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熏修)! 불법을 수행하여 해탈하는 길에 백천 가지 삼매 법문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큰 가닥으로 잡아 이야기하면 참선(參禪)·염불(念佛)·간경(看經)·주력(呪力)의 네 가지 수행으로 압축할 수 있다.
서울 장안에 들어가려고 하면 동대문·남대문·서대문·북대문 중 어느 문이든 통과해야 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계신 열반의 궁전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이 네 가지 수행법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부지런히 밀고 나아가면 마침내 불국(佛國)의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이들 네 가지 수행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격외향상(格外向上)의 참선문
4대문 가운데 남대문에 해당하는 참선문(參禪門)은 일반적으로 격외향상문(格外向上門)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수행이 한 계단 한 계단씩을 밟아 위로 올라가는 것임에 비해, 참선을 하게 되면, 단번에 최상의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여 '격외의 향상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참선법은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을 잡는 방법'이다. 우리 자신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몸뚱이는 자동차 자체와 마찬가지요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은 것이다.
곧 운전수가 참된 '나'이지, 자동차와 같은 이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동차 생각해보라. 공장에서 갓 나올 때는 윤이 나고 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고물이 되기 시작하고, 오래 사용하여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면 폐차를 해야 한다. 이 몸뚱이도 총각·처녀 시절에는 잘나고 예쁘다고 큰소리 치고 다니지만, 늙어지면 별수가 없다. 늙고 병들어 수명이 다하면 버려야지,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佛法)이란 무엇인가? 껍데기인 자동차가 아니라 운전수인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불법이다. 곧 부처님께서 일평생 동안 설하신 것이 모두 이 마음자리를 찾게끔 이끄는 가르침이었다. 이에 비해 참선법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자리를 직접 찾아나서는 수행법이다
참선은 중국에서 확립된 부처님 설법 밖의 수행법으로, 간화선(看話禪)가 묵조선(默照禪)이라는 두 개의 큰 가닥이 있다. 묵조선은 묵묵히 자기 마음자리를 돌아보는 수행법이고, 간화선은 화두에 의지하여 닦는 선법으로, 달리 화두선(話頭禪)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간화선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해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화두선법이다.
그렇다면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화두의 '話'는 '말씀 화(話)'자로서 말이라는 뜻이고, '頭'는 '머리 두(頭)'자로 앞서가는 것','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흔히 책의 머리말을 '서두(序頭)'라고 하듯이,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화두는 달리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공안의 '공 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案'은 곧 '방안'이다. 따라서 공안은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복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이 방법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는 언어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계합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에 백만억 대중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녹야원에서 시작하여 이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未회說一字]."
바로 평생을 설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 방편이요, 약방문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약방문이 병을 고치는 약은 아니니라 불이라고 말하여도 입이 타는 것이 아니듯이
比是濟世之醫方
非療病之良藥
道火未曾燒却口
아무리 약방문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약방문만으로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약방문을 보고 자기 병에 맞는 약을 지어 먹을 때에만 병은 낫게 되는 것이다. 설혹 팔만대장경을 다 외웠다 할지라도 그것은 약방문을 외운 것일 뿐, 약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약방문을 모르더라도 약만 먹으면 병은 나을 수 있다. 그 약이 바로 언어 이전의 화두이며,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 수행법이 그 약을 먹는 일인 것이다.
이제 화두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가 동관원(東觀院)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수행승 문원(文遠)이 개를 안고 와서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無]."
이것이 화두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하셨다. 그렇다면 개에게는 틀림없이 불성이 있고, 불성이 있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단 한마디 '無'라는 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조주선사가 엉뚱한 답을 주신 것은 아니다. 조주선사의 깨달은 경지에서 곧바로 말씀하신 것이요, 언어 이전의 참된 답을 일러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조주선사께서 '무'라고 하신 까닭을 확실히 알면 그는 조주선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곧 조주선사와 하나가 되어 대오(大悟)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주선사께서 '무'라고 하신 까닭을 이해하고 못한다. 그러므로 화두법에 의지하여 가장 정확한 답을 얻어야 한다. 머리를 굴려서 얻는 해답으로는 안된다. 철두철미하게 의심하고, 의심의 삼매 속에 들어가 해답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선사는 어째서 '무'라고 하였는가?"
