚱하다고 봐왔던 사람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사고방식과 세계관,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아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확실히 인정하고 충분히 받아들이는 수준으로 의식의 전환이 생긴다.


지장스님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차와 도가 둘이 아니라 여겨 초의차명상원을 열고 차와 명상에 대한 강의와 수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