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의 향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육조혜능

마음정원(寂光) 2009. 4. 9. 02:09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육조혜능

    정*혜

     

    나의 법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정과 혜가 다르다 하지 말라. 정과 혜는 하나요,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본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다.

    곧 혜 안에 정이 있고 정 안에 혜가 있다. 만약 이 뜻을 알면

    곧 정과 혜를 함께 배운다.

    도를 배우는 가람은 먼저 정이 있고서야 혜가 나온다거나

    혜가 있은 뒤에 정이 나온다거나 하여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소견은 법에 두 모양을 두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면서 마음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닦아 나가는 데 말다툼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앞 뒤를 다툰다면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므로 승부가 없다.
    정과 혜는 등과 불빛과 같다. 등이 있으면 불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불빛이 없다.

    등은 불빛의 본체이고 불빛은 등의 작용이므로 등과

    불빛의 이름은 다르나, 본체는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그와 같다.

    일행삼매(一行三昧)

    일행삼매란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간에 항상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라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 아첨하고 굽신거리면서 입으로는 곧은 체 하거나,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마음은 곧지 않은 그런 행동은

    하지 말라.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사물에 걸림이 없게 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법에 집착한 나머지 일행삼매를 가리켜 가만히

    앉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무정(無情)과 같아서 오히려 도를 막는 인연이 된다.

    도는 반드시 통하여 흐르게 해야 하는데 도리어 막히게 하면

    되겠는가?
    마음이 무엇에도 걸리지 않으면 도가 곧 통해 흐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에 걸린다면 이것은 스스로 얽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고요히 마음을 관해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게 하면 이것이 곧 공(功)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집착해 전도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치는 것은 크게

    그릇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념(無念)과 무상(無相)

    본래 마음 가르침에는 일시에 깨치는 돈(頓)과 점차로 닦아서

    깨치는 점(漸)이 없다. 사람의 바탕이란 총명하고 우둔함이 있어서

    우둔한 사람은 차츰 닦아나가고 총명한 사람은 단번에 깨닫는다.

    그러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헛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나의 이 법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무념으로 종(宗)을 삼고,

    무상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을 삼았다.

    무상이란 상에서 상을 떠남이요, 무념이란 염에서 염이 없음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원수거나 간에

    서로 말을 주고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 오더라도 모두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 칠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과 생각사이에 지나간 경계를 생각하지 말라. 만약 지나간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생각이 잇달아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얽매임이다. 모든 존재에 생각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다.
    모든 대상에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니,

    제 생각에 항상 모든 대상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아주 없애

    버린다면 한 생각 끊어지면서 곧 죽어 딴 곳에 태어나니,

    이것은 큰 착오이므로 배우는 사람은 명심해야 한다.

    만약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잘못되게 만든다. 또 자신이 어리석어 보지 못하면서

    부처님 말씀을 비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념을 종으로 삼는 것이다.
    무념으로 종을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 견성했다 하면서 대사에 생각을 두고,

    그릇된 소견을 일으켜 온갖 지저분한 망상을 낸다.

    자성(自性)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얻을 것이 있다 하여 망녕되이 화복을 말하면

    이것이 곧 지저분한 그릇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으로 종을 삼는 것이다.
    그러면 무란 무엇을 없앤다는 것이며, 염이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무란 두가지 모양이 업고 쓸데없는 망상이 없는 것이다.

    염이란 진여(眞如)의 참된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란 곧 염의 본체이고 염은 진여의 작용이므로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지 눈, 귀, 코, 혀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여가 없다면 눈과 귀와 소리와 물질등이 곧

    없어질 것이다.
    진여의 자성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일체의 대상에 물들지 않아 참된 성품은 자유자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지만

    진실되어 움직임이 없다"고 한 것이다.