"틀림없이 개에게는 불성이 있는데, 왜 조주선사는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인가?"
"무?"
"?"
이와같은 "?", 이와같은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대의단(大疑團)을 갖는 것, 크나큰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화두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것을 매우 궁금하게 여긴다. 그러나 화두 드는 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일념으로 간절히 참구(參究)하는 것!' 이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 절(切)!' 이것이야말로 화두법문·참선법문의 가장 요긴한 방법이다. 간절한 일념으로 크게 의심을 일으켜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화두법의 가장 요긴한 점이요,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흙이 크면 부처가 크고, 물이 높으면 배가 높이 뜬다."는 속담과 같이, 의심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큰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막상 화두를 잡고 있으면 쉽게 화두에 집중하지 못한다. 마치 놋젓가락을 가지고 계란을 잡으려고 할 때 요리조리 미끄러지고 빠져나가듯이,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망상이 자꾸만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해서는 물론 안된다. 오히려 화두가 잘되지 않으면 '송(誦)'이라도 해야 한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듯이 속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誦話頭)를 꾸준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 염(念)'자의 염화두(念話頭)가 된다.
우리는 흔히 '염불을 한다'고 하면 목탁을 두드리며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구불(口佛)이지 염불(念佛)이 아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으로 꾸준히 하다보면, '생각 염(念)'자 염불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같이 마음속으로 송화두를 꾸준히 하다보면,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목구멍 속에서 화두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고, 그것이 계속되면 마침내는 염화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송화두·염화두를 놓치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일을 하면서도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看話頭)가 되는 것이다.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촉발(觸發)하면 홀연히 참 의심[眞疑]이 발기(發起)되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大無心)에 들게 되는데 비로소 이를 참선화두(參禪話頭)라 하는 것이다 .참화두(參話頭)만 되면 깨침은 진정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참화두! 어떤 것이 진짜 참선인가?
화두가 또렷이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꾸나 항상 참화두가 되는 경지가 진짜 참선의 경지이다. 그와같은 참화두의 경지에 이르면 누구나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하게 된다.
정녕, 참선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절한 의심이다. 화두에는 좋은 화두, 나쁜 화두가 따로 없다. 초점은 의심이다. 간절히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잡는 것이 최상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할 때 모든 문제는 저절로 사라진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삼매에 이르면 저절로 깨달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여기까지 읽은 불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참선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참선이야말로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참 생명, 참된 주인공을 찾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하는 것이다. 하루에 30분씩이라도 꾸준히 참선을 하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밝아지게 되어, 집중력이 놓아지고 판단력이 빨라져서 생활 또한 보다 윤택하게 꾸려갈 수 있게 된다. 곧 참선할 때의 집중력이 생활에 그대로 응용되어 갖가지 좋은 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부디 능력껏 참선공부를 행하여 자기의 참 생명을 밝혀보기 바란다.
염불왕생문(念佛往生門)
두 번째의 염불왕생문은 염불을 하여 정토(淨土)에 왕생하려는 수행방법으로, 서대문에 해당한다. 이 염불수행법이 크게 발달한 것은 중국 진나라 때부터이다. 혜원(慧遠, 334∼416)법사가 백련사(白蓮社)를 조직하여 염불수행을 적극 권유함으로써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도 예배하고 기도하는 수행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처님을 지극히 생각하고 염불하는 길도 있었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십육관경>>에는 염불수행법이 생겨나게 된 까닭과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극락왕생 염불법이 자세히 설하여져 있다. 이는 염불수행법의 지침이 되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마음에 깊이 새겨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하기 바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80년 생애 끝 무렵이 가까웠을 때의 일이다. 마갈타국의 아자아타 태자는 데바닷타의 간교한 꼬임에 빠져 부왕인 빔비사아라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왕을 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음식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빔비사아라 왕의 부인 바이데히이는 몸을 깨끗이 씻은 후 볶은 찹쌀가루를 벌꿀로 버무려서 몸에 바르고 감옥으로 들어가, 찹쌀가루를 먹임으로써 왕의 주림을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아자아타는 분노하면서 어머니를 죽이려 하였으나, 중신들의 간곡한 만류로 궁에 감금하고 출입을 못하게 감시하였다. 바이데히이 부인은 분함과 억울함을 참으며, 슬픔과 탄식 속에서 부처님이 계신 깃자쿠우타산을 바라보며 부처님 뵈옵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빗방울 같은 눈물을 흘리며 절을 드리고 있을 때 부처님은 신통으로 부인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고, 부인은 부처님 앞에서 흐느껴 울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무슨 죄보로 이와 같은 불효 악자(惡子)를 낳게 되었나이까? 저는 이 천박하고 악독한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이 세상은 지옥·아귀·축생이 꽉 차있는 좋지 못한 세상입니다. 청컨대, 저에게 깨끗한 세계를 보여 주시옵소서."
