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취부득사부득 불가득중 지마득
取不得捨不得 不可得中 只 得
모든 명상이 다 떨어진 진여자성에서는 한 명상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명상이 다 떨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전체가 허 공속에 건립되어 있지만, 허공은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버릴래 야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뜻은 모든 명상 이 본래 공한 것을 나타낸 것이니, 앞 귀절의 '당처를 여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기에서 그치고 만다면 일종의 단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중 도정견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도정견이 되느냐?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찾 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찾아보면 분명 하게 역력히 항상 알 수 있지만 모든 명상이 다 떨어져서 생각할 래야 생각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래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불교의 근본인 중도정견이 확립되는 것이지
만약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다'는 여기에 만 치우쳐 해석하게 되면 실지로 정견이 아니고 변견이 되고 맙 니다. 그래서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하여야 만 위 귀절의 바른 해석입니다.