    참회품(懺悔品)

    이 일은 모름지기 자성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니 어느 때든지

    순간순간 그 마음을 밝혀 스스로 닦고 행하면 자기의 법신을 보고

    자기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를 건질 것이니 항상 삼가해야 한다.
    먼저 자성의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을 전할까한다.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자기 마음속에 그릇됨이 없고 악함이 없고

    질투와 탐욕과 성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여러가지 선악의 환경을 보더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혜향(慧香)이니, 자기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항상 지혜로서

    제 성품을 비춰보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설사 착한 일을하더라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고, 손위를 공경하고 손 아래를 사랑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

    넷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마음에 반연함이 없어서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유자재로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마음이 선과 악에

    거리낌이 없다 해도 공에 빠져 고요함만을 지니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자기 본심을 알고 부처의 진리를

    통달해야 빛과 조화되고 사물을 대하더라도 나와 남의 구별이 없이 바른 지혜의

    참된 성품에 이른다.
    이와 같은 향은 저마다 자기 마음에서 피워야 하며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이제 그대들에게 무상참회(無相懺悔)를 말해주어 삼세의 죄과를

    없애고 몸과 말과 생각의 세가지 업을 청정하게 해 줄 것이니

    나를 따라 다음과 같이 외도록 하라.

    "저로 하여금 순간순간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곳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옛적부터 나쁜 짓과 미련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일시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순간순간마다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곳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옛적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일시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순간순간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옛적부터 지오온 나쁜 짓과 질투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일시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무상참회다. 참회란 무엇인가?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다. 전날에 지은 악업,

    즉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하고 질투한 죄를 뉘우쳐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앞으로 범하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달아 끊어 버리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지난 허물은 뉘우칠 줄 알지만 앞으로 닥칠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달아 생기게 되니 이것을 어찌 참회라 할

    것인가?
    이미 참회 하였다면 이제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세워야 한다.

     

    "내 마음의 중생이 끝 없어도 결단코 제도하리라.
    내 마음의 번뇌가 다함이 없어도 결단코 끊으리라.
    내 마음의 법문이 한 없어도 결단코 배우리라.
    내 마음의 불도 위없어도 결단코 이루리라."

    중생을 제도한다 함은 내가 그대들을 제도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마음 속의 중생이란 그릇되고 어두운 생각, 착하지 못한 생각,

    질투하는 생각, 악독한 생각, 이와같은 생각이 모두 중생이다.

    저마다 자기 마음을 제도하는 이것이 참된 제도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기 마음을 제도할 수 있는가.

    자기 마음속의 그릇된 소견과 번뇌와 무지를 바른 견해로써

    제도한다. 바른 견해는 지혜로써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스스로

    건지게 한다. 그릇됨은 올바름으로, 미혹은 깨달음으로,

    어리석음은 지혜로, 악은 선으로 돌리는 이것이 참다운 제도다.

    그리고 번뇌를 끊는다함은 자성의 지혜로 허망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고, 법문을 배운다 함은 스스로 성품을 보아 항상 바른 법을

    행하는 것이다. 또 불도를 이룬다 함은 마음을 낮추어 바르게

    행동하며, 미혹도 버리고 깨달음에서도 떠나 항상 밝은 지혜를

    내고,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함께 없애 바로 불성을 본다는

    것이다.

    이제 네가지의 큰 서원을 세운 이는 불(佛),법(法),승(僧)의

    자성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불이란 깨달음이고, 법이란 올바름이며, 승이란 청정함을 말한다.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그릇되고 어두움을 내지 않고, 욕심을

    적게하고 만족하게 생각하여 재물과 색을 떠난다면

    이것은 양족존(兩足尊 : 부처님)이다.
    마음이 올바름에 귀의하여 그릇된 소견이 없으면 남과 나를

    따지는 일도, 탐욕과 애욕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욕존(離欲尊 : 법)이다.
    마음이 청정에 귀의하면 온갖 더러운 것과 애욕에 물들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중중존(衆中尊 : 스님)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인데,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밤낮으로 삼귀계를 받는다고 한다. 만약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면 그 부처님은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면

    무엇을 의지해 돌아갈 것인가? 그러니 귀의한다는 말이 우습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신의 부처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없다.

    이제 스스로 깨달았다면 저마다 제 마음의 삼보에 귀의하라.

    안으로 심성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 남을 공경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다.

    기연품(機緣品)

    법달은 홍주 사람인데,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法華經)>

    을 읽었다. 어느 날 조사를 뵙고 절을 했으나, 머리를 깊이 숙이지

    않았다. 조사가 꾸짖었다.