이에 부처님은 백호(白毫) 광명을 뿜어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 정토(淨土)를 남김없이 보여주셨다. 그 하나하나의 세계는 모두 깨끗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었으나, 부인은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가 가장 좋다고 하며,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시므로 아미타불의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극락세계를 주야로 생각하며 세 가지 복업을 닦을 것을……. 그리고 그 세 가지 복업이 ① 자비심을 깊이 가지고 10선(善)을 지킬 것, ② 삼보에 귀의하고 계행(戒行)을 지킬 것, ③ 인과의 이치를 믿고 경전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도 닦을 것을 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거느린 아미타불이 모습을 나타내어 기뻐하는 대중들에게 석가모니불의 말씀이 옳음을 증명해 보이셨고, 석가모니불께서는 극락왕생을 위해서 미타염불로 정진할 후인들을 생각하여 그 염불법을 조용히 일러주셨다.
"바이데히이여, 저 부처님을 주야로 생각하라. 저 부처님의 몸은 법계(法界)에 가득 차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도 들어가 계신다. 그러므로 저 부처님을 생각할 때의 그 마음은 진실로 원만한 상호(相好)를 갖춘 부처인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란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의 마음이 부처를 생각하면 그 마음 그대로가 부처가 아닌냐? 그러므로 너희들이 아미타불을 일심으로 지극히 생각하면 모든 공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기만 하여도 끝없는 무명번뇌의 미혹에 들어가는 죄를 제하게 되리니, 생각하고 잊지 아니하는 이의 공덕은 말할 것 없다.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서 깨끗한 연꽃이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그 벗이 되고, 마침내는 극락정토에 가서 나게 되리라."
왕후 바이데히이는 풍족과 행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인과의 수레바퀴 속에서 피붙이의 손에 수모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어야 했고, 급기야는 이 세상의 추악한 존재 양상에까지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부처님의 자비 아래 선택한 정토가 극락이요, 아미타 염불법이다.
물론 염불을 한다고 하여 꼭 '아미타불'만을 염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허약한 이라면 약사여래를 외워도 좋고, 현세의 행복이 급하면 관세음보살을, 먼저 가신 분들을 천도하고 싶으면 지장보살을 , 지혜를 이루고자 하면 비로자나불이나 문수보살을 염하여도 좋다.
실로 예로부터 전래되는 염불법은 수없이 많다. 입으로만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는가 하면, 고요히 앉아 부처님의 형상을 관념(觀念)하는 관상염불(觀相念佛)도 있고, 일체만유의 진실한 자성(自性)인 법신(法身)을 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도 있다. 그리고 좌선할 때처럼 고요히 앉아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정업염불(定業念佛)과 ,가나 있으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같이 염불하는 산업염불(散業念佛)도 있으며, 더러운 세계를 싫어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며 염불하는 유상업염불(有相業念佛)이 있는가 하면, 비록 염불하여 정토를 구하나 자기 몸이 곧 정토라고 보는 무상업염불(無相業念佛)도 있다.
내가 불자들에게 많이 권하는 것은 한 숨에 108번 불보살의 명호를 외우는 염불법이다. 이 108염불법은 어떻게 하는가?
먼저 허리를 쭉 펴서 심호흡을 세 번 이상 하고 숨을 깊이 들이킨 다음, 꽉 찬 숨을 아껴서 한번의 숨을 다 내쉬는 동안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을 108번 부르는 것이다(이하 관세음보살로 통일함). 이때 108염주를 쥐고 있다가 한번 염불할 때마다 한 알씩 돌리면 된다. 왜 한 숨에 108번을 부르라는 것인가? 천천히 부르면 잡념이 많이 생기지만, 한 숨에 아주 빨리 108번을 부르면 집중이 잘 되고, 간절한 마음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서 천천히 시작하여 서너 번 지나면 점점 빨리 불러, 마침내는 한번 한 번 부르는 '관세음보살' 소리가 앞 뒤 간격이 없을 만큼 빠르게 불러야 한다. '나'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지만, 옆에서 듣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빨리!
이렇게 빨리 부르면 능히 한 숨에 108번을 부를 수 있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30번, 40번밖에 부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능력껏 부르고 숨을 깊이 들이키면서 속으로 소원을 세 번씩 기원한다. 그리고 다시 앞의 요령대로 관세음보살을 108번 부르고 기원, 또 108번 부르고 기원…… . 이와같이 세 차례 또는 일곱 차례 반복하면 자기 암시가 되어 자신감도 생기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능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한 숨에 108번 이상을 염할 수 있게 되면, 그는 이미 염불로 인한 염력(念力)이 생긴 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염력이 생긴 자라면 참선수행을 하는 것도 좋고, 간경(看經) 수행 쪽으로 방향을 돌려 봄도 바람직하다.
또한 사람들 중에는 중병에 걸렸다거나 갑자기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했다거나 뜻하지 않은 재앙을 처하게 되어 염불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매우 다급한 경우에 처한 분들의 기도는 결코 한가할 수가 없다. 애가 타고, 애간장이 녹아날 것 같은 이라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때는 입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염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려야 한다. 배고픈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이 불보살님께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 능히 소원을 이룰 수 있다. 단, 아주 다급한 소원인만큼 하루 일정 시간, 잠깐이 아니라 앉으나 서나 누우나 끊임없이 불보살을 챙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즘, 불교계에 기도가 널리 행하여지고 있어 참으로 흐뭇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런데 묘한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한다는 점이다. 처음 천수경을 외우고 그 다음 108배를 하고 또 지장경을 읽고 금강경을 읽고, 관세음보살 정근도 한참 동안하고 그것도 모자라 팔양경까지 읽고……. 물론 이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함께 하다보면 삼매를 이루기가 용이하지 않다. 오히려 더 간단히 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천수경>>을 외우고 그 다음 아미타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 중 한분을 택하여 그 분의 명호만 꾸준히 부르는 것이 좋다. 가거나 오거나 일을 하거나, 그 분의 명호가 저절로 속에서 흘러나오고 꿈에서도 염불이 되면 마음속의 소원은 꼭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다. 또 꼭 입을 소리내어 부르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은 불보살을 속으로 염하여도 좋고, 마음으로 그 모습을 그려도 무방하다. 그냥 간절히 생각하면 가피가 저절로 찾아들어 다급한 소원을 능히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의 경우에는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놓고 염불을 해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백일을 하나의 기한으로 잡는 것이 좋고, 시간이 급하면 3일 또는 7일을 기한으로 잡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기한을 정하여 꾸준히 염불을 하다보면 그 날짜가 다 채워지기도 전에 가피를 입는 듯한 징조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여 회향일 전에 염불을 그만두지 말고 꾸준히 계속하여 날짜를 채우는 것이 좋다. 또한, 한번의 기한으로 원을 이루지 못하면 또 한 차례 기한을 정하여 염불하는 것이 좋다. 우리 불자들 중에는 염불기도를 하다가 쉽게 성취를 보지 못하면, "아미타불은 나에겐 인연이 없는가보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면서 스스로를 흔드는 경우가 있다. 또 주위의 스님이나 신도가 "당신은 관세음보살보다 산신과 인연이 깊다"고 하면 그만 흔들려 "산왕대신"을 찾는 불자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흔들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것이 시련이요 염불을 방해하는 마장(魔障)이 될 수 있으므로, 더욱 지조있게 한분의 불보살을 찾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기도성취가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므로, 더욱 마음을 모아 염불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생 염불을 다짐한 경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의 외증조할머니는 나이 일흔에 '나무아미타불'염불을 시작하여 여든 여덟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이 염불하였다. 살아 생전에도 가끔씩 신통력을 보였던 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7일장(七日葬)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이 되면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한결같은 염불정신! 그 결과는 반드시 우리를 불국정토에 머물 수 있게 한다. 한결같이 염불정진하는 분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부디 부지런히 염불하여 염불삼매를 이루어보라. 삼매에 젖어들면 능히 서대문을 통과하여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보배궁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