     

    "그렇게 머리 숙이기가 싫으면 무엇하러 절을 하느냐? 네 마음

    속에 무엇아 하나 들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익혔는가?"

    "법화경을 이미 삼천번 읽었습니다"

    "네가 설마 만번을 읽어 겨우 뜻을 통달 했다 하더라도 그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허물이 되는 줄 모르는구나." 조사가

    법달에게 게송을 들려 주었다.

    "절하는 것은 아만심을 꺽자는 것, 어째서 머리를 깊이 숙이지

    않는가. ″나″라는 생각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나″라는 생각

    버리면 복이 한 없는 것을."

    조사께서 다시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법달이라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리도 일찍 법을 통달했는가?"

     

    조사께서 다시 게송을 들려주었다.

    "네 이제 이름을 법달이라 하니 그동안 얼마나 힘써 외웠는가.

    껍데기로 외우는 것은 소리만 있을뿐,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되리.

    네게 이제 인연이 있어 너를 위해 말해 주리라.

    부처는 말이 없다는 것을 믿으면 절로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

    이 게송을 들은 법달은 깊이 뉘우치며 말했다.

    "앞으로는 반드시 공경하겠습니다.

    제가 <법화경>을 외우긴 했으나, 경 뜻을 알지 못해 항상 의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스님께서 크신 지혜로 경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법을 통달한 법달도 자기 마음은 모르는구나.

    경에는 본래 의심이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다.

    너는 <법화경>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저는 어둡고 둔해서 글자만 외웠을 뿐 뜻은 알지 못합니다."

     

    "나는 글자를 모르니 어디 그 경을 한번 읽어보아라.

    듣고서 풀이해 주겠다."

    법달이 소리 높여 읽다가 <비유품>에 이르자 조사는

    그만 읽으라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경은 본래 인연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한 것이다.

    비록 많은 비유를 들었으나 같은 뜻이다. 경에 ″모든 부처님이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였다.″ 하였다. 큰 인연이란

    바로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밖으로는 형상에 집착하고, 안으로는 공에 떨어져 있다.

    만약 형상에서 형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난다면 안과 밖이

    함께 어둡지 않을 것이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리니, 이것이 부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만약 네가 경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이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

    것이지 중생의 분수에 맞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을 헐뜯고 경전을 비방하는

    일이 된다.
    너는 이제 부처님의 지혜란 바로 자신의 마음이며,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네가 그동안 애써 외운 것을 대단하게

    여기며 자랑으로 삼는다면 마치 소가 제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그러면 뜻만 알면 애써 외우지 않아도 됩니까?"

     

    "경을 어찌 외우지 말라 하겠느냐? 다만 막히고 트임이 자신에게

    달렸고, 더하거나 덜하는 것도 자신에게 달렸으니, 입으로만

    외우고 실제로 행동한다면 이것이 곧 경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만 외우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경이

    사람을 읽는 것이다."

    법달은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반야품(般若品)

    보리와 반야의 성품은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으나, 마음이

    어두워서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자성을 보아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불성은 차별이 없으나, 단지 막히고 트임이 같지 않으므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있게 된 것이다.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 법을 설하여 그대들에게 지혜를 얻게 할

    것이니 정신차려 잘 들어라.

     

    사람들이 입으로는 종일 반야를 말하면서도 자성 반야는 알지

    못한다. 마치 음식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도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입으로만 공을 말한다면 만겁을 지나더라도 견성할

    수 없다.

    마하반야바라밀은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지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만

    외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허깨비와 같이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행한다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한다. 본 성품이 부처요,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다.

     

    마하란 크다는 뜻이니, 마음의 광대함이 허공과 같아 꼴이 없다는

    말이다. 모나거나 둥글지도 않으며 크거나 작지도 않다.

    또한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것과 상관 없으며, 위 아래와 길고

    짧음도 없고, 성내고 기뻐함도 없고,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함도

    없다. 머리도 꼬리도 없는 것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다

    허공과 같다. 사람들의 미묘한 성품은 본래 비어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므로 자성의 진공역시 그와 같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공에 걸리지 말라. 무엇보다 공에 걸려서는 안된다. 만약 아무

    생각도 없이 멍청히 앉아만 있으면 곧 무기공에 떨어질 것이다.

    허공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해와 달과 별, 산과 물과

    풀과 나무, 악인, 선인, 극락, 지옥, 그리고 큰 바다와 수미산도 다

    이 허공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성품이 빈 것도 이와 같다.

    자성이 모든 법을 포함하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다.

    만법은 사람들의 성품속에 있다.

    만약 남의 선악을 보더라도 취하고 버리는 분별이 없이 거기에

    물들지 않으면 마음이 허공과 같아질 것이다. 이것이 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 어리것은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도 없이 고요히

    앉아서 스스로 크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과는 말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롯된 소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넓고

    커서 법계에 두루 차가 있다. 쓸 때는 아주 분명하고 응용에 따라

    일체를 알며,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다.

    가고 옴에 자유로워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곧 반야다.

    모든 반야의 지혜가 다 자성에서 나온 것이며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마음을 쓸 때 잘못이 없으면 이것이 참된 성품의 씀씀이다.

    하나가 참될 때 모든 것이 참되다.

     

    반야는 곧 지혜다. 언제 어디서나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아 항상

    지혜롭게 행동하면 이것이 곧 반야행이다. 한 생각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 슬기로우면 반야가 일어난다.

    대개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반야를 보지 못하고 입으로만 곧잘

    말하지만 마음은 늘 어리석다. 반야는 형상이 없다.

    슬기로운 마음이 곧 반야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는 말로서 생멸을 떠난다는 뜻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물에서 일어나는 물결과 같으니

    이것이 차안이요, 대상에 걸림이 없으면 생멸이 없어 물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피안이다.

    그러므로 범부가 곧 부처며 번뇌가 곧 보리다. 앞생각이 어두웠을

    때는 범부였지만 뒷생각이 깨달으면 곧 부처다. 앞생각이 대상에

    집착했을 때는 번뇌지만 뒷생각이 대상을 떠나면 곧 보리다.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귀해 으뜸가는 경지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고 또한 머무르는 것도 아니지만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여기에서 온다.

     

    좌선품(坐禪品)

     

    육조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했다.
    "선지식아!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느냐?

    이 법 안에서는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다.

    밖으로 모든 선악의 경계를 만나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 하며, 안으로 자성이 동요함이 없음을 보는 것을 선이라 한다.

     

    선지식아!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느냐?

    밖으로 형상을 떠나게 되면 선이 되고, 안으로 혼란스러움이 없는

    것이 정이다. 만약 밖으로 형상에 집착하면 마음이 혼란스럽고

    형상을 버리면 마음이 안정된다.
    본성은 스스로 깨끗하여 정 가운데 있지만 바깥의 사물을

    대하여도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으면 이것이 참된 정이다.

     

    선지식아! 밖으로 형상을 떠나는 것이 선이요, 안으로 혼란스럽지

    않음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하고 안으로 정한 것이 바로 선정이다.

    <보살계경>에 ″나의 본성은 원래 청정하다.″하였다.
    선지식아! 생각 생각마다 자기 본성의 청정함을 보고 스스로

    수행하며 불도를 이루게 하라.
    그러나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집착이 없는 것이요, 깨끗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동요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란 원래 망령된 것이기 때문에 집착 할 것이 없다. 또 사람의 성품은

    청정하지만 망념으로 인해 진여가 덮여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망상만 없애 버리면 스스로가 청정해지는데 다시 청정

    함에 집착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도리어 청정함을 잃어버린다.

    망이란 본래 처소가 없으니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 곧 망념이다.
    청정은 형상이 없는데 청정한데에 집착하는 것을 공부라 여긴다면

    스스로 본성을 막고 도리어 청정한 것에 속박이 되고 만다.

     

    선지식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닦는 이는 다른 사람의 선악과

    시비와 허물을 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곧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지식아!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만 열면

    남의 장단점과 좋고 나쁨을 따지므로 도와 등지게 된다.

    만약 마음에 집착함이 있거나 청정한 것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도를 막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